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의 방안과 유구국 외교 등에 대해 논의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후(診候)를 마치자, 도제조(都提調) 김창집(金昌集)이 말하기를,
"어제 내리신 덕음은 뜻이 간절합니다. 고요히 조리하시는 중에 백성의 일을 이토록 염려하시니, 모든 도를 안찰(按察)하는 신하와 수령(守令)·변장(邊將)들이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봉행하지 않겠으며, 더구나 각도의 백성이 누구인들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염찰(廉察)하게 하는 것도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그럴 생각이 있었으나, 전에는 다 진정을 마친 뒤에 보내어 염문(廉問)하게 하였다. 수의(繡衣)005) 에 맞을 만한 사람을 먼저 뽑아서 아뢰라."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지사(知事) 이광적(李光迪)에게 지난해 회방(回榜)006) 때에 이미 명하여 꽃을 내리고 또 먹을 것을 내리신 것은 참으로 늙은이를 우대하시는 성의(盛意)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이제 나이가 아흔에 찼는데, 전에는 이러한 사람에게 조가(朝家)에서 특별히 은전(恩典)을 베풀어 품계(品階)를 바꾸어 자급(資級)을 높여 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품계를 바꾸어 자급을 높이라고 명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도빈(趙道彬)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박사제(朴師悌)·이세경(李世庚) 등 여섯 사람이 추조(秋曹)007) 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은 참으로 전에 없던 변괴였습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도록 멀리 귀양보내어 징계될 만하고, 그 가운데에는 혹 늙고 병든 부모가 있는 자도 있으니, 정리(情理)가 가엾습니다."
하고,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도 말하기를,
"임상극(林象極)·권필형(權弼衡)이 대궐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에 비하면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전에 만력(萬曆)병신년008) 유구국(琉球國)이 그 나라의 표류인(漂流人)을 우리 나라에서 돌려보내 주었다 하여 북경(北京)에서 사례하는 자문(咨文)009) 을 주어서 하지사(賀至使) 민여경(閔汝慶)이 받아 왔습니다. 이번에 우리 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유구에 닿았다가 다행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데, 마침 세갑(歲甲)이 병신년과 서로 같아서 일이 우연한 것이 아닌 듯하니, 이번에 또한 자문을 보내어 사례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김창집도 말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그 뒤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상소(上疏)하여 그것이 옳지 않음을 말하였는데, 이르기를,
"황조(皇朝) 때에는 우리를 오히려 한집안처럼 보아서 무릇 조빙(朝聘)하고 교제할 즈음에 매우 구금하지 않았으나, 지금도 저들이 과연 황조처럼 태연히 의심하지 않을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번복(藩服)이 스스로 서로 글을 통하는 것이 외교(外交)의 경계를 범하였다 하여 혹 시끄러운 말이 있게 된다면, 황조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명하여 저들이 말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또 만력 때에는 우리 사신이 마침 저 나라의 사신이 조공(朝貢)할 때를 당하여 그대로 전하였으므로, 이를테면 열국(列國)이 서로 선물하는 것과 같아서 애초에 왕실(王室)에서 금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공공연하게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하는 것은 당시에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듯합니다. 또 만력 때의 자문은 황조를 찬양하여 받드는 말로 그 주의(主意)를 삼았으나, 지금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만약 그런 말도 없이 유구국에 사례만 한다면, 예부에서 보고서 성내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일을 드디어 그만두었다.
- 【태백산사고본】 67책 59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32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외교-야(野) / 외교-유구(琉球)
- [註 005]수의(繡衣) : 여사의 별칭.
- [註 006]
회방(回榜) :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돐이 되는 해.- [註 007]
추조(秋曹) : 형조(刑曹).- [註 008]
병신년 : 1596 선조 29년.- [註 009]
자문(咨文) : 조선조 때 중국과 왕래하던 외교 문서의 하나. 국왕의 명의로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의 육부(六部)와 동등한 관계에서 조회·통보·회답하던 문서임.○丁巳/藥房入診。 診候畢, 都提調金昌集曰: "昨下德音, 辭旨懇惻。 方在靜攝之中, 軫念民事至此, 凡諸按道之臣、守令、邊將輩, 豈不惕念奉行, 況彼諸路民生, 孰不感泣耶? 第發遣御史, 廉察賑政, 亦不可已?" 上曰: "予亦有此意, 而在前皆於畢賑後, 發遣廉問矣。 繡衣可合人, 先爲抄啓。" 昌集又言: "知事李光迪, 昨年回榜時, 旣命賜花, 又賜食物, 實出優老之盛意, 而今年恰滿九十, 在前如此之人, 朝家特施恩典, 變品陞資矣。" 上命變品加資。 都承旨趙道彬言: "昨年朴師悌、李世庚等六人, 作挐秋曹, 實是前所未有之變怪, 而經年遠配, 足以懲艾。 其中或有有老病父母者, 情理可矜。" 提調閔鎭厚亦言: "比諸林象極、權弼衡之作挐禁扃者, 有間。" 上命放送。 鎭厚言: "昔在萬曆丙申, 琉球國以我國送還其國漂人, 順付謝咨於北京賀至使閔汝慶受來矣。 玆者我國人, 漂到琉球, 幸得生還, 而歲甲適與丙申相同, 事若非偶。 今番亦宜有送咨申謝之擧矣。" 昌集亦以爲言, 上命廟堂稟處。 其後禮曹判書宋相琦上疏, 言其不可, 有曰:
皇朝時則視我猶一家, 凡於朝聘交際之間, 不甚拘禁, 臣未知卽今彼中之坦然無疑阻, 果如皇朝耶? 若謂藩服之自相通書, 犯外交之戒, 或有嘖嘖之言, 則其將以皇朝時, 亦有此事爲解, 而可以杜彼之說耶? 且萬曆時, 則我使値彼使朝貢之日, 仍爲傳之, 譬如列國縞紓之贈, 初非王室之所禁也, 至於公移禮部, 竊恐當時亦不敢爲此也。 且萬曆時咨文, 贊戴皇朝之語, 爲其主意, 今則旣不可爲此, 若又沒之, 只謝琉球, 則禮部見之, 安如其無恚耶?
上是其言, 事遂寢。
- 【태백산사고본】 67책 59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632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외교-야(野) / 외교-유구(琉球)
- [註 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