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원류》 소유권에 대한 분쟁 내용
계사년103) 여름에 이이명(李頤命)이 우의정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고(故) 부제학(副提學) 유계(兪棨)가 찬집(纂輯)한 《가례원류(家禮源流)》가 있는데, 그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지금 용담 군수(龍潭郡守)로 있으면서 이를 간행(刊行)하여 세상에 내놓으려고 하고 있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재력(財力)을 돕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연에서 한 말은 위에 자세히 보인다.】 대체로 유계는 젊어서부터 오로지 예학(禮學)에 정진(精進)하였는데, 병자년104) ·정축년105) 이후로 금산(錦山)에서 귀양살이하면서 《가례원류》 한 책을 편성(編成)하였다. 이때에 윤선거(尹宣擧)가 유계와 가까이 살면서 또한 참여하여 도운 일이 있었는데, 그 뒤 무술년106) 에 유계가 조정에 나오면서 그 책을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에게 부탁하여 수식(修飾)하고 윤색(潤色)하게 하였으니, 윤증은 바로 유계의 문인(門人)이다. 유계가 죽기에 임박하여 또 윤증에게 편지를 보내어 모두 완성하도록 면려하였는데, 그 뒤에 윤증 부자(父子)가 그대로 그 책을 머물러 두고 돌려주지 않다가, 이이명이 경연에서 아뢴 뒤에야 유상기(兪相基)가 비로소 그 책을 찾아서 간행(刊行)을 하려 하였으나, 윤증이 미루고 핑계대며 돌려주지 않았다. 처음에 대신(大臣)이 경연에서 아뢸 적에는 그 아버지가 함께 일을 한 정상을 언급하지 않은 채 까닭없이 내어 줄 수 없다고 하다가, 끝에 가서 또 말하기를,
"세상에 우리 집 책이라고 전하였는데, 한 책이 두 집에 분속(分屬)된 것이 어찌 의심스럽지 않은가?"
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그 책을 찬집하여 만든 공을 오로지 윤선거에게 귀속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유계가 사망할 무렵에 부탁한 일이 전연 생각나질 않는다."
하니, 유상기가 이 일로 인하여 크게 노하여 서로 오고간 편지 사연이 매우 아름답지 못했다. 유상기가 즉시 유계의 초본(初本)을 간행 출판하고,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권상하(權尙夏)와 정호(鄭澔)에게 청하였다. 권상하가 서문 뒤의 작은 발문에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무상(無狀)한 일을 대단하게 말하였고, 【스승을 배반했다는 것은 바로 유계의 이 일과 송시열을 배반한 일을 가르킨다.】 정호도 발문을 지으면서 또한 극도로 배척하였다. 유상기(兪相基)가 간행한 뒤에, ‘이 책은 이미 계문(啓聞)하고 간행(刊行)한 것이니, 어전(御前)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인하여 짧은 소(疏)를 지어 한 권의 책을 올렸는데, 임금이 그 발문을 보고 정원(政院)에 묻기를,
"윤 판부사(尹判府事)가 바로 유계의 문인인가?"
하니, 승지(承旨)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날 밤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윤 판부사는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아왔고, 내가 평일에 존신(尊信)함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 부제학 정호가 감히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 침범하여 배척하기를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진실로 이미 해괴하게 여길 만하였다. 그런데 그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 발문 가운데에, ‘이 책을 문인인 윤증에게 부탁하여 참호(參互)하여 교감(校勘)해 주기를 요구하였다.’고 서두(序頭)에 말하고, ‘불행하게도 그 적임이 아닌 사람에게 부탁하여, 도리어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속여 스스로 우리 집 책이라고 하면서 전혀 실상(實狀)을 숨기고 있으니, 이는 매우 무위(無謂)107) 한 일이다.’라는 등의 말로 끝을 맺으면서, 낭자하게 마구 꾸짖었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더구나 그 발문을 지은 것이 유현(儒賢)이 이미 죽은 뒤에 있는 일이니, 더욱 놀라 탄식할 만한 일이다. 정호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 것이며, 이 발문을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승지(承旨) 임방(任埅)·황일하(黃一夏)·이교악(李喬岳) 등이 복역(覆逆)108) 하여 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정호가 까닭없이 예대(禮待)했던 대신(大臣)을 침범해 배척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파직하라는 명령을 거두소서."
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무인년109) 이후로 정호가 유현(儒賢)을 침범해 배척하여 물어뜯기를 마지 않더니, 이제 발문 가운데에서 무함하여 꾸짖으며 이르지 않는 바가 없는데, 어찌 유상(儒相)과 같이 어진이가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속이고 스스로 우리 집 책이라고 했을 리 있겠는가. 더구나 《가례원류》를 간행하여 바친 것을 정호도 알았을 터인데, 공공연하게 마구 욕하였으니 방자(放恣)함이 심하다고 할 만하다. 파직(罷職)하라는 명도 이를 그르쳐서 너무 관대한 것인데 급급하게 신구(伸救)하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인가. 한 번 논의가 나뉘어지고부터 시비가 공변되지 못하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4책 5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58면
- 【분류】출판-서책(書冊) / 사상-유학(儒學)
- [註 103]계사년 : 1713 숙종 39년.
- [註 104]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105]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106]
무술년 : 1658 효종 9년.- [註 107]
무위(無謂) : 의의(意義)가 없음.- [註 108]
복역(覆逆) : 임금이 내린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면, 승정원(承政院)에서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다시 이뢰는 것.- [註 109]
무인년 : 1698 숙종 24년.○癸巳夏/ 李頤命爲右議政, 筵白: "故副提學兪棨, 有所纂《家禮源流》, 其孫相基, 方宰龍潭, 欲刊出於世, 宜令本道, 助其財力。" 【筵說詳于上。】 上從之。 蓋棨自少, 專精于禮學, 丙、丁後, 謫居錦山, 編成《源流》一書。 時, 尹宣擧與棨近住, 亦有參助之事。 後戊戌, 棨赴朝, 托其書於宣擧之子拯, 使之修潤。 拯, 卽棨門人也。 棨臨沒, 又貽書拯, 勉其卒成。 其後拯父子, 仍留其書不還, 及頤命筵白後, 相基始索其書, 欲爲入梓, 拯推諉不給。 初以爲大臣筵奏, 不及其父共事之狀, 不可無端出給, 末又曰: "世傳爲吾家書。 一書之分屬兩家, 豈非可疑乎?" 其意蓋欲以其書纂成之功, 專屬之宣擧也。 又言: "棨臨死屬托之事, 全然不記。" 相基因此大怒, 彼此往復, 書辭甚不佳。 相基乃以棨之初本刊出, 請序跋於權尙夏、鄭澔。 尙夏於序後小跋, 盛言拯背師無狀之事, 【背師卽指棨此事及背宋時烈事也。】 澔製跋, 亦極斥之。 相基刊出後, 以爲此書旣登聞入梓, 不可不進御, 仍構短疏, 投進一件, 上覽其跋文, 問於政院曰: "尹判府事, 是兪棨門人耶?" 承旨對以然。 上是夜, 特下備忘曰:
尹判府事負士林之重望, 予之平日尊信如何, 而副提學鄭澔, 敢生慢侮之心, 侵斥非止一再, 固已可駭。 其所撰《家禮源流》跋文中, 乃以托是書於門人尹拯, 要其參互校勘起頭, 而結之以不幸以付托匪其人, 乃反誣人聽聞, 自謂吾書, 而全諱實狀, 此甚無謂等語, 醜詆狼藉, 是誠何心哉? 跋文之撰, 在於儒賢旣沒之後, 尤可駭惋。 鄭澔罷職不敍, 此跋文勿用。
承旨任埅、黃一夏、李喬岳等, 覆逆曰: "此事必有曲折。 鄭澔必不無端侵斥禮待之大臣, 請收回罷職之命。" 上答以戊寅以後, 鄭澔侵斥儒賢, 齮齕不已, 今於跋文中, 誣詆無不至。 豈以儒相之賢, 而乃有誣人聽聞, 自謂吾書之理哉? 況《源流》之刊進, 澔亦知之, 而公肆醜辱, 可謂縱恣之甚矣。 罷職, 失之太寬, 而汲汲申救, 抑獨何哉? 一自論議岐貳, 是非不公, 良可異也。
- 【태백산사고본】 64책 5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58면
- 【분류】출판-서책(書冊) / 사상-유학(儒學)
- [註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