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 이진망이 상소를 올려 조부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김진규가 이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리다
지평(持平) 이진망(李眞望)이 상소하여 그의 할아버지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을 위해 홍계적(洪啓迪)·김진규(金鎭圭)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였다. 대개 이경석이 삼전도(三田渡)의 송로 문자(頌虜文字)473) 때문에 송시열(宋時烈)의 기척(譏斥)을 받았으므로, 박세당(朴世堂)이 일찍이 이경석의 묘문(廟文)을 지으면서 송시열을 헐뜯었었다. 계미년474) 무렵에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계적 등이 송시열을 위해 신변(伸辨)하고 박세당을 대단히 공척하면서 인하여 이경석의 일에 미치게 되었는데, 그때 김진규는 대사성(大司成)으로 역시 소론(疏論)하였던 것이다. 이진망이 이로써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첫머리에 말하기를,
"올봄에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신장(宸章)을 내리셔서 신의 할아버지를 포륭(褒隆)하여 귀신이 알게 하시고 옛날의 현철(賢哲)한 보필에 견주시니, 백 번이나 엄숙하게 외면서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부득이 문자(文字)를 지어서 바친 일을 상세히 진달하기를,
"신의 할아버지가 지은 글 가운데 첫머리에 내세운, ‘바람에 추택(秋籜)475) 이 날리고, 화로불에 기러기털을 태우듯 쉬웠다.’는 등의 귀절은 다 부견(苻堅)476) 이 진(晋)나라를 침략할 때 스스로 과장(誇張)하던 말입니다. 오로지 이 몇 귀절에 가탁(假託)한 뜻이 매우 은미하니, 참으로 충신(忠臣)·의사(義士)가 있다면 마땅히 시상(時象)을 묵상(默想)하여 그 심사(心事)를 헤아려 알 수가 있을 것인데, 이에 이미 지나간 자취를 주워모아 망극한 말을 얽어서 조금도 돌아보아 생각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심사(心事)입니까."
하고, 또 성언(盛言)하기를,
"김진규는 음려(陰戾) 비특(奰慝)하고 당(黨)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데에 용감하며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려고 했으니, 이것이 그 일생의 기량(伎倆)입니다. ‘하간(河間)477) ’이란 한 귀절은 【바로 김진규의 소 가운데 있는 말이다.】 더럽고 비패(鄙悖)하며, 더욱 이것은 서적(書籍)에서는 듣지 못한 것이니, 천지 사이에 이처럼 패악(悖惡)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끝에서 말하기를,
"지난번 전지(銓地)에서 신의 통색(通塞)478) 을 인연하여 소란스런 단서가 크게 일어나 풍랑이 점차 격심해졌으나, 어찌 전에 지색(枳塞)당한 적이 있는데, 후에 무릅쓰고 나아가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 고(故) 상신(相臣)은 석덕(碩德)·숙망(宿望)으로 세 조정을 두루 섬겼다. 평일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함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데, 홍계적 등이 마음대로 마구 욕했으니, 어찌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연중(筵中)에서 개탄했고 또 시(詩)로 읊었던 것이다. 그대가 할아버지를 위해 원통함을 호소한 소를 보고 지색(枳塞)할 계책을 삼고자 하나, 내가 진실로 옳지 않게 여기며, 영선(嬴選)의 망(望)이 또 이에 걸려 지색을 당하니 너무 심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다. 이 뒤에 김진규가 대변(對辨)하는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때에는 사세(事勢)에 몰렸기는 하지만, 또한 어찌 말을 잘 만들 수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비유를 든 것이 차례를 잃어 대의(大義)에 해를 끼쳤습니다. 이는 저절로 천경 지위(天經地緯)479) 에 관계되는데, 도리어 선정(先正)의 기폄(譏貶)에 노하여 이미 묘문(墓文)에 고하여 무훼(誣毁)하였고, 또 소장(疏章)에 드러내어 그릇되게 욕하여 자의(疵議)가 그의 조부에게 미치도록 했으니, 이것은 누구의 허물입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계미년480) 겨울에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하교하시기를, ‘이경석의 삼전도(三田渡) 비문은 등본(謄本)을 가져다 보니, 왕명에 의해 지어서 바친 것은 비록 부득이하였다 하나, 크게 포양(褒揚)을 더하였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는가. 송시열이 비난해 배척한 것이 옳은데, 이하성(李厦成)의 【바로 이진망(李眞望)의 숙부(叔父)이다.】 상소는 【계미년에 이진망과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다.】 더욱 무상(無狀)하다.’ 하셨다는데, 뜻밖에도 이진망이 감히 그의 조부를 순수하여 허물이 없는 자리에 두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런 의리는 성명(聖明)께서 비록 이미 위에서 밝혔으나, 이런 논의가 아래에서 일어나 회매(晦昧)하고 소멸(消滅)하는 데 점점 이르게 되니, 어찌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진망의 상소에 무슨 노할 만한 것이 있기에 대단한 기세로 이처럼 장황한가. 자신이 척리(戚里)가 되어 조심할 생각은 않고 논의하는 데에 조급하고 분주한 바가 경 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마음속으로 늘 근심하고 탄식하고 있었는데, 어찌 다만 이를 근심할 뿐이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54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1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윤리(倫理) / 외교-야(野)
- [註 473]송로 문자(頌虜文字) :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말함. 병자 호란 때 청 태종이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고, 삼전도에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하여 세우게 한 비. 비문을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는데, 표면 왼쪽은 몽고문(蒙古文), 오른쪽은 만주문(滿洲文), 후면은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음.
- [註 474]
계미년 : 1703 숙종 29년.- [註 475]
추택(秋籜) : 가을날의 대나무 껍질.- [註 476]
부견(苻堅) : 전진(前秦)의 군주.- [註 477]
하간(河間) : 유자후(柳子厚)의 하간전(河間傳)에서 인용한 말임.- [註 478]
○辛巳/持平李眞望上疏, 爲其祖故相臣景奭, 辨洪啓迪、金鎭圭之疏。 蓋景奭以三田渡頌虜文字, 被宋時烈譏斥, 故朴世堂嘗撰景奭墓文, 詆辱時烈。 癸未年間, 館學儒生洪啓迪等, 爲時烈伸辨, 盛斥世堂, 仍及景奭事, 其時鎭圭以大司成, 亦疏論之。 眞望以此訟冤, 首言:
今春我聖上, 特隕宸章, 褒隆臣祖, 許以鬼神之知, 而比方於古昔喆輔, 莊誦百遍, 咽不成聲。
仍縷陳其不得已撰進文字之事, 以爲:
臣祖所撰中, 首揭風捲秋籜, 爐燎鴻毛等句, 俱用符堅寇晋時自夸之語。 惟此數句, 寓旨深微, 苟有忠臣、義士, 固當默想時象, 揣知心事, 而顧乃捃摭旣往之迹, 構成罔極之語, 略不顧慮者, 又何心哉?
又盛言:
鎭圭陰戾奰慝, 勇於死黨, 必欲凌人駕物, 此其一生伎倆也。 河間一句, 【卽鎭圭疏中語。】 醜穢鄙悖, 尤是載籍所未聞者, 天壤之間, 乃有如此悖惡之人耶?
末言:
向來銓地, 緣臣通塞, 鬧端大起, 風浪轉激。 安有見枳於前, 而冒進於後哉?
答曰: "噫! 故相臣以碩德、宿望, 歷事三朝。 平日愛君憂國, 出於至誠, 可質神明, 則洪啓迪等之恣意醜辱, 豈非可駭之甚乎? 予所以慨歎於筵中, 而又發於吟詠者也。 觀爾爲祖鳴冤之疏, 欲爲枳塞之計, 予固已不是, 瀛望之選, 又坐此見塞, 可謂己甚也。" 是後, 金鎭圭上對辨疏。 略曰:
其時迫於事勢, 然亦豈無可以善爲辭者, 而引喩失倫, 有害大義。 自是關係於天經地緯, 而反怒先正之譏貶, 旣謁墓文而誣毁之, 又露疏章而謬辱之, 轉致疵議之及於其祖, 是誰之咎歟? 臣伏聞聖上癸未冬, 臨筵下敎, 以李景奭 三田渡碑文, 取見謄本, 應命製進, 雖不得已, 大加褒揚, 豈非未安乎? 宋時烈非斥宜矣。 厦成 【卽眞望之叔父也。】 之疏, 【癸未與眞望聯名上疏。】 尤爲無狀云, 不意眞望, 敢以其祖, 置之粹然無過之地。 竊恐此義, 聖明雖已明之於上, 而此等論議, 汨汨於下, 馴致於晦昧消滅, 豈不大可憂哉?
答以李眞望之疏, 有何可怒, 而盛氣張皇至此耶? 身爲戚里, 不思小心, 汲汲奔走於論議, 未有如卿者, 心常憂歎。 豈特病之而已?
- 【태백산사고본】 62책 54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51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윤리(倫理) / 외교-야(野)
- [註 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