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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51권, 숙종 38년 5월 15일 정유 1번째기사 1712년 청 강희(康熙) 51년

접반사 박권 등이 중국과의 국경선을 정하는 일에 대해 치계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13일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摠管)이 경유(經由)하는 산천(山川)의 지명(地名)과 도리(道理)283) 를 하나하나 지적하며 자세히 물었으니 기록하는 일이 있는 듯하며, 일행 중에 또 화수(畫手)284) 가 있었으니 필시 도면(圖面)을 그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문위사(問慰使)의 예단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접반사와 도신이 뒤쳐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하였으나 끝내 기꺼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나무를 찍어 길을 열어 장차 검천(劒川)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날 또 치계(馳啓)하기를,

"총관이 압록강(鴨綠江) 상류에 이르러 길이 험하여 갈 수가 없게 되자, 강을 건너 그들의 지경(地境)을 따라 갔으며 늘 천리경(千里鏡)285) 을 가지고 산천을 보았습니다. 또 양천척(量天尺)이 있으니, 하나의 목판(木板)으로 길이는 1자 남짓, 넓이는 몇 치였습니다. 등에 상아(象牙)를 씌워 푼과 치를 새겼는데, 치가 12금이고 푼이 10금이며 위에 윤도(輪圖)286) 를 설치하고 한가운데에 조그만 널을 세웠으니, 측량(測量)하는 기구(器具)인 듯하였습니다. 역관(譯官)이 백산(白山) 지도(地圖) 1건(件)을 얻기를 원하니, 총관이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산천은 그려 줄 수 없지만, 장백산은 곧 그대의 나라이니 어찌 그려 주기 어려우랴.’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백두산 이남은 땅을 다툴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선부가 또 치계하기를,

"다시 혜산 첨사(惠山僉使)로 하여금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더니, 강의 근원은 백두산 산마루 중간에서 시작되어 거의 8, 90리(里) 흐름이 끊어졌다가 감토봉(甘土峰)1식(息)287) 남짓 되는 곳에 이르러 비로소 땅 구멍 속에서 솟아나와 무릇 세 갈래로써 두만강이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9책 51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39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註 283]
    도리(道理) : 이정(里程).
  • [註 284]
    화수(畫手) : 화공(畫工).
  • [註 285]
    천리경(千里鏡) : 망원경(望遠鏡).
  • [註 286]
    윤도(輪圖) : 가운데에 지남침(指南針)을 꽂아 놓고, 가장자리에 원을 그려 이십사방위(二十四方位)로 나누어 놓은 기구. 방위(方位)를 아는 데 쓰임.
  • [註 287]
    1식(息) : 거리의 단위. 30리.

○丁酉/接伴使朴權咸鏡監司李善溥, 十三日馳啓曰: "摠管所經山川地名、道里, 指點詳問, 似有記錄之事, 行中又有畫手, 必是圖繪之計也。 問慰使禮單, 終不受納, 伴使、道臣, 不可落後之意, 再三固請, 終不肯許, 斫木開路, 將向劒川云。" 是日又馳啓曰: "摠管到鴨綠上流, 路險不得行, 越江從彼境作行, 而常以千里鏡照見山川。 又有量天尺, 一木板長可一尺餘, 廣可數寸。 背布象牙, 刻以分寸, 寸爲十二畫, 分爲十畫, 上設輪圖, 中立一小板, 似是測(景)〔量〕 之具也。 譯官願得白山圖一件, 摠管曰: ‘大國山川, 不可畫給, 而白山, 乃爾國也, 何難畫給?’ 以此觀之, 白山以南, 似無爭地之慮。" 善溥又馳啓曰: "更令惠山僉使, 詳審豆滿江源, 則江源出自白頭山顚中間, 斷流幾八九十里, 至甘土峰下一息許, 始自土穴中湧出, 凡三泒而爲豆滿江云。"


  • 【태백산사고본】 59책 51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39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