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조택억 등이 강호에 있으면서 치계하므로 대책을 논의하다.
통신사(通信使) 조태억(趙泰億) 등이 11월 20일에 강호(江戶)에 있으면서 치계(馳啓)하기를,
"신 등이 지난달 18일에 강호에 도착하여 21일에 연향례(宴饗禮)를 행하였고, 이달 초1일에 전명례(傳命禮)를 행하였고, 초3일에는 내정(內庭)에서 음악을 베풀면서 신 등 일행으로 하여금 들어와 보게 하고는 이어 정전(正殿)에서 연향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초7일에는 별도로 귀신(貴臣) 경극(京極)과 대선 대부(大膳大夫) 원고의(源高義)를 보내어 위문하고 주찬(酒饌)과 차[茶]를 보냈는데 하졸(下卒)에까지 미쳤습니다. 11일에는 신 등의 일행이 국왕에게 가서 사례하고 이어 국서(國書)를 받았는데, 국왕이 친히 전수(傳授)하고, 또 별폭(別幅) 물건(物件)을 별전(別殿)에 베풀고는 신 등으로 하여금 간심(看審)하게 한 후에 내어 전해 주었습니다. 12일에는 또 시종(侍從) 풍전수(豐前守) 이씨(伊氏)를 보내 전연(餞宴)을 베풀었습니다. 일찍이 전번 사행(使行)은 전명(傳命)하던 날에 이어서 연향(宴饗)을 행하고 회답 국서(回答國書)는 사자(使者)가 관소(館所)에 와서 전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세 번 내정에서 접견하고 음악을 베풀어 국서를 전했으며, 별도로 주찬을 보내고 여러 번 위로하는 연향을 한 것이 모두 각별히 우대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이는 국왕이 새로 정한 의절(儀節)에 관계된 것이라 합니다.
다만 회답 국서를 받고 나온 후에 즉시 열어 보았더니, 제6항(行)의 ‘감(感)’자 아래에 우리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어휘(御諱)를 범하였고, 또 서면(書面)에 현심(弦心)을 하지 않았으며, 봉(封)에도 역시 쓴 글을 싼 종이가 없이 위는 봉하지 않고 다만 두 줄로 ‘봉복 조선 국왕 전하서(奉復朝鮮國王殿下書)’라 썼을 뿐, 그들 국왕의 성명(姓名)을 쓰지 않았으며, 또 보(寶)를 찍지 않았고, 또 ‘근봉(謹封)’이라 쓰지 않았으니, 단지 우리 나라의 서식(書式)과 서로 틀릴 뿐 아니라 또 임술년586) 의 회답서(回答書) 봉식(封式)과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 등이 즉시 이런 뜻을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 평의방(平義方)에게 말하여 즉시 품하여 고쳐 오게 하였더니, 처음에는 말하기를, ‘글에 임해서는 휘(諱)하지 않는다.’ 하고, 또 말하기를, ‘친진(親盡)587) 하였는데 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으며, 서식(書式)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국왕(國王)이 새로 정한 바로 무릇 주달(奏達)하는 문자는 모두 이런 규정을 썼으니, 지금 고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재삼 글을 보내 말하기를, ‘한(漢)·당(唐) 이후에는 휘법(諱法)이 매우 엄하여 일찍이 친진하였다고 해서 휘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이 법이 더욱 엄절하여 세대가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공사(公私)의 문자에 아울러 범해 쓰지 못한다. 더군다나 중종 대왕은 우리가 백세토록 부조(不祧)588) 하는 묘(廟)이니 더욱 친진했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뜻으로 누누이 쟁집(爭執)하고, 또 서식이 예(禮)가 아님을 강력히 말하여 반드시 고치게 하였더니, 이에 국왕의 교서(敎書)와 집정(執政)의 문자를 가져다 보이는데, ‘국서의 체식(體式)을 지금 고칠 수는 없으니, 휘(諱)를 범한 것만 유독 바로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고, 또 ‘우리 나라의 국서 가운데 「광소(光紹)」의 「광」자는 금왕(今王)의 왕부(王父)589) 인 유조(猷祖)의 휘자를 범했다.’ 하면서, 이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원조(遠祖)는 우리 나라가 개국(開國)하기 전에 있었기에 우리가 실로 알지 못했고, 유묘(猷廟)의 조정에서 어명(御名)을 그들 나라에 통한 것이 무릇 세 번이었으니, 그들이 어찌 우리가 휘하는 바를 모르겠는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 충서(忠恕)의 도리이다. 우리로 하여금 휘할 바를 휘하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우리가 휘하는 바를 피해야 옳은 것이다. 사신들은 이 복서(復書)를 가지고 귀국(歸國)하여 복명(復命)한 후에 귀국(貴國)의 글을 먼저 고쳐 마주(馬州)590) 에 보내면 우리의 복서(復書) 역시 마땅히 고쳐 보내겠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만약 끝내 가지고 가지 않고자 하거든 이미 받은 국서를 우리 나라에 돌려주고, 이미 바친 국서를 조선으로 돌려보내어 그 국서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우리 글 역시 마땅히 고치겠다.’고 하기에, 신 등이 말하기를, ‘두 자로 된 이름은 원래 한 자만 휘하는 예(禮)가 없다. 비록 을미년591) 통신사(通信使) 때의 회답 국서(回答國書)로 말하더라도 「일광산(日光山)」의 「광」자를 일찍이 휘피(諱避)하지 않았었고, 임술년592) 왕복한 문서 역시 이 글자를 많이 썼었는데 이제 어찌 유독 이 한 글자만 휘하려 하는가?’ 하고 여러 차례 힐문했더니, 답하기를, ‘일찍이 전에는 별로 휘피한 법이 없었는데, 근래에는 점차 예절을 숭상하고 또 지금 다른 나라의 휘자는 휘하려 하면서 우리 나라의 휘를 휘하지 않아 사체에 미안하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날짜를 재촉해 정하여 신 등은 빨리 환귀하라.’ 하였습니다.
신 등이 휘를 범한 복서(復書)를 이미 받아 가지고 갈 수도 없고 또 빈손으로 귀국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갖가지로 따졌더니, 말하기를, ‘조선 국서에서 먼저 우리의 휘를 범했으므로, 마땅히 먼저 고쳐야 하며, 조선에서 고쳐 보내기 전에는 결코 먼저 고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비록 한결같이 유체(留滯)하더라도 결코 회심(回心) 동의(動意)할 형세가 없고, 역시 사리(事理)로 다툴 수도 없습니다. 문득 또 생각하건대 조가(朝家)에서 지난번 ‘불비(不備)’ 두 자를 강정(講定)할 때에 이미 그들의 소청을 들어주었은즉, 이제 이 다툼이 비록 말할 것이 못되지만 저들이 이미 범한 휘를 고쳐주기를 청하니,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 고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이에 부득이 사유를 갖추어 치계하여 비선(飛船)을 급히 보내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며, 신 등의 마땅한 바는 그대로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 나라 국서가 고쳐 오기를 기다린 연후에 복서를 고쳐 받아야 하는데, 단지 날짜를 독촉할 뿐만 아니라 그간의 사정이 오래 머물 수도 없습니다. 또 말하기를, ‘복서의 개본(改本)은 수일 내에 사자(使者)로 하여금 신 등을 뒤따라 내보내어 우리의 국서를 고쳐 오면 도착하는 곳에서 즉시 교환하여 주겠다.’고 운운하기 때문에 신 등이 정녕 서로 약속하였는데, 오늘 국왕이 보낸 사자(使者) 직전능수(織田能守) 장복(長福)이 우리 국서를 돌려주고 그 별복(別幅)은 남겨 두었습니다. 신 등이 공손히 받은 후에 역시 그들의 별폭은 남겨 두고 그들 복서는 돌려 주었으며, 내일 강호에서 출발하는데 국서를 교부(交付)하기 전에는 비록 대마도로 건너 가더라도 감히 바다를 건너 귀국할 계획은 하지 않겠습니다. 비선(飛船)이 왕래할 날짜를 계산해 보니, 신 등이 대마도에 도착하기 전에 중로(中路)에서 만날 듯합니다.
비옵건대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품지(稟旨)하여 국서를 고쳐 보내 주시되, 피차의 국서 가운데 단지 범한 휘(諱)한 글자만 고치고 다른 글자는 고치지 말며, 외면(外面)의 서식 역시 이 나라의 예(例)에 의하여 하기를 아울러 문자(文字)로 서로 약속하였으니, 국서 가운데서 단지 광(光)자만 고쳐 이 나라의 서식(書式)에 의해 만들어 보내 주시면 사의(事宜)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서(復書)의 등본(謄本)과 싸는 종이의 견양(見樣)을 하나씩 아울러 올려 보냅니다. 신 등은 이런 뜻밖의 일을 만나 회답서를 아직 고쳐받지 못하여 사신의 일이 엄체(淹滯)되고 있어 하루가 급하오니, 고친 국서를 밤낮없이 내려 보내주시어 때맞춰 교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장계(狀啓)가 들어오자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과 병조 판서(兵曹判書) 최석항(崔錫恒)·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언강(李彦綱)·예조 판서(禮曹判書) 윤덕준(尹德駿)·우윤(右尹) 박권(朴權)이 즉시 청대(請對)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통신사(通信使)의 장계(狀啓)가 매우 마음을 놀라게 합니다. 어휘(御諱)는 다른 나라에서 알 바가 아니니, 사신이 처음에 따지지 않았다면 무방하겠지만 이미 말한 후에는 즉시 고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代)가 멀어 친진(親盡)되었다.’고 말하였으니, 말이 매우 불손(不遜)합니다. 또 국서 가운데의 광(光)자로써 그들이 휘하는 바를 범했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고쳐주기를 요구하나, 전에 있던 서계(書啓)에는 광자를 많이 썼으며 일찍이 회피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사신과 맞서 거절하는 즈음에 비로소 말을 고집하니, 참으로 근거가 없습니다. 서식(書式)에 이르러서도 이는 오래 된 규례로 외면(外面)에는 현심(弦心)을 하고, 봉투에는 어휘(御諱)를 쓰며 어보(御寶)를 찍었으니 그들의 글도 이런 식과 같았었는데, 이제 그 회서(回書)에 현심(弦心)을 없애고 도장을 누르지 않았으며 성명을 쓰지 않았으므로 그 수모(受侮)가 적지 않아서 미세한 절목(節目) 사이의 일 같지는 않으니, 사신의 힐문(詰問)함이 마땅합니다.
장계 가운데 말하기를, ‘날짜를 정하여 떠나기를 재촉하므로 강호(江戶)를 떠나 나온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글을 고쳐 사신이 도착하는 곳으로 추송(追送)하여 우리 국서가 고쳐 오는 것을 기다려 교환해 주겠다고 약속하였으며, 또 우리 국서를 역시 그들의 신식(新式)에 따르기로 약속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범론(泛論)하자면 우리가 이미 범한 휘자를 고쳐달라고 하였으니, 저들이 휘하는 바를 우리 역시 고쳐 주어야 하고, 또 서식을 저들이 이미 고쳤으니,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굴하는 데는 이르지 않겠으나, 다만 나라와의 외교(外交) 문서에 우리는 이미 구식(舊式)을 따랐는데 그들이 새 규정을 창출했다 하여 서로 다툰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신식을 따르게 되면, 국체(國體)가 크게 손상되고 욕될 것이니, 고쳐 주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신이 반드시 사정을 자세히 알면서 이처럼 고쳐 보내달라는 청이 있었을 테니, 마땅히 허락하여야 할 형세입니다."
하고,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저들을 제압할 기도(氣刀)가 없어 매사를 곡종(曲從)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욕을 끼침이 어떠하겠습니까? 휘를 범하고도 모르는 것은 본디 괴이할 것이 없으나, 서식은 간만(簡慢)함이 심합니다. 잘못이 이미 저들에게 있으니 마땅히 고쳐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하는데, 끝내 이길 수 없어 부득이한 후에 허락한다면 즉시 허락하는 것만 못하며, 또 전에 비해 예(禮)를 더해 달라고 하면 따를 수가 없으나 지금은 간이(簡易)하게 하는 것이므로,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고, 최석항 등 여러 신하가 모두 고쳐 보내도 무방하다고 하였는데, 홀로 박권이 말하기를,
"설혹 서식을 고친다 하더라도 마땅히 이로써 미리 서로 의논을 통해야 하는데 갑자기 마음대로 고쳤으니 아주 근거가 없습니다. 사신이 무슨 일 때문에 힘껏 다투지 못했는가를 모르겠습니다. 어휘(御諱)가 쓰인 글을 이미 전한 후에 다시 가지고 온다면 어찌 욕되지 않겠습니까? 일마다 이러하여 점점 약함을 보이면 앞으로 또 무슨 사단(事端)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감히 고쳐 보내자고 청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서종태와 이이명이 모두 말하기를,
"박권의 말이 옳습니다. 다만 왜(倭)는 천지(天地) 사이의 별종(別種)으로 계책을 한 번 정하면 절대 고치는 것이 드무니, 앞으로 더욱 난처한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박권이 말하기를,
"만약 사신으로 하여금 의(義)에 의거하여 엄히 물리치게 한다면 그들 역시 잘못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알아서 혹 마음을 돌려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의를 들어 쟁변(爭辨)한다면 그들이 혹 마음을 돌려 듣는 것이 박권의 말과 같겠으나, 참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처리하기 어렵게 될 것이니,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킴을 더욱 마땅히 어떻게 하겠는가? 광(光)자 및 서식을 아울러 고쳐 보내라."
하고는 이어 고쳐 써 재자관(䝴咨官)에게 부쳐서 사신이 도착하는 곳까지 가 전수(傳受)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신사(信使)가 이미 국경을 나가 전명(傳命)하다가 비록 불행하여 사변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고집한 바가 이미 바르면 또한 마땅히 반복해 힘껏 쟁변하여 〈마음을〉 돌려 듣기를 기약해야 하는데 머뭇거리며 이미 전했던 국서를 도로 가지고 마침내 먼저 귀로(歸路)에 올라 치계(馳啓)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니,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연석(筵席)에서는 오직 고쳐 보내는 것이 혹 지체될까 염려하여 감히 사신을 논척(論斥)하는 데 언급한 자가 없었으니 애석하다. 이이명이 이른바 ‘서식을 전에 비해 예(禮)를 더하라면 결코 따를 수 없지만 지금은 간이하게 하자는 것이니,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한 말은 더욱 알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더하게 하거나 간만(簡慢)하게 하거나를 논할 것 없이 먼저 의논을 통하지 않고 마음대로 구식을 고쳤으니, 이는 참으로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저들이 글에다 예를 더하는 것을 창시(創始)하여 우리로 하여금 따르도록 했다면 오히려 치경(致敬)이 저들에게서 먼저 나왔다고 핑계할 수 있겠으나 저들이 이에 간이한 규정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우리 국서가 겨우 참여해 서로 같게 되었으니, 이는 저들이 먼저 우리를 모욕한 것이고 우리가 그걸 본받은 것이다. 도리어 예(禮)를 더하도록 고쳐 따르게 하는 것만 못함이 심한 데도 이이명의 말이 이와 같으니, 하나같이 소견이 어찌 이렇게 잘못되었는가?
- 【태백산사고본】 58책 50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25면
- 【분류】외교-왜(倭)
- [註 586]임술년 : 1682 숙종 8년.
- [註 587]
친진(親盡) :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되었다는 것으로, 임금은 오대조(五代祖)까지, 평민은 고조(高祖)까지 봉사(奉祀)하였음. 대진(代盡).- [註 588]
부조(不祧) : 천묘(遷廟)하지 않고 영구히 제사지내는 것.- [註 589]
왕부(王父) : 조부(祖父).- [註 590]
○通信使趙泰億等, 十一月二十日, 在江戶馳啓曰: "臣等前月十八日, 到江戶, 二十一日行宴饗禮, 今月初一日, 行傳命禮。 初三日張樂於內庭, 令臣等一行入觀, 仍設宴饗於正殿。 初七日別遣貴臣京極大膳大夫源高義, 問慰致酒饌及茶, 至及下卒。 十一日, 臣等一行, 往辭國王, 仍受國書。 國王親爲傳授, 且陳別幅物件於別殿, 令臣等看審後出傳。 十二日又遣侍從豐前守伊氏, 設餞宴。 曾前使行則傳命之日, 仍行宴饗, 回答國書, 則使者來傳於館所。 今此三度接見內庭, 張樂親傳國書, 別致酒饌, 及前後累度勞饗, 皆出於各別優待之意, 係是國王所新定儀節云。 但回答國書受出後, 卽爲拆見, 則第六行感字之下, 犯我中宗大王御諱, 且書面不爲弦心, 封又無所書, 裹紙上不封, 只雙書奉復朝鮮國王殿下書, 不書其國王姓名, 又不安寶, 又不書謹封, 不但與我國書式相左, 且與壬戌年回答書封式不同。 故臣等卽以此意, 言于馬島太守平義方使卽稟改以來, 則初則曰: ‘臨文不諱。’ 又曰: ‘親盡不當諱。’ 書式則曰: ‘國王所新定, 凡奏達文字, 皆用此規, 今不可變改。’ 臣等再三貽書以爲: ‘漢、唐以後, 諱法甚嚴, 未嘗有以親盡而不諱, 我國此法尤截然, 無論世代久近, 公私文字, 竝不得犯用。 況中宗大王, 是我百世不祧之廟, 尤不可謂之親盡。’ 以此縷縷爭執, 又力言書式之非禮, 使之必改, 則乃以國王敎執政文字來示, 有曰: ‘國書體式, 今不可撓改, 犯諱事, 不惟不卽許改。’ 又以爲: ‘我國書中光紹之光字, 犯今王王父猷祖之諱。’ 乃曰: ‘彼國遠祖, 在我開國之前, 我實不知,猷廟之朝, 以御名通于彼國者, 凡三, 則彼豈不知我所諱耶? 已所不欲, 勿施於人, 忠恕之道也。 倘欲使我, 諱其所諱, 必先避我之所諱而後可矣。 使臣等將此復書, 歸國復命後, 貴國書先爲改送于馬州, 則我復書亦當改送。’ 又曰: ‘若終不欲齎去, 則已領之國書, 還于我國, 已奉之國書, 領回朝鮮, 待其國書之到, 我書亦當改之’ 云。 臣等以爲二名元無偏諱之禮。 雖以乙未信使時回答國書言之, 日光山之光字, 曾不諱避, 壬戌往復文書, 亦多用此字, 今何獨有此偏諱之擧耶? 累次詰問, 則答云: ‘曾前別無諱避之法, 近來漸尙禮節, 且今欲諱他國之諱, 而不諱我國之諱, 事體未安, 不得不如此, 促定日期, 使臣等斯速還歸。’ 臣等以犯諱之復書, 旣不可受去, 又不可空手歸國之意, 萬端爭詰, 則以爲: ‘朝鮮國書, 先犯我諱, 所當先改, 朝鮮不改送之前, 決難先改。’ 臣等雖一向留滯, 決無回動之勢, 亦不可以事理相爭。 抑又思之, 朝家頃於不備二字講定時, 旣許其所請, 則今玆所爭, 雖其無謂, 彼旣以犯諱請改, 則在我之道, 不容不改。 玆不得不具由馳啓, 急送飛船, 以待朝家處分。 臣等所當仍留此處, 以待我國書之改來, 然後改受復書, 而不但刻日督發, 其間事情, 有不可久留者。 且曰: ‘復書改本, 數日內使使者, 踵臣等出送, 我國書改來, 則所到處, 卽當交授’ 云云, 故臣等與之丁寧相約, 今日國王遣使者織田能守長福, 還傳我國書, 而留其別幅。 臣等祗受後, 亦留其別幅, 還其復書, 明日將自江戶離發, 而國書未交付之前, 雖渡馬州, 不敢爲渡海歸國之計。 計飛船往來日字, 則臣等未到馬州之前, 似當逢着於中路。 乞令廟堂, 作速稟旨, 改送國書, 而彼此國書中, 只改犯諱一字, 無得變改他字, 外面書式, 亦依此國之例爲之事, 竝以文字相約, 國書中, 只改光字, 而依此國書式成送, 似合事宜。 故復書謄本, 裹紙見樣, 一倂上送。 臣等遭此意外之事, 回答書姑未改受, 使事淹滯, 一日爲急, 國書改本, 罔夜下送, 以爲及時交付之地幸甚。" 狀啓入來, 領議政徐宗泰、判府事李頤命, 與兵曹判書崔錫恒、刑曹判書李彦綱、禮曹判書尹德駿、右尹朴權, 卽爲請對。 宗泰曰: "通信使狀啓, 極可驚心。 御諱非他國之所能知, 使臣初不致責, 則固無妨, 旣言之後, 宜卽許改, 而至以遠代親盡爲言, 言甚不遜。 又以國書中光字, 謂犯其所諱, 要我令改。 在前書契, 多用光字, 未嘗回避, 而今於對拒使臣之際, 始乃執言, 誠爲無據。 至於書式, 乃久遠之規, 外面爲弦心, 封書御諱而安寶, 彼書亦同此式, 而今其回書, 去弦心不踏印, 而不書姓名, 其受侮不少, 非如微細節目間事, 使臣之詰問宜矣。 狀啓中以爲: ‘刻日督發, 故離江戶出來。’ 又以爲: ‘約以當改書追送於使臣所到處, 待我國書改來, 與之交授, 又約以我國書, 亦從渠新式。’ 云。 泛論則我旣責令改下犯諱字, 則彼之所諱, 我亦當許改, 且書式彼旣改之, 我亦如之, 不至爲貶屈, 而第與國聘書, 我則旣從舊式, 而渠乃創出新規, 爭執之後, 始令從渠新式, 國體大爲損辱, 許改誠難矣。 然使臣必詳知事情, 而有此改送之請, 勢當許之矣。"頤命曰: "我無制彼之氣(刀)〔力〕 , 每事曲從, 以至於此, 其貽辱如何? 犯諱之不知, 固無足怪, 而書式則簡慢甚矣。 曲旣在彼, 所當勿許改送, 而終不能勝, 不得已後許之, 則不如卽許之爲愈, 且比前加禮, 則決不可從, 而今乃簡易, 似不必持難。" 錫恒等諸臣皆以爲改送無妨, 獨朴權曰: "設或改式, 當以此, 預相通議, 而猝然擅改, 極爲無據。 未知使臣, 緣何事, 不能力爭也。 御諱所書之書, 旣傳之後, 還復持來, 寧不爲辱乎? 事事如此, 漸漸示弱, 則前頭不知又有何許事端。 臣則不敢以改送爲請矣。" 宗泰、頣命皆曰: "朴權之言是矣。 但倭是天地間別種, 意計一定, 絶罕改圖, 前頭恐尤有難處矣。" 權曰: "若令使臣, 據義嚴斥, 則渠亦知曲在於己, 或可回聽矣。" 上曰: "今若據理爭辨, 則渠或回聽, 如朴權之言, 苟不能然, 轉至難處, 則傷損國體, 尤當如何? 光字及書式, 竝改送焉。" 仍令改寫付齎咨官, 限使臣所到處, 使之傳授。
【史臣曰: "信使旣出疆傳命, 雖不幸而遭事變, 我之所執旣正, 亦當反復力爭, 期於回聽, 而顧乃還齎已傳之國書, 徑首歸路, 馳啓請改, 辱國之罪, 不可勝言。 而筵席之上, 惟恐改送之或稽, 無敢言及於論斥使臣者, 惜哉! 至如李頤命所謂: ‘書式, 比前加禮, 則決不可從, 今乃簡易, 似不必持難者’, 尤未可曉。 毋論加禮與簡慢, 不先通議而擅改舊式, 此固不可從矣。 況彼書創爲加禮, 而使我從之, 則猶可諉以致敬, 先出於彼矣。 彼乃創用簡規, 而我書僅與之相同, 是則彼先慢我, 而我效之也。 反不如改從加禮者遠甚, 而頤命之言如此, 一何所見之謬也?"】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卷之五十終
- 【태백산사고본】 58책 50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25면
- 【분류】외교-왜(倭)
- [註 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