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김창집 등이 임금 병환의 회복을 축하하는 진연의 일·사원(祠院) 훼철의 일 등을 의논하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우의정(右議政) 김우항(金宇杭)·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된 경사가 있다 하여 진연(進宴)을 청하고 여러 신하들도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도성의 백성들이 ‘이번 진연(進宴)에는 비록 각기 재물을 내어 연수(宴需)를 돕는다 해도 사양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니, 민정(民情)을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지 못해 따르고 연수는 힘써 절약하라고 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명하기를,
"여러 고을의 사원(祠院) 가운데 조정(朝廷)에 품의(稟議)하지 않고 임의로 창립(創立)한 것은 그때의 방백(方伯)·수령(守令) 및 수창(首倡)한 유생(儒生)을 모두 논하여 벌을 주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민진후(閔鎭厚)가 평안도의 이문(移文)을 가지고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조사하여 훼철(毁撤)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신은 혹시라도 시끄러운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우선 그대로 두었습니다. 평안도에는 이미 이문한 것이 있으니,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습니까."
하자, 김창집은 말하기를,
"사람의 수효가 많다 하여 분간(分揀)함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김우항·이이명은 청하기를,
"유지(宥旨)049) 전의 일로써 그 죄를 분간하고, 임의로 세운 사원은 훼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가운데 정주(定州)의 주자 서원(朱子書院)과 평양(平壤)의 홍익한(洪翼漢) 서원은 김창집과 민진후의 말로 인하여 훼철하지 말도록 명하였고, 의주의 강감찬(姜邯贊)과 임경업(林慶業)의 사우(祠宇)도 승지(承旨) 권수(權𢢝)의 진달로 인하여 한결같이 그대로 두게 하였다. 무안(務安) 김권(金權)의 서원에서 임의로 유계(兪棨)를 추향(追享)하였기 때문에 민진후의 진달로 인하여 처음에는 감사(監司)는 추고(推考)하고 수령은 파직하도록 명하였다가, 또 유지(宥旨) 전의 일이라 하여 모두 논하지 말라고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양주(楊州) 유생(儒生)이 예조(禮曹)에 정장(呈狀)하여 향교(鄕校) 가운데 백(白)·숙(叔) 두 정자(程子)의 차서가 바뀌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로 인해 태학(太學)에 물어보았더니, 태학에서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연전에 승출(陞黜)할 때 서무(西廡)에서 척출(斥黜)된 위패(位牌)가 동무(東廡)보다 많아서 차례로 올라갔으므로, 동서(東西)를 아울러 그 차서를 헤아린다면 과연 선후(先後)가 도착(倒錯)되어 일이 매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금년 가을 석채(釋菜)를 기다려 서울과 외방(外方)을 아울러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임술년050) 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말로 인하여 송조 육현(宋朝六賢)051) 을 승무(陞廡)하여 배향(配享)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풍년을 기다려 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일이 지금까지 천연(遷延)된 것은 흉년으로 인한 듯한데, 설령 풍년이 들더라도 어찌 대성전(大成殿)을 개조(改造)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여러 차례 석전제(釋奠祭)에 참여하여 일찍이 보았는데, 십철(十哲)052) 의 위패(位牌)를 모신 교의(校椅)가 자못 컸으니, 지금 만약 그 제도를 조금 줄인다 해도 협착(狹窄)하여 용납하기 어려운 데에 이르지는 않을 듯합니다. 청컨대 본관 당상(本館堂上)으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3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註 049]유지(宥旨) : 임금이 죄인을 특사(特赦)하던 명령.
- [註 050]
임술년 : 1682 숙종 8년.- [註 051]
송조 육현(宋朝六賢) :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명도(明道) 정호(程顥)·이천(伊川) 정이(程頤)·안락(安樂) 소옹(邵雍)·횡거(橫渠) 장재(張載)·회암(晦庵) 주희(朱熹).- [註 052]
십철(十哲) :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열 사람의 학행이 뛰어난 제자.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자로(子路)·자유(子游)·자하(子夏).○左議政金昌集、判府事李頣命、右議政金宇杭、禮曹判書閔鎭厚、戶曹判書趙泰耉, 請對入侍。 以上候平復之慶, 請進宴, 諸臣縷縷陳白, 上始不許。 昌集曰: "輦下之民以爲: ‘今番進宴, 雖使各出財力, 以助宴需, 有不可辭’ 云, 群情大可見矣。" 上勉從之, 令宴需務從省約。 初, 上命諸邑祠院, 不稟朝廷, 而自創立者, 其時方伯、守令、首倡儒生, 竝論罰。 至是閔鎭厚, 以平安道移文, 陳白曰: "諸議以爲宜有査問毁撤之擧, 而臣或慮紛紜, 姑置之矣。 平安道則旣有文移, 何以處之乎?" 昌集曰: "不可以人數之多, 有所分揀。" 宇杭、頣命, 請以宥旨前事, 分揀其罪, 而所擅立祠院則毁去, 上從之。 其中定州 朱子書院、平壤 洪翼漢書院, 則因昌集、鎭厚之言, 命勿毁, 義州 姜邯賛、林慶業祠宇. 亦因承旨權𢢝所達, 使之一體仍存。 務安 金權書院, 則擅爲追享兪棨, 故閔鎭厚陳白, 初命監司推考, 守令罷職矣, 又以宥旨前事, 竝勿論。 鎭厚又言: "楊州儒生呈禮曹, 鄕校中伯叔兩程子, 易其次序爲言, 臣因此問于太學, 太學亦然。 蓋向年陞黜時, 西廡見黜之位, 多於東廡, 次次轉陞, 故竝東西而計其次序, 則果爲倒舛, 事甚未安。 趁今秋釋菜, 京外竝宜釐正。" 又曰: "壬戌因先正臣宋時烈之言, 有宋朝六賢陞配從享之命, 而令待年豐擧行矣。 此事至今遷拖, 似因歲飢, 而設令豐登, 何可改造大成殿乎? 臣屢參釋奠祭, 嘗見十哲位所奉校椅頗大。 今若稍減其制, 似不至狹窄難容。 請令本館堂上, 審察稟處。" 上竝可之。
-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3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註 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