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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8권, 숙종 42년 12월 6일 임진 1번째기사 1716년 청 강희(康熙) 55년

유구국에 표류하였다가 청국을 거쳐 돌아온 진도군의 백성 9인에게 그 사정을 문초하다

전라도 진도군(珍島郡)의 백성 김서(金瑞) 등 아홉 사람이 바다에서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닿았는데, 그 나라에서 청국(淸國)으로 보냈으므로 청국에서 이자(移咨)하고 내보냈다. 김서 등이 서울에 이르니, 임금이 비국(備局)에 명하여 바다에서 표류한 사정을 문초하게 하였는데, 김서 등이 전말을 대략 써서 대답하기를,

"갑오년608) 8월 7일에 진상(進上)할 생복(生鰒)609) 을 캐러 배를 같이 타고 바다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대양(大洋)에서 출몰한 지 17일만에 비로소 유구국 지경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40여 인이 와서 모여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좁쌀죽을 먹여 주린 창자를 적시게 하고는 곧 부축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가 밥을 갖추어 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별관(別館)을 지어서 살게 하면서 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어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고 의복과 음식을 수시로 장만하여 주며 상하 남녀(上下男女)가 번갈아 보러 와서 주찬(酒饌)을 주었으니, 그 나라의 풍속이 순후(醇厚)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서 한 해를 넘겨서 그 지방말을 조금 알았는데, 그 왕성(王城)까지의 거리를 물었더니 10리쯤에 지나지 않았고 종소리가 때때로 은은히 들렸습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동서로 4일정(日程)이고 남북은 동서에 미치지 못하는데, 대저 산은 높고 들은 좁아서 밭이 많고 논이 적으며, 기장과 삼은 나지 않고 뽕과 모시는 자못 넉넉하였습니다. 새는 까치가 없고 짐승은 범이 없으며, 또 닭의 울음이 우리 나라와 달라서 보름 전에는 초경(初更)부터 5경까지 경마다 울고 보름 뒤에는 우리 나라처럼 새벽에 웁니다. 민호(民戶)는 번성하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다 긴 옷을 입고 다들 우리 나라 남자처럼 머리를 묶어 망건(網巾)처럼 건(巾)으로 머리를 싸며, 여인은 머리에 대모(玳瑁) 비녀를 꽂으므로,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음식은 우리 나라와 다를 것이 없는데, 떡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사탕을 섞습니다. 농사는 11월에서 정월 사이에 모를 내고 오뉴월에 수확하며, 소채는 사시사철 자랍니다. 엄동(嚴冬)에도 우리 나라의 구시월만한 날씨에 지나지 않고, 또한 서리와 눈이 없습니다. 성지(城池)는 도성(都城) 밖에 따로 성을 쌓은 곳이 없고, 병기(兵器)는 우리 나라와 다를 것이 없으나 활은 나무를 깎아 대를 붙이고 본디 뿔을 붙이는 일이 없으므로 멀리 쏘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졌던 배가 죄다 부수어져서 바다에서 타기 어려운 형세였습니다. 그 나라는 으레 3년에 한 차례씩 중국에 조공(朝貢)하는데 마침 그 차례가 되었으므로 을미년610) 11월 24일에 그 나라의 사신(使臣)이 데리고 한 배에 같이 타서 병신년611) 윤3월 9일에 복건(福建)에 건너가 닿았습니다. 수로(水路)는 몇 천 리인지 모르겠고, 그 농업을 물었더니 한 해에 두 번 거둔다 하였으며, 집과 의복은 매우 사치하고, 인물이 황도(皇都)와 다를 것이 없으며, 좌우의 시사(市肆)에 진기한 보배가 산처럼 쌓였고, 밤에는 등촉(燈濁)이 낮처럼 밝습니다. 저희들을 접대하는 절차는 관가에서 양찬(糧饌)과 의자(衣資)를 주었습니다. 7월 15일에 복건을 출발하여 세 척의 마상(馬尙)에 나누어 타고 【마상이란 것은 청나라의 작은 배 이름이다.】 강가를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육지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올 10월 23일에 북경(北京)에 닿아서 옥하관(玉河館) 바깥 5리 쯤에 있는 절에 머물렀는데, 날씨가 춥기 때문에 떠나지 못하게 하고 본국의 동지사(冬至使)를 기다려 함께 돌아가게 하기에 저희들이 ‘부모·처자는 우리가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여 밤낮으로 울부짖고 있을 것인데 어찌 차마 잠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였더니, 통관(通官)들이 가엾이 여겨 돌아가도록 허락하고 추위를 막는 행장 도구를 각각 주었는데, 이것은 황제가 내린 것이라 하였습니다. 11월 10일에 황성(皇城)을 떠나 여차(驢車) 2승(乘)에 나누어 타고 12월 2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왔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비국에서 연로(沿路)에 분부하여 말을 주고 음식을 먹여 본토(本土)로 돌려보내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21면
  • 【분류】
    외교-야(野) / 외교-유구(琉球)

○壬辰/全羅道 珍島郡金瑞等九人, 漂海到琉球國, 其國送至淸國, 自淸國移咨出送。 等至京師, 上命備局, 招問漂海事情, 等略書顚末以對。 其言曰:

甲午八月初七日, 爲採進上生鰒, 同船入海, 猝遇狂風, 出沒大洋, 凡十七日, 始得到泊於琉球國界。 有四十餘人來集, 見其飢乏垂死, 饋以小米粥, 以潤飢腸, 仍爲扶入村中, 具飯款待。 新創別館以處之, 編竹爲籬, 使人守直, 衣服、飮食, 隨時備給, 上下男女, 迭相來見, 遺以酒饌。 國俗之醇, 可知。 處其國經年, 稍解方言, 問其王城遠近, 不過十里許, 鍾聲有時隱隱在耳。 其國幅員, 東西四日程, 南北則不及東西。 大抵山高野窄, 田多畓少, 稷麻不産, 桑苧頗饒。 禽無鵲獸無虎, 且雞鳴異於我國, 望前則自初更至五更, 逐更而鳴, 望後則晨唱如我國。 民戶殷富, 而男少女多, 俱着長衣, 皆束髮如我國。 男人以巾裹頭, 如網巾, 女人以頭揷玳瑁簪, 故可以辨別。 飮食與我國無異, 而作餠必雜以沙糖。 農事, 十一月正月移秧, 五六月收穫, 蔬菜四時長靑。 雖嚴冬, 不過如我國九十月, 亦無霜雪。 城池則都城外, 無他築城處, 兵器與我國無異, 而弓子, 削木付竹, 元無付角之事, 不宜遠射。 等欲還本國, 而所持船隻盡破, 勢難駕海。 該國例於三年, 一貢中國。 適當其次, 故乙未十一月二十四日, 該國使臣領率, 同載一船, 丙申閏三月初九日, 渡泊福建, 水路不知幾千里。 問其農業, 則一年再秋, 家舍、衣服極侈, 人物與皇都無異, 左右市肆, 珍寶山積, 夜則燈燭煌煌如晝。 等接待之節, 自官給糧饌、衣資。 七月十五日, 自福建離發, 分乘三隻馬尙, 【馬尙者淸國小船之名。】 沿江溯曳, 過二十日, 始得下陸。 今十月二十三日, 達北京, 留接於玉河館外五里許寺刹, 以日寒之故, 使不得作行, 勸令俟本國冬至使偕還。 等對以父母、妻子, 念我全沒, 晝夜號哭, 豈忍暫時留滯? 通官輩憐而許歸, 各給禦寒之具, 謂是皇帝所賜。 十一月初十日, 離皇城, 以驢車二乘, 分載, 十(一)〔二〕 月初二日渡江而來云。

於是, 備局請分付沿路, 給馬饋食, 還送本土,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66책 58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621면
  • 【분류】
    외교-야(野) / 외교-유구(琉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