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교리 홍치중이 북로(北路)의 폐막과 백두산의 정황에 대해 진달하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부교리(副校理) 이교악(李喬岳)이 문의(文義)059) 로 인하여 인주(人主)의 자용(自用)060) 하는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부교리 홍치중(洪致中)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북로(北路)의 폐막(弊瘼)을 진달하기를,
"의논하는 자가 간혹 말하기를, ‘남도(南道)·북도(北道)에 각각 감사(監司)를 둔것에 대해서 비록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나, 북병사(北兵使)와 육진(六鎭)의 수령(守令)은 이따금 문신(文臣)으로 차송(差送)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다고 여겨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토록 명하였다. 임금이 이내 홍치중(洪致中)에게 북관(北關)의 일을 상세히 말하도록 명하니, 홍치중이 말하기를,
"북로(北路)는 전세(田稅)와 대동(大同)의 법규061) 가 없으니, 공상(供上)062) 이외에는 따로 면제해 줄 만한 부역이 없고, 군역(軍役)을 충당하기 어려움은 삼남(三南)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 풍속이 사납고 고집이 세어 한 번 그 마음을 결정하면 변경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잘 어루만져 달래어 그들의 환심(懽心)을 얻는다면 후일 나라가 위급할 경우에 반드시 나라를 저버리는 우환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장기(長技)가 마치 흉노(凶奴)와 같으니, 만일 용병(用兵)을 하고자 한다면 이들을 버리고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그 민심(民心)을 굳게 결속시켜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학(文學)이 있는 사자(士子)가 점차로 많아지니,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하고, 이내 이재형(李載亨)·윤민건(尹敏建)·한세양(韓世讓)·채진원(蔡振遠) 등 네 사람을 추천하여 특별히 수록(收錄)해서 북인(北人)을 용동(聳動)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이재형 등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녹용(錄用)토록 하였다. 또 백두산(白頭山)의 형편(形便)을 진달하여 말하기를,
"무산(茂山) 70리(里)로부터 임강대(臨江臺)에 이르기까지 또 10리가 되는데, 어활강(魚濶江)을 건너서 산밑에 이르니 땅은 광막(廣漠)063) 하나 인가(人家)는 없었고, 험한 길을 구불구불 올라가서 정상(頂上)에 오르고 보니 산이 아니고 바로 평야(平野)였습니다. 백두산과 어활강의 중간에 삼나무가 하늘을 가리어 하늘의 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이 거의 3백 리(里)에 달했고, 거기서 5리(里)를 더 가니 비로소 비석(碑石)을 세운 곳에 당도했습니다. 비석은 매우 길이가 짧고 폭이 좁았으며, 두께는 몇 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쪼아서 갈아 놓은 것이 정밀하지 못했고 세운 것도 견고하지 않았습니다. 목차(穆差)064) 가 귀(貴)한 행신(幸臣)으로서 명령을 만들어 정계(定界)하였는데, 허술함이 이 지경에 이르니, 그가 공력(功力)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석을 세운 곳에서 바라보니 우뚝하게 치솟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나무를 부여잡고 올라가 보니 14 봉우리가 빙 둘러서서 서로 껴안고 있어 하나의 동부(洞府)065) 을 형성하였고, 거기에 큰 못이 있는데 빛깔이 아주 검푸른 빛을 띠어 몇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여지(輿誌)》 중에는 못의 주위가 80리라고 칭하였는데, 신이 보기에도 40여 리 쯤은 되어 보였습니다. 산 전체가 모두 사석(沙石)이므로 풀이나 나무는 생장하지 않으며, 쌓인 눈이 사철 녹지 않으므로 백두(白頭)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연유된 듯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83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관방(關防) / 재정-전세(田稅) / 재정-진상(進上) / 인사-선발(選拔) / 외교-야(野)
- [註 059]문의(文義) : 경전(經典)의 글뜻을 말함.
- [註 060]
자용(自用) : 남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대로 함.- [註 061]
대동(大同)의 법규 : 조선조 중엽에 각 지방에서 바치던 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내게 하던 조세법.- [註 062]
공상(供上) : 조선조 때 그 지방의 토산물(土産物)을 상급 관청이나 고관(高官)에게 바치던 것. 진공(進供).- [註 063]
○庚子/召對玉堂官。 副校理李喬岳因文義, 陳人主自用之弊, 上嘉納之。 副校理洪致中因文義, 陳北路弊瘼曰: "議者或云: ‘南、北道各置監司。’ 此雖不可輕議, 而北兵使及六鎭守令, 間以文臣差送爲好。" 上然其言, 命廟堂稟處。 上仍命致中, 詳言北關事, 致中曰: "北路無田稅、大同之規, 供上外, 別無可蠲之役, 而軍役難充, 無異三南。 且其俗悍頑, 一定其心, 不肯變改。 善加撫恤, 得其懽心, 則他日緩急, 必無負國之患, 而其長技與凶奴同, 如欲用兵, 捨此輩莫可。 今宜固結其民心。" 又曰: "士子之有文學者(寢)〔寖〕 盛, 誠可貴也。" 仍薦李載亨、尹敏建、韓世讓、蔡振遠等四人, 請別爲收錄, 聳動北人, 上然之, 載亨等令該曹錄用。 又陳白頭山形便曰: "自茂山七十里, 至臨江臺又十里, 渡漁濶江, 到山下地, 廣漠無人烟, 路險百折而上, 及其登覽, 則非山而卽野也。 白山、漁江之間, 杉樹蔽天, 不分天日者, 殆三百里, 行五里始到立碑處。 碑甚短狹, 厚不過數寸。 琢磨不精, 豎之亦不牢。 穆差以貴幸臣, 奉命定界, 而虛踈至此, 其無致力之意, 可知矣。 自立碑處望見, 有斗絶最高峰, 攀附而上, 十四峰羅立拱抱, 成一洞府, 有大澤色深黝, 不知其幾丈。 《輿誌》中稱以八十里周廻, 而以臣所見, 亦當爲四十餘里。 山體皆沙石, 而草樹不生, 積雪四時不消, 白頭之名, 似以此也。"
- 【태백산사고본】 61책 5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83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관방(關防) / 재정-전세(田稅) / 재정-진상(進上) / 인사-선발(選拔) / 외교-야(野)
- [註 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