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하들이 김재로가 상소한 뇌물의 폐단과 군문의 일 등에 대해 의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창집이 김재로(金在魯)의 소 가운데 관절(關節)의 폐단에 대하여 복주(覆奏)하기를,
"이제 만약 그 법을 약간 가볍게 해서 다시 범하는 자가 없다면 좋겠지만, 끝내 실질적인 효과가 없고 다만 그 법만 바꾼 결과가 된다면 그대로 두고 따로 신칙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만약 금령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듣는 대로 논핵(論劾)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관절을 일죄(一罪)로 논한 것을 본시 옛날부터 전해오는 법이니, 경솔하게 변경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범한 바에 또한 경중(輕重)이 있는데, 만약 그 일이 관절에 관련된다 하여 모두 일죄로 처단(處斷)한다면, 대간(臺諫)들이 비록 들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차마 발론(發論)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옛법은 고치지 말고 일이 발각 된 뒤 그 경중을 참작하여 일죄에 해당하는 자는 일죄로 처단하고 정범(情犯)이 약간 가벼운 자는 또한 약간 감형(減刑)함이 마땅할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으로 법식을 정함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김창집이 말하기를,
"정관(政官)과 형관(刑官) 및 법부(法府)에서 금란(禁亂)하는데도 모두 사사로운 청촉(請囑)이 있습니다. 정관에게 청촉하는 한 가지 일로써 말하더라도 만약 적절하지 않은 사람을 잘못 천거하면 그 죄가 또한 중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대관(臺官)이 듣는 대로 논계(論啓)할 것이니, 성상께서 참작하여 처치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절의 폐단은 통렬히 금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수교(受敎)는 고치지 말고 대관(臺官)이 듣는 대로 논책하라. 발각된 뒤에 무거운 자는 일죄로 처단하고 가벼운 자는 참작하여 처치함이 옳겠다."
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헌신(憲臣)이 소를 올려 금직(禁直)에서 경출(徑出)하는 사람은 곧장 금추(禁推)를 받도록 청했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군직(軍職)을 띠고 임의로 시골에 내려간 자도 또한 다름이 없으니, 일체 금추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저번에 대계(臺啓)에서 각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는 이서(吏胥)나 시정(市井)의 무리로 차정(差定)하지 말 것을 청하였습니다. 도감(都監)의 지구(知彀)·기패(旗牌) 등 임직(任職)을 으레 항오(行伍)에서 승진시켜 정하고, 도감(都監)의 서리(書吏)로서 연한(年限)이 차고 일을 잘 아는 자는 항오(行伍)의 예에 의하여 승차(陞差)하는데, 이런 무리들은 오래 근무하여 연한이 차면 곧 모두 승천(陞遷)하므로 용잡(冗雜)함이 비길 데 없으니, 이와 같은 자들은 태거(汰去)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권(朴權)이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에서 당초에 인재를 가리지 않고 구차하게 충차(充差)하였다가 개정(開政)에 임하여 과만(瓜滿)이 되면 본병(本兵)에서 예에 따라 승천(陞遷)시키니, 이는 일을 전담(專擔)시켜 오래 근무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군문(軍門)의 장교(將校)를 당초에 신중하게 가리지 않기 때문에 변장(邊將)에 적당한 인재를 많이 얻지 못합니다. 변장을 가리고자 한다면 먼저 장교를 가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지평(持平)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서(吏胥)로서 장교에 오른 자는 비록 일찍이 차정(差定)한 자라도 모두 태거(汰去)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이서로서 일찍이 변장을 지낸 자는 그대로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태거하라."
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현석(李玄錫)이 일찍이 소를 올려 《명사(明史)》를 수찬(修撰)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역(工役)을 마치자마자 죽었습니다. 청컨대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찾아오게 하여 우선 1본(本)을 정사(淨寫)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正言) 이기익(李箕翊)이 앞서 논계(論啓)한 말을 아뢰었는데, 이유민(李裕民)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김창집이 이유민의 명성(名聲)과 치적(治績)을 크게 추겨 말하고, 또 이르기를,
"신이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요동(遼東)에 이르러 호인(好人)의 말을 들었더니, 새로 부임(赴任)한 만윤(灣尹)122) 은 어진이라고 하였습니다. 서곤(西閫)에 발탁(拔擢)해 둔다면 또한 적국(敵國)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창집의 말을 따르고 대계(臺啓)는 윤허하지 않았다. 또 민진후의 진달로 인하여 2품(品) 이상을 치제(致祭)하되, 무관(武官)은 일찍이 곤수(閫帥)를 지낸 자에 한하고 잡직(雜職) 2품은 모두 치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선(嘉善)으로서 수사(水使)가 된 자는 또한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38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출판-서책(書冊)
- [註 122]만윤(灣尹) : 의주 부윤(義州府尹).
○戊戌/引見大臣、備局諸臣。 左議政金昌集覆奏金在魯疏中關節之弊曰: "今若稍輕其法, 而更無冒犯者則善矣, 而終無實效, 而徒變其法, 則不如仍存而別樣申飭之爲愈。 從今以後, 如有犯禁者, 使臺官, 隨聞論劾可矣。" 上然之。 禮曹判書閔鎭厚曰: "關節, 論以一罪, 自是舊法, 固難輕改, 而其中所犯, 亦有輕重。 若徒以事涉關節, 而一幷置之一罪, 則臺諫雖有聞, 不忍發論。 臣意, 舊法則勿改, 而事發之後, 酌其輕重, 當用一罪者, 以一罪斷之, 情犯稍輕, 則亦宜差減, 以此定式可矣。" 昌集曰: "政官、刑官、法府禁亂, 俱有私囑。 以請囑政官一事言之, 若誤薦非人, 則其罪亦重。 如此者, 臺官隨聞論啓, 而自上參酌處之似當矣。" 上曰: "關節之弊, 不可不痛禁, 受敎勿改, 臺官隨聞論劾, 現出後, 重者斷以一罪, 輕者參酌處之可也。" 昌集又曰: "憲臣疏請禁直徑出者, 直捧禁推, 臣意, 帶軍職任意下鄕者, 亦無異同, 一體禁推似好。" 上從之。 昌集曰: "向日臺啓, 以各軍門將校, 勿差吏胥、市井爲請矣。 都監知彀、旗牌等任, 例以行伍陞定, 都監書吏年滿解事者, 亦依行伍例陞差。 此輩久勤限滿, 輒皆陞遷, 故冗雜莫甚, 如此者, 不可不汰去。" 兵曹判書朴權曰: "各軍門初不擇人, 苟然充差, 臨政報瓜, 則本兵循例陞遷。 此由於專用久勤而然矣。" 昌集曰: "軍門將校, 初不愼簡, 故邊將多不得人。 欲擇邊將, 先擇將校。" 上納其言。 持平金在魯曰: "以吏胥陞將校者, 雖曾前見差者, 盡爲刷汰宜矣。" 上命吏胥之曾經邊將者則置之, 其餘一倂汰去。 鎭厚曰: "故判書李玄錫曾上疏, 請修纂《明史》, 纔畢工而身(役)〔歿〕 。 請令玉堂推來, 爲先淨寫一本。" 上從之。 正言李箕翊陳前啓, 至李裕民事, 上問大臣, 昌集盛言裕民聲績, 且曰: "臣之赴燕, 到遼東, 聞胡人言, 以爲新灣尹, 乃賢人云。 擢置西閫, 亦足畏戢乎敵國。" 上從昌集言, 不允臺啓。 又因閔鎭厚所達, 二品以上致祭, 武官則命以曾經閫帥爲限, 而雜職二品, 則幷勿許致祭。 【嘉善爲水使者亦許之。】
-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38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