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신하들이 각지의 재해 대책에 대해 의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김우항(金宇杭)이 풍재(風災) 때문에 진계(陳戒)하고, 청하기를,
"낭비를 줄이고 영선(營繕)을 정파(停罷)하여 오로지 백성의 일에 마음쓰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김우항이 말하기를,
"진연(進宴)은 우선 가을 농사를 보아 해야 할 일이라고 일찍이 하교(下敎)하셨는데, 흉년이 이 지경에 이르니 다시 청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지하기를 명하였다. 김우항이 말하기를,
"충청 감사 송정명(宋正明)이 수전(水田)은 7분(七分)을 한정해서 급재(給災)454) 하고, 산도전(山稻田)455) 은 경오년456) 과 무자년457) 의 예에 의하여 일체 급재(給災)할 것이며, 추노(推奴)와 징채(徵債), 전민(田民)의 사송(詞訟), 군병 세초(軍兵歲抄)·교생(校生)의 고강(考講)은 일체 정파하는 일로써 장문(狀聞)하였습니다. 수전(水田)으로 바닷가의 더욱 심한 곳은 마땅히 참작하여 분재(分災)458) 를 주어야 하나, 산도전(山稻田)은 진실로 급재(給災)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밖에는 모두 시행하도록 허락할 만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신해년459) 같은 흉년에도 세초(歲抄)를 일찍이 정지하지 않은 것은 대개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니, 이를 요개(撓改)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더욱 심한 고을은 분재(分災)를 주되 산도전은 급재를 허락하지 않으며, 추노 징채(推奴徵債)은 모두 장계에 의해 시행하게 하고, 더욱 심한 고을은 세초(歲抄)도 또한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김우항의 경상 감사 이탄(李坦)의 장계로써 이뢰기를,
"‘각도의 적곡(糴穀)은 경진년460) 조(條) 이상은 탕감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본도는 원래 임오년461) 이전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없고, 을유년462) ·병술년463) 이 가장 오래 된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만약 근년의 것이라 하여 탕감을 허락하지 않으면, 균등하게 혜택을 주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였으니, 일체로 견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민진후는 단지 을유년 것만 감해야 한다 하고, 조태구(趙泰耉)는 일체 탕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한결같이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김우항이 또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연(金演)의 장계로써 계청(啓請)하기를,
"우수참(右水站)의 수부(水夫)로서 혁파된 자들을 본부(本府)에 추이(推移)하여 대급(代給)하소서."
하니, 민진후는 말하기를,
"수부를 혁파한 후에 각 고을에서 그 출급(出給)을 바라고 있는데 송도(松都)에 전속시키면 반드시 실망할 것이니, 앞으로 형세를 보아가며 환정(換定)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장녕전(長寧殿)의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할 때에 감사(監司)는 수로(水路)가 편리하다 하고 유수(留守)는 육로(陸路)를 주장하였습니다. 수로로 받들고 가는 것은 본래 폐단을 없애려 한 것인데, 바닷길은 위험하니, 끝내는 육로의 편안한 것만 못합니다."
하고, 김우항도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기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면서 절목(節目)을 십분 간략하게 하기를 명하였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외방(外方)의 사우(祠宇)를 진청(陳請)하지 않고 창건한 경우, 감사와 지방관은 논죄하고 유생(儒生)은 정거(停擧)하는데, 논죄는 일정한 율(律)이 없고 정거는 연한이 없으니, 마땅히 정식(定式)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유생은 3년을 한하여 정거하고, 논죄하는 한 조항은 김우항에게 물으라."
하였다. 김우항이 처음에는 고신(告身)을 빼앗는 것으로 정하려 하였다가 다시 민진후의 말로 인하여 감사는 추고(推考)하고 수령은 파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환(小宦)에게 명하여 작은 궤자(櫃子) 하나를 가져오게 해 민진후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명릉(明陵)464) 과 익릉(翼陵)465) 사이에 한 언덕이 있는데, 후일의 땅이 될 만하기에 한 소지(小紙)에 친히 써서 봉해 두었으니, 예관(禮官)은 마땅히 알도록 하라."
하였는데, 민진후가 자물쇠를 열고 보니 상자 속에 소지(小紙)가 있어 쓰이기를,
"명릉·익릉 사이에 간좌 곤향(艮坐坤向)의 언덕이 있다. 후일 내상(內喪)이 있게 되면 이 언덕을 쓰되 서로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으니, 명릉 정각(丁閣) 안에다 연달아 3상(床)을 설치해 목릉(穆陵)466) 의 제도처럼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모두 보게 하고, 본 후에 그대로 자물쇠를 봉하여 내시에게 주었다.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오관 사력(五官司曆)이 나왔을 때에 허원(許遠)이 의기(儀器)와 산법(算法)을 배웠는데, 그대로 의주에 따라가서 그 기술을 다 배우게 하였습니다. 의기(儀器)의 쓰임에는 의상지(儀象志)와 황적(黃赤)·정구(正球) 등의 책이 있으니, 산서(算書) 및 이들 책을 인포(印布)하게 하고, 의기(儀器)도 또한 만들게 하였는데, 사력(司曆)이 또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 없는 서책(書冊)과 기계(器械)는 마땅히 돌아가 아뢰어 찾아 주겠다.’라고 하였으니, 훗날 사행(使行)에 허원(許遠)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헌납(獻納) 이택(李澤)이 다시 유혁연(柳赫然)·이원정(李元禎)의 복관(復官)을 환수하라는 논계(論啓)를 내었는데, 대략 말하기를,
"어제 연중(筵中)에서 추안(推案)을 고출(考出)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대각(臺閣)에서 우선 정지하고 기다린 것은 대개 반한(反汗)467) 이 마땅히 상고하여 아뢸 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이에 복주(覆奏)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전의 명을 거듭하니, 징토(懲討)를 엄중히 하고 제방(堤防)을 근신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2책 5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1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구휼(救恤) / 농업-농작(農作) / 재정-전세(田稅) / 교통-수운(水運) / 풍속-예속(禮俗) / 사법-탄핵(彈劾) / 과학-천기(天氣) / 과학-역법(曆法)
- [註 454]급재(給災) : 재해(災害)를 입은 전지(田地)에 전세(田稅)를 면제하여 주된 것.
- [註 455]
산도전(山稻田) : 밭벼를 심은 밭.- [註 456]
경오년 : 1690 숙종 16년.- [註 457]
무자년 : 1708 숙종 34년.- [註 458]
분재(分災) : 《경국대전》 호전 수세조에 보면, 반이 넘게 재상을 입은 전지 가운데 그 재상이 ‘6분에 이른 것은 6분을 면제하고 4분을 수세(收稅)하되, 9분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이 한다.’ 하였음. 곧 6분에서 9분까지 재상을 입어 감세(減稅)받게 된 재상전을 말함.- [註 459]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460]
경진년 : 1700 숙종 26년.- [註 461]
임오년 : 1702년 숙종 28년.- [註 462]
을유년 : 1705년 숙종 31년.- [註 463]
병술년 : 1706년 숙종 32년.- [註 464]
명릉(明陵) :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능.- [註 465]
○乙亥/引見大臣、備局諸臣。 右議政金宇杭以風災陳戒, 請節損浮費, 停罷營繕, 專意民事, 上嘉納。 宇杭曰: "進宴姑觀秋事爲之事, 曾有下敎, 而歉荒至此, 不暇更請。" 上命停止。 宇杭曰: "忠淸監司宋正明, 以水田則限七分給災, 山稻田依庚午、戊子例, 一體給災, 推奴、徵債、田民詞訟, 軍兵歲抄、校生考講, 一切停罷事, 狀聞矣。 水田則沿海尤甚處, 當參酌給分災, 而山稻田則固難許災。 此外竝可許施矣。" 禮曹判書閔鎭厚曰: "如辛亥之凶歲, 歲抄未嘗停止, 蓋有其意, 此不當撓改。" 上命尤甚邑則給分災, 山稻田不爲許災, 而推奴、徵債, 竝令依狀啓許施, 尤甚邑歲抄, 亦令停止。 宇杭又以慶尙監司李坦狀啓奏曰: "各道糴穀, 有庚辰條以上蕩減之命, 而本道則元無壬午以前未捧, 乙酉、丙戌爲最久。 未捧若以年近不許蕩減, 則有乖均惠之意云, 一體蠲減, 似宜。" 閔鎭厚以只減乙酉爲可, 趙泰耉則請一體蕩減, 上命一倂蠲減。 宇杭又以開城留守金演狀啓, 白請右水站水夫革罷者, 使之推移代給於本府, 鎭厚以爲: "水夫革罷後, 各邑皆望其出給。 專屬松都, 必多落莫, 前頭觀勢換定可矣。" 上從之。 鎭厚曰: "長寧殿御眞奉安時, 監司則以水路爲便, 留守則主陸路。 水路奉往, 本欲除弊, 而涉海乃危途, 終不如陸路之爲安便。" 宇杭亦是其言, 上從之, 命節目十分從簡。 鎭厚曰: "外方祠宇, 不爲陳請, 而創建者, 監司、地方官論罪, 儒生停擧, 而論罪無定律, 停擧無限年, 宜有定式。" 上命儒生則限三年停擧, 而論罪一款, 則問之宇杭。 宇杭初欲以奪告身爲定, 更因鎭厚言, 以監司推考, 守令罷職爲當, 上從之。 上命小宦, 取一小櫃子, 以授鎭厚曰: "明、翼兩陵之間, 有一崗, 可爲後日地。 親書一小紙封置, 禮官宜知之。" 鎭厚開鑰而見之, 中有一小紙, 書曰:
明 翼兩陵之間, 有艮坐坤向之岡。 後日內喪, 定用此岡, 而相趾不甚遠, 明陵丁閣內連設三床, 如穆陵制。
上命入侍諸臣, 皆覽之, 覽後, 因爲封鎖, 傳于內侍。 泰耉曰: "五官司曆出來時, 許遠學得儀器、算法, 仍令隨往義州, 盡學其術矣。 儀器之用, 有《儀象志》、《黃赤》、《正球》等冊。 算書及此等冊, 使之印布, 儀器亦令造成, 而司曆又言: ‘爾國所無書冊、器械, 當歸奏覓給。’ 云, 日後使行, 許遠使之隨往好矣。" 上允之。 獻納李澤更發柳赫然、李元楨復官還收之啓, 略曰: "頃日筵中, 有推案考出之命, 臺閣之姑停以待, 蓋謂反汗當在考啓之時。 今乃不待覆奏, 更申前命, 有乖嚴懲討謹堤防之道。" 上答以勿煩。
- 【태백산사고본】 62책 5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511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구휼(救恤) / 농업-농작(農作) / 재정-전세(田稅) / 교통-수운(水運) / 풍속-예속(禮俗) / 사법-탄핵(彈劾) / 과학-천기(天氣) / 과학-역법(曆法)
- [註 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