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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6월 9일 기묘 2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년

성주 사람 박수하와 대구 사람 박경여의 산판(山坂)에 대한 분쟁 내용

성주 안핵 어사(星州按覈御史) 홍치중(洪致中)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처음에 성주 사람 박수하(朴壽河)가 대구(大邱) 사람인 청안 현감(淸安縣監) 박경여(朴慶餘)와 더불어 산판(山坂)을 다투었는데, 박경여가 승소(勝訴)하여 묘소로 쓰게 되었다, 몇 년 뒤 박경여의 집에서 묘도(墓道)를 닦으려 하자 박수하가 금지하고 막으니, 박경여가 소장(訴狀)을 올려 영문(營門)에 호소하였다. 감사(監司) 이의현(李宜顯)이 본주(本州)로 하여금 사핵(査覈)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박수하가 공사(供辭)에다 이의현을 배척하여 박경여와 인척(姻戚)이 되므로 박경여를 두둔한다고 하였다. 대개 박경여는 곧 이의현의 족숙(族叔) 이세최(李世最)의 자부(姊夫)가 되기는 하지만, 윤휴(尹鑴)허목(許穆)의 여당(餘黨)이므로, 원래 이의현이 두둔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빙자해 말한 것은 이의현을 협박하여 송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이의현이 법에 의거하여 박수하를 형문(刑問)하였는데, 한 차례 형문에 죽어버렸다. 그러자 박수하의 일가 친척이 드디어 역군(役軍)을 동원하여 박경여의 아비의 묘에 가서 관(棺)을 파내어 시체를 베고 불살랐다. 또 박경여의 집안에서 금지할 것을 두려워하여 박수하의 딸 문랑(文娘)으로 하여금 함께 가도록 했다. 박경여는 이때 청안현(淸安縣) 임소(任所)에 있었는데, 그 친족과 노복(奴僕)들도 또한 몽둥이와 칼을 들고 산에 올라가 서로 싸웠다. 그러다가 박경여의 친족 박취휘(朴就徽)가 또한 피살(被殺)되었으나 시체를 감추고 내놓지 않자, 박경여의 집안과 박취휘의 아들이 모두 정장(呈狀)하여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국법(國法)에 묘를 파고 사람을 죽인 자는 모두 사죄(死罪)에 해당하므로, 박수하의 친족들은 장차 사형(死刑)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드디어 문랑(文娘)으로 하여금 자문(自刎)하게 하고 선언(宣言)하기를, ‘박경여의 친족들이 죽여서 그 원한을 갚았다. 그리고 박취휘는 거짓 죽은 것처럼 억지로 일컬었으니, 그 아들이 박경여의 꾐에 받아 그 아비가 피살되었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朝廷)에서 어사 정찬선(鄭纘先)을 보내어 추핵(推覈)하도록 하였는데, 정찬선이 1년을 머무르면서도 끝내 옥정(獄情)을 캐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영남(嶺南) 사람 김이달(金履達) 등이 타도(他道)의 불량한 무리들을 이끌고 문랑(文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상소하여 그 효성(孝誠)을 극구 칭송하고 박경여의 죄상을 크게 논박(論駁)하였다. 그리고는 이의현을 마구 헐뜯었으니, 대개 남의 사주(使嗾)를 받아 이의현을 구함(構陷)하려 한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사부(士夫)들도 간혹 문랑을 위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칭송했으며, 심지어 박취휘는 거짓으로 죽은 것인데, 그 아들이 박경여의 꾐을 받아 거짓으로 상복(喪服)을 입은 것이라고 하였다. 홍치중은 어사가 되자, 이 옥사(獄事)의 요체는 박취휘의 시체를 찾는 한 가지 일에 있다고 생각하여 온갖 방도로 염탐한 끝에 몇 달 만에 과연 그 시체를 찾았는데, 박취휘박녀(朴女)의 친족에게 피살된 것이 명백하였고, 시체는 손상되고 썩어 그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이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분분했던 의논이 점차 진정되었다. 문랑이 죽은 것은 목 밑의 칼날 흔적이 《무원록(無寃錄)》의 자문(自刎)의 조문(條文)과 부합되므로, 여러 의논이 점차 문랑이 자결(自決)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나, 그래도 엄체(淹滯)된 죄수들에 대해서는 판결이 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30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재판(裁判) / 풍속-예속(禮俗) / 가족-가산(家産)

星州按覈御史洪致中竣事還。 初, 星州朴壽河, 與大丘淸安縣監朴慶餘, 爭山, 慶餘得勝而用之。 後數年, 慶餘家欲修治墓道, 壽河禁遏之, 慶餘擧狀訴營門。 監司李宜顯, 令本州覈處, 壽河供辭, 斥宜顯慶餘爲姻親, 故右慶餘。 蓋慶餘, 卽宜顯族叔世最姊夫, 而乃是餘黨, 本非宜顯所可右, 而駕此爲言者, 欲脅持宜顯, 使不得治之也。 宜顯據法刑壽河, 一次而斃。 壽河一家族屬, 遂發軍, 詣慶餘父墳, 發棺戮尸而焚之。 又恐慶餘家禁截, 使壽河文娘同往。 慶餘時在淸安任所, 其親黨、奴僕, 亦持梃刃上山相戰。 慶餘之族人就徽, 亦被殺而匿其尸, 慶餘家及就徽子, 俱呈狀請治。 國法, 發塚殺人, 俱係死罪, 壽河之族, 將不得免死, 遂令文娘自刎, 宣言: "慶餘之族殺之以相當。 就徽則勒謂之佯死, 而其子被慶餘誘, 指其父爲殺死。" 朝廷遣御史鄭纉先推覈, 纉先居一歲, 終未鉤得獄情而還。 嶺南人金履達等, 倡率他道不逞之徒, 名爲文娘上疏, 極稱其孝, 盛論慶餘罪狀, 因肆口誣辱宜顯。 蓋受指於人, 欲構陷宜顯也。 洛下士夫, 亦或爲文娘扼腕稱道, 至以就徽爲佯死, 而其子爲慶餘所誘, 假着喪服云。 及致中爲御史, 以爲此獄肯綮, 在推得就徽尸一款, 百般機探, 數月果得其尸。 就徽朴女黨所殺明白, 尸體摧朽腐傷, 慘不忍見。 至是, 諸議稍定, 而文娘殺死, 以喉下刃痕, 合於《無冤錄》自刎條, 諸議漸以文娘爲自死, 而猶滯囚不決。


  • 【태백산사고본】 63책 5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30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재판(裁判) / 풍속-예속(禮俗) / 가족-가산(家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