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 52권, 숙종 38년 10월 26일 병자 1번째기사 1712년 청 강희(康熙) 51년

도제조 이이명이 괴원에서 발견한 선조 때의 자문에 대해 논하다

전일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했을 때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괴원(槐院)의 문서 속에서 인적(印迹) 하나를 발견했는데, ‘우자 경략 아문(右咨經略衙門)’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또 큰 인적(印迹)이 있고 선조(宣祖)의 어압(御押)도 있었으므로 신(臣)이 놀라 완미(玩味)하고 장정(粧幀)하여 그대로 진장(珍藏)하고 있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봉진(奉進)해야 한다고 합니다. 청컨대 대내(大內)로 들여다가 황조(皇朝)에서 내린 망룡의(蟒龍衣)461) 와 함께 간직해 두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이명이 봉진(封進)하되, 수서(手書)한 짧은 차자에 강희(康熙) 연호(年號)를 없애고 그대로 금중(禁中)에 둘 것을 청하였다. 그차자에 이르기를,

"신이 전일 입진(入診)했을 때 신(臣)이 발견한 자문(咨文)의 고지(故紙)에 국보(國寶)와 어압(御押)462) 이 있어 감히 사실(私室)에 오래 갈무리해 둘 수 없음을 우러러 진달하니, 신으로 하여금 진정(進呈)하라는 성지(聖旨)를 삼가 받들도록 하였기에 신의 마음에 감탄이 북받침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삼가 이 차자(箚子)와 함께 올리는 바입니다.

이 자문(咨文)은 괴원(槐院)의 고문서(故文書)의 책 표지 속에서 구득한 것인데, 그 글은 모두 없어졌지만 아문(衙文)과 연월일은 아직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경략(經略)은 곧 송응창(宋應昌)이고, 만력(萬曆) 21년은 우리 선조(宣祖)계사년463) 입니다. 월일(月日)의 곁에 세서(細書)로 군무(軍務)라는 글자가 있으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그때 군무와 적정(賊情)으로 오가는 문서가 한창이었기에, 혹은 일이 시기가 지나버려 자문을 만들어 놓고도 보내지 못했던 것이며, 서리(胥吏)들이 조심해서 하지 않아 잘라서 책 표지를 하게 된 것인가 합니다. 일찍이 듣건대, 병자년464) 의 난리 때에 괴원의 노리(老吏)가 괴원 마당 큰 나무의 빈 구멍 속에다 문서를 감추었다고 하였으니, 이 자문 또한 그 속에 있었던 것인 듯합니다. 천지(天地)가 뒤집히는 변을 치르면서 보존되어 먼저 투성이의 고지(故紙) 속에 묻혀 있었으나, 오히려 흔적도 없이 마멸(摩滅)되지 않고 육십 갑자(六十甲子)가 두 차례나 지난 때 비로소 나타나 보장(寶章)과 어업(御押)의 주색(朱色)과 먹 빛깔이 새것과 같으니, 이는 참 기이한 일입니다. 신주(神州)465)육침(陸沈)466) 되었으나 국치(國恥)를 씻지 못하여 황조(皇朝)의 옛물건이 하나도 보존된 것이 없는데, 동정(東征) 때의 유적(遺跡)을 백 년이 지난 뒤 보게 되었으니, 어찌 깊이 슬퍼하여 보물로 아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우리 목릉(穆陵)467) 의 신필(宸筆)은 천고(千古)에 절묘(絶妙)하여 경동(驚動)하는 난(鸞)새와 회상(回翔)하는 봉(鳳)새와 같았습니다. 비록 더러 세상에 흘러다니기는 하지만 어찌 이 어압(御押)한 글자의 전일한 심획(心劃)에서 나온 것과 같겠습니까. 신이 삼가 그 글자의 형세를 추구(推究)해 보건대 ‘존심(存心)’인 듯했는데, 이 두 글자는 실로 아성(亞聖)468) 이 말한 사천(事天)에 관한 밝은 교훈에서 취한 것입니다. 하늘의 은총(恩寵)을 받들며 거룩한 천명(天命)을 맞이한 것이 이 마음에서 감동된 것이 아님이 없으니, 그 훌륭하신 덕과 지극한 선(善)은 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국보(國寶)는 곧 황명(皇明)에서 우리 나라의 국호(國號)를 내린 다음 영락(永樂)469) 연간(年間)에 은반(恩頒)한 것인데, 금장(金章)귀뉴(龜紐)470) 는 대개 한(漢)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국가가 만세토록 영구히 받들어야 할 정삭(正朔)과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도 장차 이 국보와 함께 무궁하게 전(傳)해야 할 것입니다. 계사년 뒤 45년 만에 청(淸)나라 사람들이 남한 산성(南漢山城) 밑에서 탈취했는데, 그때 동양위(東陽慰) 신익성(申翊聖)이 따라 주조(鑄造)하여 주자고 청했지만, 보존하고 있는 그전의 국보를 사세가 다급하여 만들지 못했으므로, 의사(義士)들이 또한 지금도 비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은 이모사(移摹寫)하여 새로 주조하여, 금내(禁內)에 간직하고 있는 황명(皇明)의 망룡의(蟒龍衣)와 함께 간직해 두고 지난날의 한을 보상(補償)할 것을 청합니다. 성상(聖上)께서 또한 개연히 여기시어 허락해 주신다면, 이는 장차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하도(河圖)와 천구(天球)를 방서(房序)에 진열했던 것471) 과 귀중함을 나란히 하고, 그 의리에 있어서는 더욱 비통할 것입니다. 아! 우리 나라가 황조(皇朝)에 대하여 3백 년 동안 신하로서 섬겨 온 의리는 논할 것도 없고,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힘을 경주(傾注)하여 속국(屬國)을 구제하였음은 천자(天子)와 제후(諸侯)가 있어 온 이래 듣지 못한 일입니다. 성상께서 이미 단(壇)을 만들어 놓고 해마다 향화(香火)를 올리고 계시니, 측달(惻怛)의 정성이 천지에 통하게 될 것입니다마는, 아! 보답하는 일이 장차 이에만 그치겠습니까. 지난날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단지 한없이 보답하기만을 도모하셨던 것이 아니라, 친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찢어지는 것을 보셨기에, 낮이나 밤이나 마음을 썩히시며 진실로 수백 대가 걸리더라도 기필코 원수를 갚으려는 의리가 있으셨습니다.

이번에 신(臣)이 이 자문(咨文)을 봉진(封進)하며 성명(聖明)께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또한 원하건대, 물건을 보면서 감회(感懷)를 일으키기를 갱장(羹墻)472) 에서도 사모하듯 하소서. 동정(東征)에 관한 자문(咨文)을 볼 적에는 재조번방(再造藩邦)473) 한 은덕을 생각하고 보장(寶章)의 고전(古篆)을 볼 적에는 남한 산성(南漢山城) 아래서의 치욕(恥辱)을 느끼시며, 오직 선조(宣祖)께서 광복(光復)을 이루신 것과 효종께서 대의(大義)를 밝히신 바를 생각하소서. 선조께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성의가 있으셨고, 효종께서는 마음속에 지극한 통분을 가지시고 ‘날은 저물어가는데 갈 길이 멀다.’는 뜻을 가지셨기 때문에, 종묘(宗廟)의 혈식(血食)474) 이 연장되어 가고 지사(志士)들이 죽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현명한 사람을 친애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아끼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 진실로 조정을 화합시키고 인재를 모아 들이며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민생들을 돌보아 주기를 그만둘 수 없는 것으로 여기시되, 참으로 주린 사람이 밥먹듯이 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이 하여, 위로 하늘의 마음에 통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한 뒤 천하에 변이 생길 때를 대비한다면, 거의 이 치욕을 씻고 이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신종 황제의 은덕도 뒤쫓아 보답하고 효종의 일도 계술(繼述)하게 되어, 영구히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봉진한 자문(咨文)의 국보(國寶)와 어압(御押)은 새것과 같으니, 어찌 비통한 감회를 견딜 수 있겠는가. 차자의 말도 격절(激切)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0책 52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6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전사(前史) / 외교-명(明) / 출판-인쇄(印刷)

  • [註 461]
    망룡의(蟒龍衣) : 코끼리·용을 그린 옷. 명(明)나라 때 오랑캐 추장이나 각신(閣臣)에게 내려 준 것. 중종(中宗) 때 명나라의 흥성 장태후(興聖蔣太后)가 죽자 조정에서 흠문사(欽問使)로 이청(李淸)을 보냈는데, 돌아올 때 중국 황제가 이 옷을 내렸다 함.
  • [註 462]
    어압(御押) : 왕의 수결(手決)을 새긴 도장.
  • [註 463]
    계사년 : 1593 선조 26년.
  • [註 464]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465]
    신주(神州) : 중국.
  • [註 466]
    육침(陸沈) : 나라가 외적에게 침입당하여 망함.
  • [註 467]
    목릉(穆陵) : 선조.
  • [註 468]
    아성(亞聖) : 맹자.
  • [註 469]
    영락(永樂) :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
  • [註 470]
    귀뉴(龜紐) : 거북의 형상을 새긴 인(印) 꼭지.
  • [註 471]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하도(河圖)와 천구(天球)를 방서(房序)에 진열했던 것 : 《서경(書經)》 주서(周書) 고명(顧命)에 나오는 ‘천구(天球)와 하도(河圖)는 동서(東序)에 두었다.’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천구는 옹주(雍州)에서 바친 하늘색의 구슬, 하도는 황하(黃河)에서 난 무늬 있는 구슬을 말함. 방서(房序)란 곧 동쪽 방앞의 행랑을 뜻함.
  • [註 472]
    갱장(羹墻) :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함을 말함. 요(堯)가 죽은 뒤에 순(舜)이 요를 추모하여, 요의 환상이 밥을 먹을 때는 국[羹]에 나타나고, 앉았을 때는 담[墻]에 나타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
  • [註 473]
    재조번방(再造藩邦) : 임진 왜란 때 중국이 번방(藩邦)인 우리 나라를 구원한 일을 말함.
  • [註 474]
    혈식(血食) : 희생(犧牲)을 바쳐 제사지냄. 곧 제사.

○丙子/日昨藥房入診時, 都提調李頣命白上曰: "臣得一印迹於槐院文書中, 刻以右咨經略衙門字。 又有大印迹, 有宣廟御押。 臣驚玩而粧褙, 仍爲珍藏, 見者皆言可以奉進云。 請入大內, 與皇朝所賜蟒龍衣, 竝爲藏置。" 上許之。 至是頣命封進, 而手書短箚, 去康熙年號, 仍請留中。 其箚曰:

臣昨於入診, 仰陳臣所得咨文故紙, 有國寶、御押, 不敢久藏私室, 伏奉聖旨, 俾臣進呈, 臣不勝愾然感歎。 謹此隨箚投進。 此咨得之於槐院故文書卷衣中, 其文全缺, 而衙門年月, 尙可辨識。 經略是應昌, 萬曆二十一年, 爲我宣廟癸已。 年月之傍, 有細書軍務字, 竊意其時軍務賊情, 往復旁午, 或事有後時咨成不送, 而胥徒不謹, 裁爲卷衣耳。 嘗聞丙子之亂, 槐院老吏, 藏文書於院庭大樹空穴中, 此咨疑亦在其中, 而獲保經歷天地之變, 埋沒於塵埃故紙中, 猶不至磨滅無跡, 始顯於甲子再周之時, 寶章、御押, 朱墨如新, 斯甚奇矣。 神州陸沈, 而國恥莫雪, 皇朝舊物, 無一存者, 而東征時遺跡, 獲覩於百年之後, 豈非深悲而寶惜之者乎? 惟我穆陵宸筆, 妙絶千古, 驚鸞回鳳。 雖往往流落人間, 豈若此押字之專出心畫也? 臣謹推其字勢, 似若存心二字, 實取亞聖事天之明訓。 其承天寵迓景命, 莫非此心所感, 盛德至善, 於戲不可忘也。 國寶, 卽皇肇錫我國號之後, 恩頒於(永平)〔永樂〕 年者也, 金章、龜紐, 蓋倣制云。 國家萬世, 永奉正朔大一統之義, 將與此寶, 傳守無窮。 癸已後四十五年, 淸人奪之於南漢城下, 其時《東陽尉》 申翊聖, 請別鑄而與之, 保有舊寶, 勢急未成, 義士亦至今悲之。 臣請移摹新鑄, 竝與內貯皇蟒龍賜衣, 共藏之, 以償舊恨。 聖上亦慨然可之, 是將與室河圖、天球之陳房序者, 匹其貴重, 而其義則甚悲矣。 嗚呼! 我國於皇朝, 毋論其三百年臣事之義, 若神皇之傾天下之力, 而濟屬國, 自有天子、諸候以來所未聞者。 聖上旣設壇而歲薦香火, 惻怛之誠, 可通於天地, 嗟乎! 所以報之者, 將止於此乎? 昔我孝廟, 不但圖報罔極, 親見天地之崩裂, 日夜腐心, 實有雖百世必復其讎之義。 今臣之進此咨而望聖明者, 亦願寓物興感, 如慕羹墻。 見東征之文咨, 則思再造之恩; 覽寶章之古篆, 則恥城下之辱。 惟思宣廟之所以致興復, 孝廟之所以明大義也。 宣廟至誠事大, 有萬折必東之誠, 孝廟至痛在心, 有日暮途遠之意, 故宗祊延其血食, 志士爲之願死。 然其爲治, 不過曰親賢遠小, 節用愛民。 今殿下, 苟能和朝廷集人才, 革弊政救民生, 視以爲不可已, 眞如飢食而渴飮, 上享天心, 下固民志, 以待天下之有變, 庶可以洗此恥復此讎。 若此可調追報神皇, 繼述孝廟, 永有辭於天下後世也。

答曰: "所進咨文寶押如新, 曷勝感愴? 箚辭激切, 可不留心?"


  • 【태백산사고본】 60책 52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6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전사(前史) / 외교-명(明) / 출판-인쇄(印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