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과 청나라 총관의 호의에 대해 치계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4일에 치계(馳係)하기를,
"시위(侍衛)는 배를 타고 총관(摠管)은 육로(陸路)로 오늘 경원(慶源)에 도착했고, 내일 경흥(慶興)으로 떠나려 합니다. 총관이 백두산 지도 1본(本)을 내주었기 때문에 감봉(監封)하여 올려보내며, 총관이 또 이자(移咨)라 하며 1장의 문서를 보냈기 때문에 또한 올려보냅니다. 그 이른바 ‘압록강(鴨綠江)과 토문강(土們江) 두 강이 모두 백두산의 근저(根底)로부터 발원(發源)하여 강 남쪽의 조선(朝鮮)의 경계가 된지 역년(歷年)이 이미 오래 되었다.’라는 것은 피차의 경계를 논단(論斷)함이 지극히 명백하니, 뒷날의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권이 함경(_)감사 이선부와 함께 또 봉계(封啓)하기를,
"이 달 1일에 총관이 20리 남짓되는 두리산(豆里山)으로 달려가 산마루에 올라 두만강의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바라보고 그 일행 중의 화공(畫工)에게 형상을 그리게 한 뒤 즉시 길을 되돌려서 경원부(慶源府)로 돌아왔습니다. 시위(侍衛)가 조선의 음악을 듣고자 하였기 때문에 고(鼓)·부(缶)·생(笙)·적(笛) 각 한 사람씩을 정하여 보내고 장교(將校)와 통인(通引)을 시켜 번갈아 노래부르고 춤을 추게 하였더니, 매우 즐거워하여 총관이 큰 소 두 마리를 내주어 역졸(驛卒)더러 잡아 먹게 하였으며, 전후로 내준 것이 10여 마리란 많은 수(數)에 이르렀습니다. 신 등이 가지고 온 예단(禮單) 및 문위사(問慰使)의 예단을 조사(措辭)와 함께 주었더니, 총관이 말하기를, ‘이번 길에 폐를 끼친 것이 적지 않은데 만약 예단을 받는다면 실로 황상(皇上)께서 진념(軫念)하시는 뜻에 어긋난다. 문위의 예단에 이르러서는 규례 밖에 따로 보낸 것이니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후로 찬물(饌物)을 주었더니, 저 사람이 문득 삼승(三升)327) 의 조그만 모자(帽子)·띠 등 물건으로 값을 계산하여 갚아 주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가는 때에 미쳐 그 값으로 준 물건을 모두 돌려 보내고 역관(譯官)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대국(大國)의 사람이 황지(皇旨)를 받들어 우리 지경에 와서 약간의 찬물까지 값을 주고 사서 쓰기에 이른다면 사체(事體)가 구차(苟且)하니, 우리 나라의 도리에 있어 또 어찌 이런 일이 용납되리까.’ 하니, 통관(通官)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행자(行資)를 넉넉히 주시어 연로(沿路)에서 사서 쓰게 하셨으니, 이제 만약 값으로 준 물건을 도로 받는다면 총관께서 반드시 성낼 것이오. 이번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이 지극히 순조로왔는데 돌아가는 때에 미쳐 혹시라도 조그만 일 때문에 시끄러운 사단을 일으킨다면 어찌 민망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강을 건넌 뒤에 조용히 총관에게 말을 전하리다.’ 하고, 끝내 전통(傳通)하지 않았으므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총관이 전일에 보내온 자문(咨文)은 신 등이 정문(呈文)으로 발송(發送)하기로 서로 의논하였더니, 총관이 말하기를, ‘나의 자문을 정문의 상단(上端)에 등서(謄書)한 연후에야 돌아가 아뢸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대로 써 보냈습니다. 3일 식후(食後)에 그들 일행이 장차 강을 건너려 하였으므로 신 등이 함께 관소(館所)에 나아가 위문하고 이어 말하기를, ‘경계를 정해 표지(標識)를 세우는 일은 마땅히 조정(朝廷)에 돌아가 아뢰고 서서히 역사(役事)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땅은 황폐해진 지 이미 오래 되어 일찍이 간검(看檢)하지 않았으나, 이제 경계가 분명하고 도로(道路)가 이미 통하니, 공한지(空閑地)에 혹 백성을 모아 들어가 살게 하고 혹 파수(把守)를 세운다면, 허소(虛疏)한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만약 백성을 옮기고 파수를 설치하고자 한다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따로 관원(官員)을 정하고, 1년에 두 세 차례 적간(摘奸)하는 것이 착실(着實)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대답하기를, ‘마땅히 조정에 돌아가 진달하여 상확(商確)하여서 하겠습니다.’ 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앞으로 절사(節使)가 들어올 때에 설치의 형지(形止)328) 를 통관에게 말하여 나에게 전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총관 일행이 경원에 이른날 오랄(鳥喇)329) 장경(章京)330) 한 사람 및 그 종자(從者) 20명이 말을 타고 건너왔기에 본부(本府)의 파수하는 장수 및 군인이 막았으나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총관에게 고하였더니 총관이 장경을 불러 놓고 크게 꾸짖기를, ‘이미 국법(國法)을 범하였으니, 마땅히 돌아가 아뢰어서 처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말하기를, ‘진실로 유죄(有罪)가 되나 그가 총관을 영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였으니, 까닭없이 월경(越境)을 범한 것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내가 건너오지 말라는 뜻으로 분부(分付)하였는데 이번에 월경을 범하였으니 마땅히 중죄(重罪)가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다시 용서할 만한 정상(情狀)이 있음을 말하였더니, 총관이 말하기를, ‘장경이 만약 죄를 입는다면 본부의 관리도 또한 반드시 감죄(勘罪)의 거조(擧措)가 있을 것이니, 이 말에 의하여 돌아가 아뢰지 말 것이며, 접반사와 감사도 또한 반드시 국왕에게 진달할 것 없오.’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자리를 파(罷)하고 나올 때 총관 이하가 일어서서 공수(拱手)331) 하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와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지만 실로 국왕의 진념(軫念)을 힘입었습니다. 또 따로 문위사를 보내어 후하게 예단을 주시니, 권애(眷愛)하는 뜻을 알 수 있지만 황제께서 이미 폐단을 줄이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감히 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감사하여 받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으며, 오후에 발행(發行)하여 곧장 강변(江邊)을 향하여 건너갔습니다.
전일에 신 박권이 무산(茂山)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수역(首譯) 김지남(金指南)이 와서 말하기를, ‘시위(侍衛)가 사냥을 하러 저쪽 강변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온 뒤 은밀하게 말하기를, 「대국 경계의 수목(樹木)을 수없이 작벌(斫伐)하여 수레에 싣고 배로 운반한 흔적이 지극히 낭자하니, 그대 나라의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법금(法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기에 제가 대답하기를 「강변의 무지한 백성이 이 놀랄 만한 일을 저질렀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이 일이 한 번에 적발(摘發)되면 마땅히 죽여야 할 자가 매우 많으니, 노야(老爺)의 측은(惻隱)한 마음으로 어찌 차마 이 일을 하시겠습니까?」 하였더니, 시위가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입을 다물어서 말하지 않겠지만 다만 수행(隨行)하는 사람의 입을 가리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각별히 듣고 보아서 이미 실상(實狀)을 알아냈으나, 저 사람들이 지경 안에 있을 때에는 먼저 드러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강을 건너갔기 때문에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따로 사관(査官)으로 정해 이제 바야흐로 사핵(査覈)하고 있으니, 마땅히 추후(追後)로 계문(啓聞)하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9책 5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43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풍속-연회(宴會) / 무역(貿易) / 농업-임업(林業) / 농업-임업(林業)
- [註 327]삼승(三升) : 몽고에서 나는 무명의 일종.
- [註 328]
형지(形止) : 진행되는 상황.- [註 329]
오랄(鳥喇) : 지금의 길림성 일대에 살던 부족의 이름.- [註 330]
장경(章京) : 청대(淸代) 만주 지방(滿洲地方)의 관직 명칭의 한 가지로, 문서를 관장하였음.- [註 331]
공수(拱手) : 두 손을 마주 잡아 읍함.○接伴使朴權, 初四日馳啓曰: "侍衛乘船摠管由陸, 今日到慶源, 明將發向慶興。 摠管出給白山圖一本, 故監封上送, 而摠管又稱移咨, 出送一張書, 故亦爲上送。 其所謂鴨綠、土門兩江, 俱從白山根底發源, 江南爲朝鮮之境, 歷年已久云者, 論斷彼此境界, 極其明白, 可無後慮。" 至是, 權與監司李善溥, 又爲封啓曰:
本月初一日, 摠管馳往二十里許豆里山, 登山巓望見豆江入海處, 使其行中畫工圖形後, 卽爲復路, 還到慶源府。 侍衛欲聞朝鮮音樂, 故定送皷、缶、笙、笛、各一人, 則使將校、通引, 更唱迭(舜)〔舞〕 , 頗爲歡悅。 摠管出給二大牛, 使驛卒輩, 椎食。 前後出給, 至於十首之多。 臣等所持來禮單及問慰使禮單, 竝措辭入給, 摠管曰: "今行貽弊不貲。 若受禮單, 則實乖於皇上軫念之意。 至於問慰禮單, 係是規外別遣, 不得承受" 云。 前後入給饌物, 彼人輒以三升小帽子、帶子等物, 計價出償, 故今當還去之際, 竝還其價物, 使譯官傳言曰: "大國之人, 奉皇旨來到我境, 若干饌物, 至給價買用, 事體苟簡, 在我國之道, 亦豈容如是?" 通官以爲: "皇帝優給行資, 沿路買用。 今若還給價物, 則摠管必生怒。 此行自初至終, 凡事極順, 而及當臨歸, 以小事或生閙端, 豈非可憫乎? 吾於越江後, 當從容言及於摠管" 云, 而終不傳通, 無可奈何。 摠管前日所送咨文, 臣等相議以呈文發送, 則摠管以爲: "吾之咨文, 謄書于呈文上段, 然後可以歸奏" 云, 故依其言書送。 初三日食後, 彼行將越江, 故臣等同進館所問慰, 仍言: "定界立標事, 當歸奏朝廷, 徐徐始役, 而此地荒廢旣久, 曾不看檢, 今則境界分明, 道路已通, 空閑之地, 或募民入居, 或設立把守, 則可免虛踈之弊矣。" 摠管曰: "若欲移民設把, 則弊將不貲。 莫如別定官員, 一年二三次摘奸之爲着實也。" 臣等答以當歸達朝廷, 商確爲之, 摠管曰: "前頭節使時, 設置形止, 言于通官, 俾傳俺處。" 摠管一行, 到慶源之日, 烏喇章京一人及其從人二十名, 乘馬尙越來, 本府把守將及軍人, 多般防塞, 而終不聽從。 以此告于摠管, 則摠管招致章京, 大加呵責曰: "旣犯國法, 當歸奏處之也。" 臣等以爲: "固爲有罪, 而第以迎接摠管爲言, 與無端犯越有異矣。" 摠管曰: "吾以勿爲越來之意分付。 今此犯越, 宜有重罪。" 臣等復言其情有可恕, 則摠管以爲: "章京若被罪, 則本府官吏, 亦必有勘罪之擧。 當依所言勿爲歸奏, 伴使、監司, 亦不必陳達于國王也。" 臣等罷黜之際, 摠管以下起立拱手曰: "俺等雖承皇命而來, 竣事還歸, 實賴國王軫念。 且別遣問慰, 厚遺禮單, 可見眷意, 而皇帝旣有省弊之敎, 玆不敢違。 然其中心感謝, 與領受無異。" 午後發行, 直向江邊越去矣。 前日臣權, 到茂山時, 首譯金指南來言: "侍衛以佃獵事, 越往彼邊, 還後密言曰: "大國境樹木, 無數斫伐, 車載船運之跡, 極其狼藉。 爾國吏民, 可謂不畏法禁矣。" 指南答以江邊無識之民, 有此可駭之事, 誠極寒心, 而此事一發, 當死者甚多, 以老爺惻隱之心, 何忍爲此耶? 侍衛曰: "吾當含默, 但隨行人之口, 恐難盡掩也。" 臣等, 各別聞見, 旣得實狀, 而彼人在境時, 不可先爲彰露。 今則彼旣越江, 故以會寧府使, 別定査官, 今方査覈, 當追後啓聞云矣。
- 【태백산사고본】 59책 5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43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풍속-연회(宴會) / 무역(貿易) / 농업-임업(林業) / 농업-임업(林業)
- [註 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