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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59권, 숙종 43년 4월 1일 을유 2번째기사 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임금이 사은사 일행을 인견하고 청국 사정을 묻다

사은사(謝恩使) 겸동지사(兼冬至使) 여산군(礪山君) 방(枋)·이대성(李大成)과 서장관(書狀官) 권엽(權熀) 등이 돌아와 수원(水原)에서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청국(淸國)의 사정을 물었다. 이 말하기를,

"진상의(陳尙義)가 다시 모반(謀叛)한 일을 연로(沿路)에서 번갈아 수소문하였더니, 다들 말하기를, ‘모반하여 떠난 뒤로 종적이 아득하나, 그 소굴이 중국에서는 멀고 조선에서는 가까우니, 조선에서 약탈할 걱정이 있을 듯하다.’ 하는데, 그 허실(虛實)이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여러 번 사행(使行)을 겪었는데, 전에는 저 나라에 사람이 매우 많아서 관문(關門)을 메웠는데, 지금은 관문 밖의 인가를 허문 곳이 많이 있고, 관문 안에도 사람이 자못 드물었습니다. 따라서 말이 매우 귀하여 더러 암 노새를 타고 가기도 하였습니다. 대개 서달(西澾)110) 을 정토(征討)하기 때문에 이처럼 조폐(凋弊)해졌다고 합니다."

하고, 권엽이 말하기를,

"서달은 몽고 부락(蒙古部落)이라 하는데, 길에서 함거(檻車)에 남녀를 실어 보내는 것을 만나 이를 물어 보았더니, 서정(西征)에 나아가지 않은 자의 처자는 심양(瀋陽)으로 보내거나 영고탑(靈古塔)으로 보낸다 합니다. 또 저들의 당보(塘報)111) 를 보니, 13성(省)의 문서에 양향(粮餉)을 나르고 군사를 징발하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또 죄 때문에 파직된 무리 가운데 혹 은자(銀子)나 양식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도 더러 있고 싸움에 나아가기를 스스로 원하는 자도 더러 있다 하는데, 이말이 믿을 만하다면 정토에 괴로와하는 것을 알 만합니다. 서달이 있는 곳은 감보(甘甫)에서 가장 가까운데, 바로 장성(長成)의 서쪽 부근으로 산천이 매우 험하다 합니다. 해적(海賊)의 일은 관소(館所)에 머물러 있을 때에 모반하여 떠난 곡절을 상세히 물었더니, 당초 초안(招安)112) 한 뒤에 금주 수사영(金州水師營)에 유치(留置)하였으나, 주장(主將)이 은자·양식을 삭감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에 못 견디어 곧 배반하여 떠났으며, 간 곳은 알지 못하나 출몰하여 약탈할 걱정이 없지 않다 합니다. 통주(通州)의 강에 정박한 배가 전에는 앞뒤를 서로 잇대었으나, 이제는 그 곳의 배 외에 강남(江南)의 배는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혹 해금(海禁)이 매우 엄한 탓이라고 말하나, 실로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이대성이 말하기를,

"서적(西賊)은 아직 우리 나라에서 근심할 것이 아니나, 해적은 실로 염려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구득(購得)한 내각(內閣)의 문서 가운데에 조선이 근심스럽다는 등의 말이 두세 가지나 있으므로, 어떤 자는 이것으로 우리 나라를 경동(驚動)하는 계책을 삼으려 하는데, 해방(海防)을 신칙(申飭)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니, 소강 첨사(所江僉使)같은 무리는 가려서 차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이 말하기를,

"신들이 요동(遼東)에 이르렀을 때 숙소 주인이 성명은 담온유(談韞瑜)이고 스스로 오삼계(吳三桂)의 막하(幕下)이고 나이가 이제 80여 세라 하는데, 말이 서달의 일에 미치니, 그가 상자 안에서 서달의 표문(標文)을 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서달의 이름은 택왕아뢰포탄(澤旺阿蒲坦)이고 병세(兵勢)가 매우 성한데, 호황(胡皇)이 여러 번 정토하였으나, 중간에 있는 7백 리의 땅에는 물과 풀이 없으므로, 오래 머무르지 못하여 군사를 물리면 곧 다시 와서 침범하니, 중국이 자연히 피폐해진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득하지 않았는데 내어 보인 것이니, 진짜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달은 실로 저 나라의 큰 근심거리이다. 태자(太子)는 아직 갇혀 있는가?"

하자, 이 말하기를,

"혹 말하기를, ‘태자의 아들이 매우 어질기 때문에, 차마 다른 아들을 세우지 못하나 아직 폄출(貶黜)되어 있다.’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59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43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110]
    서달(西澾) : 서달자(西澾子).
  • [註 111]
    당보(塘報) : 청(淸)나라의 당보(塘報)로서, 각성(各省)에서 병부(兵部)에 파견되어 있는 제당관(提塘官)이 황제의 칙유(勅諭) 등을 초록(抄錄)하여 본성(本省)에 보내는 공문임.
  • [註 112]
    초안(招安) : 불러다가 죄를 용서하여 편히 살게 함.

○謝恩兼冬至使礪山君 李大成、書狀官權熀等歸, 復命於水原, 上引見, 問淸國事情。 曰: "陳尙義復叛之事, 沿路輒加搜訪, 皆以爲: ‘叛去後杳無蹤迹, 但其巢穴, 遠於中原, 而近於朝鮮, 恐有抄略之患’ 云, 未知虛實果如何。 臣屢經使行, 前則彼中人物甚盛, 關門嗔咽矣, 今則關外人家, 多有撤毁處, 關內人物頗稀踈。 馬畜甚貴, 或騎牝騾而行。 蓋以征討西㺚之故, 如是凋弊云耳。" 曰: "西㺚, 卽蒙古部落云, 而路上逢着檻車載送男女者問之, 則以爲不赴西征者之妻子, 或送瀋陽, 或送靈古塔云。 且見彼中(搪)〔塘〕 報, 十三省文書, 無不以運餉調兵爲言。 且以罪革職之類, 或有願納銀、糧者, 或有自願赴戰者。 此言若信, 則其困於征討, 可知。 西㺚所在處, 最近於甘甫, 乃長城西邊, 而山川極險云。 海賊事, 留館時細問叛去曲折, 則以爲當初招安後, 留置金州水師營, 而因主將減削銀、糧, 不勝飢餒, 旋卽叛去, 不知去處, 而不無出沒抄掠之患云矣。 通州江所泊船隻, 在前首尾相接矣, 今番則地土船外, 江南船隻絶罕。 或言海禁極嚴之致, 而實未可知矣。" 大成曰: "西賊姑非我國之憂, 而海賊實有可慮者。 購得內閣文書中, 有朝鮮可憂等語, 至於再三。 或者欲以此爲驚動我國之計, 而申飭海防, 似不可已, 如所江僉使之類, 恐宜擇差矣。" 曰: "臣等行到遼東, 宿所主人姓名, 談韞瑜, 而自稱吳三桂幕下, 年今八十餘。 語及西㺚事, 渠自櫃中, 出示西㺚標文曰: ‘西㺚之名, 卽澤旺阿蒲坦, 而兵勢甚盛, 皇屢次征討, 中間七百里地, 無水草, 故不能久留, 退兵則旋復來侵, 中國自然疲弊云。’ 此則非購得而出示者, 似是眞的矣。" 上曰: "西㺚實爲彼國大憂矣。 太子尙被拘囚耶?" 曰: "或云: ‘太子之子甚賢, 故不忍立他子, 而尙爾貶處’ 云矣。"


  • 【태백산사고본】 67책 59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43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