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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8권, 숙종 42년 12월 29일 을묘 1번째기사 1716년 청 강희(康熙) 55년

윤증을 배척하여 선정이라는 칭호를 금할 것을 청한 태학생 김치후 등의 상소문

태학생(太學生) 김치후(金致垕) 등 80인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천지의 기(氣)에 음(陰)이 있고 양(陽)이 있어서 사람에게서는 사(邪)가 되고 정(正)이 되는데, 그 대소(大小)가 왕래하고 반복하여 굴신(屈伸)하는 것은 모두가 이란(理亂)의 운수에 관계되니, 그 기미가 매우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쾌괘(夬卦)631) 를 설명한 단사(彖辭)632) 에 ‘쾌는 결(決)이니, 강(剛)이 유(柔)를 결단하여 없애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소장(消長)·부억(扶抑)할 즈음에 엄하게 한 것이 지극합니다. 지금 세도(世道)가 거의 떨어졌다가 다시 연장되고 사문(斯文)이 이미 어두어졌다가 도로 밝아졌으니 본디 다시 형통(亨通)하는 운수라 하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시비·사정(邪正)의 분별에 있어서 단칼로 자르지 못하시므로 참으로 쾌결(夬決)하는 의리에 부족함이 있으니, 또 뒷날에 제자리걸음하는 근심이 전보다 심하지 않을런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들은 이것을 염려하여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한 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도덕·학문의 천심(淺深)과 고하(高下)는 신들이 엿보고 헤아릴 것이 아닐지라도 대개 그 행한 것은 주자(朱子)의 도(道)이고 중하게 여긴 것은 《춘추(春秋)》의 의리이니, 출처(出處)하는 것이 시종 순수하여 한결같이 의리가 바른 데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를 존경하는 자는 양(陽)이고 군자(君子)이며 이를 반대하는 자는 음(陰)이고 소인(小人)이니, 이것은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심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 문하(門下)에 화(禍)가 일어나고부터 변괴가 거듭 생겨서 세도(世道)가 승강(升降)하고 반복하는 것을 거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의리가 어둡고 이언(異言)이 시끄러운 것은 근일에 이르러서 지극합니다. 그러나 접때 전하께서 윤증(尹拯)신유년633) 의서(擬書)를 가져다 보시고 하교하시기를, ‘글의 사연이 과연 박절한 것이 많으니 전연 허물이 없는 데로 돌릴 수는 없다.’ 하시고, 이어서 또 묘문(墓文)에는 본디 윤선거(尹宣擧)를 욕한 것이 없고 《주례(周禮)》의 글은 마침내 오늘날의 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니, 윤증이 스승을 저버린 죄가 비로소 연감(淵鑑)에서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정섭(靜攝)하시는 중에 두 선생의 서원(書院)의 편액(扁額)을 손수 쓰시고 간절한 비망기(備忘記)를 특별히 내려 선비의 추향을 정하고 간사한 말을 그치게 한다고 분부하셨으니, 더욱이 양을 부축하고 음을 누르는 성심(盛心)을 우러러 볼 수 있습니다마는, 전하께서 윤증을 처치하시는 방도는 아직도 허물이 있는 것과 허물이 없는 것 사이에 두어 끝내 매우 미워하여 배척하시는 거조(擧措)는 없었습니다. 혹 전하께서 평소에 예우(禮遇)하였다는 것을 생각하여 우선 도내(道內)에 두시더라도 그 일은 실로 천리(天理)와 민이(民彛)에 관계되는데, 전하께서 끝내 어찌 사사로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윤증의 글 가운데에 나열한 것은 모두가 예전에 이른바 크게 간특한 자의 지극히 이를 데 없는 행실입니다. 안으로는 기질(氣質)과 학문을 겉으로는 문장(文章)과 사공(事功)을 모두 패(霸)와 이(利)의 죄로 돌렸는데, 윤증이 과연 본원(本源)의 심술(心術)을 의심하게 되었다면 문하에 있던 40년 동안에 강론한 것이 무슨 일이기에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여기에 미친 것은 없고 책상자에 사사로이 감추어 둔 것 가운데에서 죄악을 열거하여 평생을 판단하되 법리(法吏)가 율문(律文)을 엄하게 적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공교하게 헐뜯은 것이 이러한데도 공정한 마음으로 학문을 논하였다고 스스로 말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윤증의 문도(門徒)는 문득 이것을 간쟁(諫諍)하는 아들과 충성한 신하에 견주는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또는 신하가 임금에게 간쟁하는 일은 본디 있으나, 어찌 윤증이 스승을 대우하듯이 고약한 말을 한 일이 있었습니까? 흉당(凶黨)이 죄를 꾸며서 송시열을 죽일 때에 억지로 만든 모든 죄안(罪案)이 윤증의 글 가운데에 있는 뜻에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맥락(脈絡)과 귀추(歸趣)가 아득하게 서로 맞고, 대의(大義)를 헐뜯은 것으로 말하면 흉당이 못한 것을 윤증은 해냈습니다. 그렇다면 윤증의 글이 올봄에 비로소 나왔더라도 그 말은 본디 이미 남의 손을 빌어서 술책이 부려진 것입니다. 윤증을 까닭없이 〈스승을〉 저버린 것으로 돌리면 상정(常情)에 그럴 듯하지 않으므로 논하는 자가 문득 묘문을 빙자하여 말하였으나, 묘문이 아뢰어졌되 본디 헐뜯은 말이 없자 십수 년 동안 빙자하여 말하던 것으로 낙착되지 않을 것이므로 본원(本源)에 관한 말로 바꾸어 마치 윤증이 이러한 것을 보고서 끊은 것처럼 하였는데, 그 증거로 삼은 것이 바로 의서에 있습니다. 의서가 나오고서 문득 그 묵은 유감과 함께 숨기려 하니, 전후에 고집하던 것이 모두 거짓말이 되었습니다. 대개 묘문에는 본디 욕한 것이 없었으나 윤증의 마음에는 차지 않으므로, 유감을 마음속에 쌓아 두고 틈이 생길 때를 기다리다가, 급기야 세도가 여러 번 변하여 화기(禍機)가 장차 임박하니 스스로 배반할 생각을 남몰래 결정하여 겉으로는 예모(禮貌)를 지키는 체하고 속으로는 실로 함해(陷害)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에게 보낸 서신에서 몰래 헐뜯었다가 일이 드러나게 되니, 비로소 감히 스승과 왕복할 때에 곧바로 가리켜 배척하되 마치 성벽(城壁)에 다가가서 싸움을 돋우며 적국이 노하지 않을까 염려하듯 하여 반드시 틈이 생겨 고절(告絶)하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이미 끊은 뒤에는 스스로 구실이 모자란다고 생각되자 그 스승을 걸주(桀紂)634) 에 견주고 마침내 수업(受業)한 권수(卷數)의 다소를 헤아려 저버려도 해롭지 않다는 뜻을 보였으니, 이것은 다 스승과 제자가 있은 이래로 들어 보지 못한 큰 변괴입니다. 윤증이 조심스럽게 많은 생각을 한 것은 또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고 반드시 아부하는 자가 점점 많아져 기세가 퍼져서 힘이 분문(分門)하여 대항할 만하게 되기를 기다려서야 감히 창을 잡고 쳤으니, 이것이 어찌 자제를 거느리고 부모에게 배반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오명윤(吳命尹)의 소(疏)에 이른바 병이 부스럼과 혹으로 드러났고 조정의 권세를 농간하여 국가를 병들게 하였다는 것은 모두가 윤증에게서 이어받은 꼬투리인데, 마침내 스스로 기사년635) 의 흉당의 전철(前轍)을 밟는 데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변함없이 버리지 않는 것은 다만 예설(禮說)의 일과 목천(木川)의 일과 인인(忍人)이니 수빈(水濱)이니 하는 따위 말인데, 예설은 이미 이시정(李蓍定)의 소에서 분명히 밝혀졌고, 더구나 허황(許璜)이 생존하여 목천의 일은 언근(言根)이 명백하며, 김수택(金壽澤)이 상소하여 【김익희(金益熙)의 증손인 김수택이 상소하여 그 할아버지가 과연 인인에 관한 말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인인이니 수빈이니 하는 말이 절로 귀착이 있게 되었으니, 날조한 정상은 다른 것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윤증에게 편드는 무리가 처음에는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이 있다는 분부에 자중(藉重)636) 하더니 나중에는 본원의 심술에 관한 말을 만들어 내었으며, 또 혹 이미 끊은 뒤 수년 동안의 말과 글에서 주워 모아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당연히 끊어져야 할 증거로 삼아 동쪽에서 패하면 서쪽으로 달리고 옷깃을 잡으면 팔꿈치가 나타났으니, 돌아보건대, 어찌 함께 곡직을 겨루고 시비를 다툴 만하겠습니까?

근래 피차의 글이 공거(公車)에 함께 들어와서 전후의 사실이 죄다 예조(禮曹)에 올랐으므로 윤증의 심적(心跡)은 본디 이미 마디마디 드러났으나, 전하께서 얼음이 풀리듯 깨달으신 것은 마침 의서가 나온 때에 있었으니, 이 글은 또한 다행히도 그 무리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폐간(肺肝)을 다 볼 수 있었으나, 또한 불행히도 윤증이 죽기 전에 나오지 않아서 성명(聖明)께 바로잡혀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윤증이 그 스승을 근거없이 헐뜯은 것은 이 글 하나만으로도 족한데, 또 예설의 일에 따라 어록(語錄)을 집성(輯成)하고 증연(增衍)을 창출(創出)한 것이 모두 근거없는 말이었으며, 이것도 모자라서 그 아우 윤추(尹推)를 시켜 《회려시말(懷驪始末)》 한 통을 짓게 하였는데, 그 선정에서 독을 부린 것은 더욱이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개 회(懷)란 선정이 살던 회덕(懷德)이고 여(驪)란 적신(賊臣) 윤휴(尹鑴)가 살던 여주(驪州)인데, 그 글에 ‘남인(南人)이 아니었더라도 회가 족히 당시의 일을 도와 이루었을 것이니, 그가 죄를 얻고도 자기 집에서 죽은 것은 실로 다행하다.’ 하고, 또 ‘회와 는 한 일이 거의 같고 흉사(凶死)한 것이 서로 같다.’ 하며, 또 ‘윤휴보다 또한 심하다.’ 하였습니다. 아! 그 이른바 당시의 일이란 곧 기사년에 흉악한 무리가 폐모(廢母)한 일이며, 그 이른바 흉사한 것이 서로 같다는 것은 곧 귀양간 이후의 명을 적신 윤휴가 처형된 것과 마찬가지로 본 것이니, 윤증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어찌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정이 세변(世變)을 만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 것은 일대(一代)의 사류(士類)가 마음이 무너지고 가슴이 아플 뿐이 아니라 평소에 선정을 좋아하지 않던 자일지라도 모두 슬퍼하고 아까와하는데, 더구나 40년 동안 아버지처럼 섬긴 사람만은 몹시 슬퍼서 상심하지 않고 그 죽음이 다행이라 하고 윤휴보다 심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마음이 잔인하고 그 말이 흉참(凶慘)하기가 이와 같은데, 신들이 바야흐로 스승을 저버린 죄로 꾸짖으려 한다면 마침 너무 소홀함을 보일 만할 것입니다.

의서 가운데에 이른바 주자의 도(道)와는 서로 같지 않은 듯하고 《춘추》의 의리는 전혀 실사(實事)가 없다 한 것은 더욱이 사문(斯文)·세도(世道)의 화(禍)를 연 것인데, 윤증이 스승을 저버린 것이 반드시 이 일에 뿌리를 두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니, 신들이 본원에 소급하여 논하겠습니다.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이 일찍이 말하기를, ‘맹자(孟子)의 공(功)은 우(禹)보다 못하지 않고 주자(朱子)의 공은 또 혹 더하다. 주자가 아니었으면 요(堯)·순(舜)·주공(周公)·공자(孔子)의 도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송시열이 잘 지켜 잠시도 잊지 않고 외우며, 성인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이 말은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가 주자의 글을 신명(神明)처럼 받들고 부모처럼 믿어서 한 가지 언행(言行)과 한 가지 동정(動靜)까지도 한결같이 주자의 법문(法門)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마침내 자신이 도를 위하여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러하였으므로 주자를 저버린 말은 모두 문득 다 엄한 말로 매우 배척하였습니다. 적신 윤휴《중용(中庸)》을 개주(改註)하였을 때에 송시열은 사문의 난적(亂賊)이라고 배척하였으나 윤증의 아비인 윤선거만은 힘껏 감싸고 고명(高明)한 것이 송시열보다 낫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일찍이 꾸짖기를, ‘《춘추》의 법으로는 난신(亂臣)·적자(賊子)는 먼저 그 당여(黨與)를 다스리는 것이니, 공(公)은 윤휴보다 먼저 처형되어야 한다.’ 하였는데, 윤휴가 날뛰게 되어서도 윤증은 오히려 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무(綢繆)637) 한 자취는 윤휴가 지은 윤선거의 제문(祭文)에서 볼 수 있으니, 송시열이 이른바 윤휴의 독에 맞았다고 한 것은 참으로 실제에 맞는 말입니다. 윤증이 그 아비의 연보(年譜)를 짓게 되어서도 윤휴를 숭장(崇奬)하여 경서(經書)의 설(說)에 얽매이지 않고 옛사람의 말에 얽매이지 않아서 견식(見識)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윤휴를 주자 이상으로 뛰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가 주자를 저버리고 적신 윤휴를 편든 것은 실로 가정에서 심법(心法)을 전수(傳授)한 것이니, 윤증으로 하여금 송시열주자와 서로 비슷하다고 말하게 한다면 송시열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겠습니까?

《춘추》의 대의(大義)로 말하면 곧 송시열이 일생 동안 부담한 것입니다. 효종(孝宗)께서 일찍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것이 내 책임인데, 나와 이 일을 함께 하는 것은 경(卿)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시니, 송시열이 지우(知遇)에 감격하였습니다. 모든 시행하는 것이 모두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일이었는데, 하늘이 송(宋)을 복되게 하지 않아 문득 승하하시어 철장(鐵杖)·목마(木馬)가 천고에 한을 끼쳤으나, 독대(獨對)하여 말한 것에서도 오히려 대신의 신밀(愼密)한 계책을 상상할 수 있어 천년 뒤에도 지사(志士)가 눈물을 흘리게 할 만하니, 풍성(風聲)·의열(義烈)은 영구히 천하·후세에 할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뛰어나게 볼 만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윤증만은 무슨 마음으로 감히 방자하게 이토록 헐뜯었겠습니까? 여기에도 그러할 까닭이 있었습니다. 대개 윤선거는 젊었을 때에 강개(慷慨)하고 또한 일찍이 대의(大義)로 자허(自許)하였으나, 강도(江都)의 변을 당하게 되어서는 벗과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나 죽지 않았고 아내와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나 역시 죽지 않고서 이름을 고치고 종[奴]이 되어 오랑캐[虜]에게 항복하여 구차히 면하였으니, 자신의 명예가 크게 떨어져 세상의 큰 치욕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사우(師友) 사이에서 종유(從游)하여 다행히 허물을 보충하였다는 이름을 얻기는 하였으나, 자신이 중죄를 져서 끝내 대의에 용납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의를 듣기 싫어하는 뜻이 뱃속에 가로붙어 닿는 곳마다 드러나서, 사죄라는 이름은 오로지 구차히 산 것 때문이었으나, 바뀌어서 명을 어긴 죄가 되었고, 헛된 명성을 경계한 것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인 듯하였으나 실은 해치려는 마음에서 말미암았는데, 감히 죽지 않은 뜻을 스스로 도해(蹈海)의 절개로 돌렸습니다.

헐어 없앤 판본(板本) 가운데에 있는 글로 말하면 비록 근거없이 헐뜯은 것은 아닐지라도 성조(聖祖)께서 당시에 처변(處變)하신 일을 넌지시 지극히 더러운 자신에 견주어 후세 사람이 감히 제흠을 의논하지 못하게 하여 스스로 엄폐할 생각을 하였으니, 그 또한 외람되고 무엄하기가 심한 것입니다. 윤선거의 마음 쓰고 생각하는 것이 본디 이러하므로 윤증이 계술(繼述)하고 경영한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그 아비가 구차하게 살아 남은 허물을 본디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다고 말하기까지 하여 반드시 더할 나위없이 착하고 허물이 없는 처지에 두려하면서 송시열에 대하여는 힘이 부족할까 염려하듯이 방자하게 헐뜯었으니, 그 전혀 사실이 없는 배척도 바로 가법(家法)을 전수한 것입니다. 대개 그 마음은 세상에 이런 대의가 없어지고서야 난을 당하여 구차히 살아 남은 것을 충분한 도리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들이 마음에 더욱이 통탄한 것이 있습니다. 근년 윤증이 죽었을 당초에 이른바 제문(祭文)이라는 데에 무향(婺鄕)638) 의 정학(正學)이라 일컬은 것은 광대 놀음과 거의 같은데다가 심지어 대절(大節)을 지켰다고까지 한 것은 더구나 아주 그럴듯하지도 않다는 것은 삼척 동자라도 다 그 가소로움을 알 것인데, 윤증에게 편드는 자는 따라서 화응(和應)하여 드디어 《춘추》의 대의를 윤가 부자에게 돌리고 송시열을 가리켜 빈말을 해댄다고 하였습니다. 아! 《춘추》의 의리는 주실(周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쳐 사람이 오랑캐의 풍습을 따르는 것을 면하게 하는 것일 뿐인데, 이제 환난을 당하여 창졸한 기회에 욕된 것을 무릅쓰고 구차히 살아 남아서 이것이 《춘추》의 의리라 하고, 위아래가 거꾸로 놓일 때에 문을 닫고 구제하지 않고서 이것이 《춘추》의 의리라 하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습니까? 윤증 부자가 마음을 다 써서 오랑캐[虜]에게 아첨한 집의 자손 【최석정(崔錫鼎)이 윤증의 제문을 지었다.】 에게서 이 ‘절의(節義)’라는 두 자를 겨우 얻었으니, 이것이 어찌 영예가 될 만하겠습니까?

아! 윤증은 외모가 순후(醇厚)한 듯하나 마음은 음밀(陰密)하여 밖으로는 기세(氣勢)를 끼고 속에는 기괄(機栝)639) 을 감추었습니다. 화복(禍福)을 따르고 피할 적에 힘을 쓰고 윤리가 무너지고 끊어질 때에 입을 다물며, 한 편의 흉당(凶黨)과는 친밀하다가 소원하고 헤어지는 듯도 하다가 모이는 듯도 하여 혈맥(血脈)은 서로 관통하고 정적(情迹)은 헤아릴 수 없었는데, 《가례원류(家禮源流)》가 나타나서 의리에 어그러진 죄가 더욱 드러났고 의서(擬書)가 나와서 스승을 무함한 자취가 더욱 나타났으니, 한 몸으로서 두 스승을 저버려 세도(世道)·인심이 이토록 무너지게 한 것은 참으로 윤증이 으뜸입니다. 윤증이 폐고(廢錮)에서 기신(起身)한 것은 실로 기사년 초에 있었으므로 이것만으로도 윤증을 부끄러워 죽게 할 만한데, 그대로 추배(推排)하여 정승 자리에 앉히고 죽어서는 외람되게 선정(先正)이라는 호칭을 붙이니, 이것으로 세변(世變)을 볼 만합니다. 접때 대신(臺臣)이 말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으나, 이미 말하였으면 어찌하여 윤선거를 선정이라 부르는 것만을 금하고 윤증에게는 미치지 않았습니까?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현사(賢邪)의 분별을 살피고 소장(消長)의 기미를 염려하여, 윤증에 대한 선정이라는 참칭(僭稱)을 금하여 사설(邪說)의 근원을 영구히 막아서, 대의를 어두워진 데에서 밝히고 사도(師道)를 이미 없어진 데에서 보존하여, 천리(天理)가 날로 밝아지고 인심이 날로 바루어지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어진 수천 마디 말이 오로지 바른 것을 돕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여 근본을 뽑고 본원을 막으려는 데에서 나왔으므로 말이 엄하고 사리가 밝아서 펴 보고 권태를 잊으니, 가탄(嘉歎)하여 마지않는다. 내가 선정에 대하여 존경하는 정성을 더욱 도타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참칭 【윤증에 대한 선정이라는 호칭이다.】 은 이제부터 아주 금하여 시비가 더욱 밝아지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2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윤리(倫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631]
    쾌괘(夬卦) : 역(易)의 육십 사괘(六十四卦)의 하나, 군자(君子)의 도(道)가 성장(盛長)하고 소인(小人)이 소망(消亡)하는 상(象)이라 함.
  • [註 632]
    단사(彖辭) : 역(易)의 한 괘(卦)의 뜻을 통틀어 설명한 말. 주 문왕(周文王)이 지었다 함.
  • [註 633]
    신유년 : 1681 숙종 7년.
  • [註 634]
    걸주(桀紂) : 중국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 성군(聖君)으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꼽는 반면, 폭군(暴君)으로는 걸(桀)과 주(紂)를 꼽음.
  • [註 635]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 [註 636]
    자중(藉重) : 위엄이 무거운 데에 의지함.
  • [註 637]
    주무(綢繆) : 미리미리 빈틈없이 자세하게 준비함.
  • [註 638]
    무향(婺鄕) : 주자의 출생지인 무원(婺源)을 가리킴.
  • [註 639]
    기괄(機栝) : 쇠뇌의 시위를 걸어 화살을 쏘는 장치. 민첩하여 기선을 잡는 것을 뜻함.

○乙卯/太學生金致垕等八十人上疏。 略曰:

天地之氣, 有陰有陽, 而在人則爲邪爲正。 其大小往來, 反覆屈伸, 無不係乎理亂之數, 其幾甚可畏也。 是以, 聖人贊《夬》之彖曰: "《夬》, 決也, 剛決柔也", 其所致嚴於消長扶抑之際者, 至矣。 目今世道幾墜而復延, 斯文旣晦而旋明, 則固可謂復亨之運, 而第殿下, 於是非邪正之分, 未能一刀劈斷, 實有歉於夬決之義, 又安知異日躑躅之憂, 不有甚於往時乎? 臣等爲是之懼, 不敢不冒死一陳焉。 竊惟先正臣宋時烈, 道德、學問之淺深高下, 雖非臣等所可窺測, 蓋其所行者, 朱子之道, 所重者, 《春秋》之義, 出處終始, 粹然一出於義理之正, 尊此者爲陽爲君子, 反此者爲陰爲小人, 此可以俟百世而不惑矣。 一自禍起門墻, 變怪層生, 世道之升降反覆, 殆不可勝計, 而義理之晦塞, 異言之喧豗, 至近日而極矣。 乃者殿下, 取覽尹拯辛酉擬書, 而下敎曰: "書辭果多操切, 不可歸之於全然無過之地。" 繼又洞辨墓文之元無辱及尹宣擧, 《周禮》文字之終不襯合於近日事, 則之背師之罪, 始莫逃於淵鑑之下矣。 復於靜攝之中, 手書兩先正院額, 特下備忘, 綣綣以定士趨熄邪說爲敎, 尤可以仰見扶陽抑陰之盛心, 而殿下所以處者, 尙在有過無過之間, 終無深惡痛斥之擧, 其或殿下顧戀平日之禮遇, 姑置度內, 而乃其事則實關天理、民彝之重, 殿下終安得以私之哉? 書中所臚列者, 罔非古所謂巨奸大慝, 至無狀之行, 內而氣質、學問, 外而文章、事功, 無不歸之於覇與利之科。 使, 果致疑於本源心術, 則在門下四十年, 所講何事, 而曾無一言及此, 乃於篋笥私藏中, 列數過惡, 句斷平生, 無異法吏之律文? 巧詆如此, 而自謂公心論學, 人孰信之? 之門徒, 輒以是比之於諍子、忠臣, 子之於父, 臣之於君, 諍與諫則固有之, 何嘗有惡言相加, 如之待師者哉? 當凶黨之構殺時烈也, 凡所勒成罪案, 不出書中意, 脈絡歸趣, (沕)〔脗〕 然相合, 而至於訾毁大義, 則凶黨之所不能, 而乃忍爲之。 然則書雖始出於今春, 而其言則固已假手而見售矣。 歸於無故背絶, 則若不近常情, 故論者輒以墓文藉口, 逮夫墓文入徹, 元無詆辱之語, 則十數年所藉口爲說者, 宜無着落, 故變爲本源之說, 有若見其如是而絶之, 其所取證, 卽在擬書。 擬書出而便欲與其宿憾而諱之, 前後所執, 都歸大脫空矣。 蓋墓文, 固無所詆辱, 而在心則爲不滿, 蓄憾在中, 以待釁隙之日, 及其世道屢變, 禍機將迫, 陰決其自貳之計, 外存禮貌, 內實陷害, 遂至潛詆於與先正臣朴世采書尺, 而事乃敗露, 則始敢直加指斥於與師往復之際, 有若臨壁挑戰, 惟恐敵國之不怒, 必欲生釁, 告絶而後已。 旣絶之後, 自謂有口實之(慙)〔漸〕 , 譬其師於, 卒計其受業卷數之多少, 以示背亦無害之意, 此皆自有師生以來所未聞之大變也。 之操心積慮, 顧非一朝一夕之故, 而必待附麗滋多, 氣勢鴟張, 力足以分門相抗而後, 乃敢操戈攻之, 此何異於率子弟叛父母耶? 吳命尹疏所謂, 病敗瘡疣, 弄朝權病國家者, 無非傳襲之緖餘, 而卒自陷於己巳凶黨之塗轍。 其所齗齗不捨者, 只是禮說事、木川事、忍人、水濱等語, 而禮說則業已洞辨於李蓍定疏。 又況許璜生存, 而木川之事, 言根明白, 金壽澤陳疏, 【金益熙曾孫壽澤上疏, 言其祖果有忍人之說。】 而忍人、水濱之說, 自有歸宿, 捏造之狀, 他可推知。 蓋右之徒, 始則藉重於父師輕重之敎, 終則創爲本源心術之論, 又或掇拾已絶後數年間言語、書尺, 以爲師生當絶之證, 敗東騖西, 捉衿肘見, 顧何足與較曲直爭是非哉? 近來彼此章牘, 交於公車, 前後事實, 悉登睿照, 之心迹, 固已節節破綻, 而殿下之渙然開悟, 適在於擬書之出。 是書也, 其亦幸而出於其徒之口, 得以盡見其肺肝, 而其亦不幸, 而不出於未死之前, 不見正於聖明之下也。 之誣毁其師, 此一書足矣, 而又因禮說事, 輯成語錄, 創出增衍, 罔非無根之說, 此猶不足, 使其弟, 作《懷驪始末》一通, 其所逞毒於先正者, 尤不忍言。 蓋懷, 先正居懷德也。 , 賊驪州也, 其書有曰: "雖非南人, 懷足以贊成當日之事, 其得罪而死在自家, 實大幸也。" 又曰: "懷與驪事, 行略同而凶死相類。" 又曰: "視抑又甚焉。" 嗚呼! 其所謂當日之事, 卽指己巳群凶廢母之擧也。 其所謂凶死相類, 卽以楚山後命, 一視於賊之伏法也。 雖無狀, 何忍爲此言耶? 先正之遭値世變, 莫全性命者, 不但一代士類, 崩心痛胸, 雖平日不悅於先正者, 亦莫不齋咨歎惜。 況以四十年父事之人, 獨無衋然傷恫之懷, 而乃謂之其死大幸, 至以視又甚爲言? 其心之殘忍, 其言之凶慘如此, 臣等方欲責之以背師之罪, 則適見其太踈矣。 擬書中所謂朱子之道, 若不相似, 《春秋》之義, 了無實事云者, 尤有以啓斯文、世道之禍, 而之背師, 未必不根柢於此事, 則臣等請溯源而論之。 先正臣金長生嘗曰: "孟子之功, 不在下, 而朱子之功, 又或過之。 非朱子之道不明。" 時烈服膺而誦之, 以爲雖聖人復起, 不易斯言, 故其於朱子之書, 敬之如神明, 信之如父母, 以至一言一行, 一動一靜, 無一不本於朱子法門, 卒以身殉道而不之悔。 惟其如是, 故凡於背朱子之說, 輒皆嚴辭痛闢, 當賊之改註《中庸》也, 時烈斥之以斯文亂賊, 而獨之父宣擧, 力加庇護, 至謂之高明之過。 時烈嘗責之曰: "《春秋》之法, 亂臣、賊子, 先治其黨與, 公當先伏法矣。" 至猖獗, 而猶不肯絶, 綢繆之迹, 可見於宣擧之文, 則時烈所謂毒所中云者, 眞實際語也。 及撰其父年譜, 而奬以不拘經說, 不泥古人言語, 見識超詣過人, 則是使, 突過朱子以上, 其背朱子而黨賊, 實是家庭傳授心法。 使而謂時烈, 相似於朱子, 則何以爲時烈也? 若夫《春秋》大義, 卽時烈一生所擔負者。 孝廟嘗敎之曰: "明天理正人心, 是予責也。 與我共此, 捨卿其誰?" 時烈感激知遇, 凡所施爲, 莫非明天理正人心之事。 雖天不祚, 弓劍遽遺, 鐵杖、木馬, 流恨千古, 而獨對說話, 猶可以想見密勿之訏謨, 千載之下, 足令志士隕涕, 風聲、義烈, 永有辭於天下後世。 斯豈非卓然可見之實, 而獨何心, 乃敢肆然疵毁之至此耶? 此亦有由然矣。 蓋宣擧少日慷慨, 亦嘗以大義自許, 而及至江都之變, 與友約死而不死, 與妻約死而不死, 以至改名爲奴, 降苟免, 身名一敗, 爲世大僇。 後雖追隨於師友之間, 幸而得補過之名, 而自知身負重罪, 終難容於大義。 是以惡聞大義之意, 橫着肚裏, 觸處呈露, 死罪之稱, 專爲苟活, 而轉作違命之罪, 虛聲之戒, 似若勉以實功, 而實由於忮克之心, 敢以不死之義, 自歸於蹈海之節。 如毁板中文字, 雖非故爲誣毁, 而以聖祖當日之處變, 隱然譬擬於至穢之身, 要使後人, 不敢議其疵, 以爲厭然自掩之計, 其亦僭妄無嚴之甚矣。 宣擧設心造意, 本自如此, 故之所紹述經營者, 專出於是。 其父偸生之愆, 至謂之元無可死之義, 必欲置之於盡善無過之地, 而於時烈則公肆譏詆, 惟恐不力, 其了無實事之斥, 亦是傳授家法。 蓋其心以爲世間無此大義, 然後臨亂偸生, 方可謂十分道理也。 臣等尤有所痛惋於中者, 向年死之初, 所謂祭文, 稱之以婺鄕正學, 殆類於侏儒之戲, 而至於大節斯存之云, 尤萬萬不似。 雖三尺童子, 亦皆知其可笑, 而右者, 從而和之, 遂以《春秋》大義, 歸之於尹家父子, 而指時烈爲騖外空言。 噫! 《春秋》之義, 尊室攘夷狄, 使人得免於左袵之域者, 是已, 今乃當患難倉率之會, 冒辱偸生, 而曰此《春秋》之義也, 値冠屨倒置之日, 閉戶不救, 而曰此《春秋》之義也, 古今天下, 安有如許道理? 之父子, 費盡心機, 僅得此節義二字於媚家子孫, 【崔錫鼎作祭拯文。】 此何足爲榮哉? 噫! 貌若醇厚, 而心則陰密, 外挾氣勢, 而中藏機括, 費力於禍福趨避之際, 緘口於彝倫斁絶之日。 一番凶黨, 乍親乍踈, 如離如合, 血脈相貫, 情迹叵測, 《源流》發而悖義之罪益著, 擬書出而誣師之迹愈彰。 以一身而背兩師, 使世道、人心, 壞敗至此者, 實爲之首也。 之起廢, 實在己巳之初。 此足以令愧死, 而因仍推排, 坐致三事, 及其死而猥加先正之稱, 此足以觀世變矣。 向使臺臣, 不言則己, 旣言之, 則何以獨禁宣擧之先正, 而不及於乎? 伏乞聖明, 察賢邪之分, 軫消長之幾, 禁尹拯先正之僭稱, 而永塞邪說之源于, 以昭大義於寢晦, 存師道於旣滅, 使天理日明, 人心日正。

上答曰: "縷縷數千言, 亶出扶正斥邪, 而拔本窒源, 辭嚴理明, 披覽忘倦, 嘉歎不已也。 予於先正, 可不益篤尊敬之誠哉? 所謂僭稱, 【尹拯先正之稱。】 自今痛禁, 使是非益明焉。"


  •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2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윤리(倫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