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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5월 25일 정미 2번째기사 1712년 청 강희(康熙) 51년

경연의 일·과거 부정의 일·북한 산성의 일 등에 대한 사간 권수의 상소문

사간(司諫) 권수(權𢢝)가 시골에서 진소(陳疏)하였다. 맨 먼저 세종 대왕(世宗大王)이 매일 조참(朝參)을 받고 윤대(輪對)를 한 다음 경연(經筵)에 임하였으며 한가로운 때에는 글을 읽다가 한밤에야 잠자리에 든 것과, 성종 대왕(成宗大王)이 하루 세 번 경연을 열고 이어 소대(召對)와 야대(夜對)가 있어서 즐겁게 놀 겨를이 없었던 것을 상소하고 말하기를,

"이제 전하(殿下)께서는 강론(講論)을 정지하는 때가 많고, 신료(臣僚)의 인접(引接)이 매우 드물며, 비국(備局)의 차대(次對)도 한 달에 두 세 번에 지나지 아니하여 오로지 고식(姑息)을 일삼아 기무(機務)가 정폐(停廢)되니, 이는 성조(聖祖)의 선정(善政)을 도모한 성덕(盛德)에 크게 미치지 못함이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기묘년291) 의 과거(科擧)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하나로 귀결되어 비로소 그 방(榜)을 파(罷)하였으니, 10여 년이 지난 뒤 어찌 회복할 만한 이치가 있습니까? 환수(還收)의 논계(論啓)가 진실로 대체(臺體)를 얻었는데도 이제 한두 사람의 소견을 가지고 문득 중발(重發)의 의논을 정지하였으니, 신은 사체(事體)에 과연 어떤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또 정시(庭試)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금년 봄의 정시는 더욱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고관(考官)은 승패(承牌)292) 하고 수점(受點)한 뒤에는 곧장 시소(試所)에 가야 하고 감히 개인적인 일로 역저(歷抵)293)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고관은 수점한 뒤에 공공연하게 다시 나갔고 심지어 그 집에 다시 간 자가 있기도 하였으니, 무엄(無嚴)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이것이 어찌 혐의(嫌疑)를 멀리하는 도리이겠으며 능히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말을 모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자(擧子)가 문에 들어와 정제(整齊)한 뒤에는 즉시 자물쇠를 채우고 금란관(禁亂官)이 문 밖에 앉아 간람(奸濫)을 막아야 하는데도, 이번에는 안팎의 방금(防禁)이 해이(懈弛)하여 다만 포장(布帳)으로 가려 사이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거자들이 마음대로 들락거려 왕래(往來)에 거리낌이 없었고, 직방(直房)294) 에 가득차고 문루(門樓)에 섞여 앉았습니다. 심지어 한원(翰苑)·옥서(玉署)에 난입하는 자까지 있었고 등촉(燈燭)을 이미 밝힌 뒤에도 혹 어두움을 타서 시권을 던져 넣는 자도 있었습니다. 분고(分考)가 끝나면 곧 합고(合考)해 출방(出榜)하는 것이 규례(規例)인데도, 명관(命官)295) 의 방에 봉하여 두었다가 밤을 넘기고 다시 고적(考績)함은 또한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하고, 또 정시(庭試)에 따로 초시(初試) 2, 3소(所)를 설치하여 차등(次等)296) 이상을 가려 취하되, 즉일(卽日)로 과차(科次)를 정하여 대정(大庭)에 모아 시험보이기를 청하고, 또 통신사(通信使)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능히 예(禮)로 스스로 처신하지 못하고 심지어 관백(關白)의 금옥선(金屋船)을 타기까지 하였습니다. 돌아올 적에는 치장(治裝)이 매우 사치스러웠고, 복태(卜駄)가 몇 리(里)에 뻗혔으며, 수행하는 사공(沙工)과 격군(格軍)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진귀한 물화(物貨)를 얻어 시골의 저자에 팔았으니, 어느 것도 자기 몸을 다스림이 간소(簡素)하지 못하고 아랫사람을 검속(檢束)함이 엄격하지 못한 소치가 아님이 없습니다. 유독 통신사(通信使)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연경(燕京)에 명(命)을 받들고 가는 신하들도 혹 이런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무릇 사개(使介)의 임명에 있어서는 더욱 마땅히 정밀(精密)하게 가려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북한 산성(北漢山城)이 위급한 때 믿기 어려움과 중성(中城)을 다시 쌓지 말아야 할 것을 논하고, 또 도성(都城)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음을 논하되, 양주(楊州)·광주(廣州)·수원(水原)·장단(長湍)이 네 거진(巨鎭)이 되어 병갑(兵甲)을 수선(修繕)하고 양식을 저축하여 흘연(屹然)히 보거(輔車)297) 의 형세(形勢)가 있다면 도성이 웅장(雄壯)해질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웅장해질 것임을 말하고, 이어 광주성의 수어(守禦)의 일을 대략 끝냈으니 세 고을은 우선 흙으로 쌓고 적당한 사람을 얻어 전적으로 그 책임을 맡길 것을 말하였으며, 말미에 목차(穆差)의 경계를 정하는 일에 대하여 응변(應變)하는 방략(方略)을 미리 강정(講定)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였다. 답하기를,

"문과(文科)의 추복(追復)에 대한 환수(還收)의 청(請)을 해를 넘기도록 서로 버티고 고집하니 진실로 너무 지나친 것이다. 이번에 정론(停論)한 것에 무슨 불가한 것이 있겠는가? 포장(布帳)에 대한 한 가지 일은 시소(試所)에서 계품(啓稟)하여 변통(變通)한 것이니, 그때의 사세(事勢)가 이와 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밖의 말한 것들은 비록 과연 전하여 들은 것과 같은지 알지 못하겠으나, 고관(考官)이 수점한 뒤에 만약 그 집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면 지극히 미안한 일이니, 마땅히 바로 잡아 경계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승정원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정시의 초시를 설행(設行)하지 않음은 뜻한 바가 있으니, 반드시 변개(變改)할 것은 없다. 사개(使介)를 정선(精選)하는 일은 해조(該曹)에 신칙(申飭)하라. 북한 산성의 천험(天險)은 옛날의 검각(劍閣)298) 과 같다. 대계(大計)가 이미 정해져 높은 성(城)을 이제 막 완성했으니, 그밖의 모든 일을 차례로 경리(經理)하여야 할 것이다. 천하에 어찌 아주 흠이 없는 땅이 있겠는가. 그대의 소에 이른 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랫조항에 진달한 바는 진실로 의견이 있으나 장문(狀聞)을 잇달아 본 결과 염려가 없을 듯하다."

하였다. 다음날 승정원에서, 정시의 고관으로서 수점한 뒤에 집으로 돌아간 자를 예조(禮曹)로 하여금 문계(問啓)케 하였더니, 바로 예조 판서 이돈(李墩)이었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이돈이 집에 돌아간 것은 승패하여 예궐(詣闕)한 뒤이니, 낙점(落點)이 내려지고 내려지지 않음을 논할 것 없이 곧 스스로 물러간 것이 매우 놀랍다."

하고, 특별히 파직(罷職)을 명하였다. 승정원의 계사(啓辭)에 이돈이 집으로 돌아간 것을 낙점 전으로 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下敎)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59책 5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4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외교-왜(倭)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참(兵站) / 사법-탄핵(彈劾)

  • [註 291]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 [註 292]
    승패(承牌) : 임금으로부터 소명(召命)의 패(牌)를 받음.
  • [註 293]
    역저(歷抵) : 두루 찾아다님.
  • [註 294]
    직방(直房) : 조신(朝臣)들이 조회(朝會)의 시각(時刻)을 기다리는 곳. 궁문(宮門)의 옆에 있음. 조방(朝房).
  • [註 295]
    명관(命官) : 시험관(試驗官)의 하나. 특별히 과거를 보는 경우 임금이 과장(科場)에 친림(親臨)하여 직접 임명하는 시관(試官).
  • [註 296]
    차등(次等) : 버금 되는 등급.
  • [註 297]
    보거(輔車) : 보(輔)는 광대뼈, 거(車)는 잇몸. 광대뼈는 외골(外骨)이고 잇몸은 내골(內骨)이어서, 이 두 뼈가 서로 움직여서 작용하는 것이므로, 서로 의지하고 보조하지 아니하면 그 존재를 보전하기 어려운 관계를 말함.
  • [註 298]
    검각(劍閣) : 중국 장안(長安)에서 촉(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두 곳의 요해처(要害處). 각도(閣道)가 통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司諫權𢢝在鄕陳疏, 首引世宗大王每日受朝, 參聽輪對, 臨經筵, 燕坐讀書, 夜分乃寢, 成宗大王, 日三開筵, 繼而有召對、夜對, 未有暇豫之事曰:

今殿下停講居多, 引接甚闊, 備局次對, 一月不過數三番, 專事姑息, 機務停廢, 此有歉於聖祖圖治之盛德也。

又曰:

己卯之科, 僉議歸一, 始罷其榜, 則十餘年之後, 豈有可復之理耶? 還收之啓, 誠得臺體, 而今乃以一二人所見, 遽停重發之論, 臣未知事體果如何也。

又論庭試事曰:

今春庭科, 尤有異焉。 考官承牌, 受點之後, 直造試所, 不敢有因私歷抵。 今番考官受點之後, 公然復出, 至有還抵其家者, 可謂無嚴矣。 此豈遠嫌之道, 而能免人言之噂沓乎? 擧子入門整齊之後, 旋卽下鑰, 禁亂官坐於門外, 以防奸濫, 今番則內外防禁弛廢, 只以布帳遮隔, 擧子之出入惟意, 往來無礙, 充滿直房, 雜坐門樓, 甚至闌入翰苑、玉署者有之, 燈燭旣擧之後, 或有乘暗而投呈者。 分考旣畢, 則卽爲合考出榜, 例也, 而封置於命官之房, 經宿更考者, 此亦何所據耶?

又請庭試, 別設初試二三所, 揀取次等以上, 卽日科次, 合試於大庭。 又論通信使之事曰:

不能以禮自處, 至乘關白之金屋船。 及其還也, 豐縟太侈, 卜駄連亘數里, 至於篙卒之隨行者, 亦得珍異之物貨, 賣於鄕市, 何莫非律已不能簡, 檢下不能嚴之致也? 不獨信使爲然, 槎奉命之臣, 或不無此等弊端。 凡於使价之差除, 尤宣精擇焉。

又論北漢之緩急難恃, 而中城之不可更築, 且論都城不可不守, 而水原長湍, 爲四巨鎭, 繕甲峙糧, 屹有輔車之勢, 則都城不期壯, 而自壯, 仍言廣州城守粗完, 三邑姑先土築, 得其人而專畀其責, 末言穆差定界事, 應變方略, 不可不預爲講定, 答曰: "文科追復還收之請, 經年相持, 固已太過。 今玆停論, 有何不可? 布帳一款, 自試所啓稟變通者, 而伊時事勢, 不得不如此。 此外云云, 雖未知果如傳聞, 而考官受點後, 若有還抵其家者, 極爲未安, 合有糾警之道。 令政院稟處。 庭試之不設初試, 意有所在, 不必變改。 使介精擇事, 申飭該曹。 北漢之天險, 猶古之劒閣也。 大計已定, 崇墉甫完, 其他凡百, 次第經理矣。 天下豈有十分無欠之地耶? 爾疏所云, 未可曉也。 下款所陳, 誠有意見, 而連觀狀聞, 似無是慮矣。" 翌日政院, 以庭試考官受點後還家者, 令禮曹問啓, 乃禮曹判書李墪也。 上敎以李墪還家, 在於承牌詣闕之後, 則勿論落點之已下未下, 徑自退去, 殊可駭然, 特命罷職。 時, 政院啓辭, 以還家, 爲在落點前, 故上敎如此。


  • 【태백산사고본】 59책 5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4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외교-왜(倭)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참(兵站)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