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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0권, 숙종 37년 12월 27일 신사 4번째기사 1711년 청 강희(康熙) 50년

우윤 박권이 양역 변통에 대해 진소하다

우윤(右尹) 박권(朴權)이 양역(良役)의 변통에 대하여 진소(陳疏)하기를,

"양역을 변통하는 일은 신 역시 말의(末議)에 참여하여 들었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그 사이에 혹 막혀서 행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그 대체(大體)를 따져 보아도 역시 고식(姑息)을 면치 못하는 데로 귀결되니, 한때의 폐단은 비록 구해야 하겠지만 수년 뒤에는 반드시 다시 전처럼 되어 우리 성상께서 폐단의 근원을 고치려고 하는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양역에 징포(徵布)하는 것은 행한 지가 이미 오래여서 폐단이 이미 극에 이르렀는데, 만약 그 제도를 변경하지 않고 다만 그 폐단만 구하려 한다면 힘 쓰는 것만 한갓 수고로울 뿐 그 실효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비유컨대 집이 퇴락하여 기둥이 흔들리고 들보가 기울었는데 비록 기와를 고치고 서까래를 바꾸며 기둥을 버티고 벽을 바른다 하더라도 비바람이 치면 곧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가 있으니, 반드시 한 번 헐어내고 다시 새로 지어야만 바야흐로 살만한 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개혁하는 의논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포(丁布)이며, 둘은 호포(戶布)입니다.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이 논한 정포(丁布)의 대의는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1정(丁)이 내는 돈이 이에 1백 20문(文)으로, 이는 본디 한(漢)나라 법(法)인데, 지금 통용하고 있는 돈은 협전(莢錢)에 비해 그 경중(輕重)이 배(倍)가 될 뿐만이 아닌즉, 1정이 내는 그 숫자가 너무 과다할 듯하며, 공사 천구(公私賤口)·장정 군졸(長征軍卒)과 종친(宗親), 문무관 2품 이상의 양천 부녀(良賤婦女)는 모두 응당 면하는 가운데 들게 되어 감(減)한 자가 이처럼 많게 된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반드시 그 경비를 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호포(戶布)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분등(分等)할 때에 식구의 다과를 고르게 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대신이 논한 것과 같음이 있는데, 경중(京中)의 금년 장적(帳籍)을 가져다 상고해 보면 사대부(士大夫)의 가솔(家率) 밑에 남녀가 혹 1백 3, 40명의 식구가 되게 많으니, 이는 모두 각처에 사는 노비가 방역(坊役)을 회피하기 위하여 합호(合戶)를 함부로 기록한 소치입니다. 이러한 유는 이미 1호(戶)로 시행할 수도 없고, 또 여러 호로 나눌 수도 없어 참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정포(丁布)와 호포(戶布)는 다 폐단이 있어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이른바 ‘구전(口錢)이 가장 낫다.’고 한 것이 참으로 확론(確論)입니다. 한(漢)나라의 구전법(口錢法)582) 이 남녀 모두에게 부역(賦役)하여 부인(婦人)에 미쳐서는 너무 심한 듯하였으나, 대개 농상(農桑)의 업(業)으로 재화를 생산할 수 있어서, 베짜는 일도 농사짓는 일과 그 이익이 맞먹기 때문입니다. 대저 한(漢)나라 초기의 관대한 정사로도 오히려 이걸 행하였으니, 또한 어찌 소견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이제 만약 호구전(戶口錢)이라 이름한다면 모든 가호(家戶)가 있는 자는 남녀를 물론하고 16세부터 55세에 이르기까지 식구를 헤아려 돈을 부과하되 남자는 60문(文), 여자는 30문을 내게 하고, 공사천(公私賤)으로 납공(納貢)하는 자와 역(役)에 종사하는 자는 각기 그 반을 감하며, 강변(江邊)과 바닷가에서는 돈 대신 쌀로 환산해 받고 목면(木綿)이나 마포(麻布) 등 생산되는 것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식구가 있는 자는 부(賦)를 내면 합호(合戶)하여 고르지 못할 염려가 없고 납부하는 것이 지극히 적어 적(籍)에서 누락되어 면하려고 꾀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환과(鰥寡)·고독(孤獨)·독질(篤疾)·폐질(廢疾)과 15세 이전, 56세 이후는 모두 견감하는 과목에 들게 되면 한 호(戶) 안에 반드시 면제되는 자가 많아서 그 납부하는 돈이 호포(戶布)·정포(丁布)에 비해 역시 반드시 감소될 것입니다.

이제 경외(京外)의 호구 수로 대략 계산해 보면 비록 확실하게 그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1년의 수용과 비교해 보면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여러 각사(各司)·각 아문(衙門)·각 군문(軍門)의 비용과 남용하는 숫자를 또 다시 참작하여 절약한다면 거의 부족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호구전(戶口錢)이 이미 경비의 쓰임에 족하면 베를 거두는 규정은 마땅히 혁파될 것이니, 7, 80만의 납포(納布)하는 군사들이 모두 기뻐하여 춤을 출 것이며, 백골 징포(白骨徵布)와 황구 첨정(黃口簽丁), 인족 침징(隣族侵徵)과 한정(閑丁)의 얻기 어려움, 이서(吏胥)의 농간, 교생(校生)·군관(軍官)을 태정(汰定)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유의 폐단이 종종 쌓이고 있는 것을 깨끗하게 한 번에 씻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베를 받는 군사 70여 만 가운데 효건(驍健)한 자가 반드시 50만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이로써 대오(隊伍)를 만들어 연호 잡역(煙戶雜役)을 일체 침범시키지 말고, 봄과 여름에는 농사를 짓게 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조련(操鍊)하여 번갈아 번(番)들게 하여 숙위(宿衛)를 갖추게 하고, 번을 들지 않는 자는 각도의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로 하여금 나누어 통솔하게 하여 일이 없을 때에는 지방(地方)에서 방수(防守)하게 하고 일이 있으면 거느리어 근왕(勤王)하게 할 것이니, 이는 당(唐)나라 시대의 부병제(府兵制)583) 이며 우리 나라 오위(五衛)의 제도인데, 각도의 속오(束伍)·아병(牙兵)에서 공사천과 노약자, 피잔(疲殘)한 유는 한결같이 도태시키면 중외의 군제는 환연히 일신(一新)할 수 있습니다.

이 법을 시행하면 소민(小民)은 모두 기뻐할 것이나 대가(大家)·거실(巨室)로 많은 노비를 거느린 자에서 경향(京鄕)의 양반(兩班)·서얼(庶孽)·중인(中人)까지는 갑자기 전에 없던 부(賦)를 당하게 되어 비록 기뻐하지 않은 마음이 있게 되겠지만, 이미 국가의 뜻이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돌보려는 것에서 나온 것임을 알면 조금 지식이 있는 자는 반드시 원망하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무뢰배들이 설사 선동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 납부할 것이 많지 않음을 생각하여 원망이 깊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국가에서 한결같이 보는 도리로 말하더라도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데 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고, 백성들의 귀천으로서 후박(厚薄)을 두지 않았음이 명백합니다. 당(唐)나라의 조(租)·용(庸)·조(調)584) 를 선유(先儒)들은 3대(三代)585) 이후의 양법(良法)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른바 조(調)란 가호(家戶)의 역(役)에 귀천의 구분이 없는 조문입니다. 송(宋)나라 신하 소식(蘇軾)의 소(疏)에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는 3대(大) 호역(戶役)은 공경(公卿)으로부터 이하 면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당(唐)·송(宋)의 세상에서도 공경의 호역(戶役)을 견면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는데, 하물며 지금 중외(中外)의 허다한 양반이란 이름만 유독 일국의 남녀가 함께 내는 호부(戶賦)를 면제(免除)하며, 국가(國家) 역시 그들의 원망을 초래할까 염려하여 역(役)을 고르게 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소로 진달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8책 50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2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재정-역(役) / 신분(身分)

  • [註 582]
    구전법(口錢法) : 식구(食口)에 따라 내는 부세(賦稅)로, 진대(秦代)에 처음 시행하여 한대(漢代)에 발전하였음. 인구세(人口稅).
  • [註 583]
    부병제(府兵制) : 서위(西魏)·후주(後周)를 거쳐 수(隋)·당(唐) 시대에 발달한 군사 조직. 백성들을 농한기(農閑期)에 자사(刺史)가 훈련시켜 조정에 부속시켜 유사시를 대비하였음.
  • [註 584]
    조(租)·용(庸)·조(調) : 당대(唐代)의 세 가지 징세법. 토지에 부과하는 조(租), 백성에게 부역을 시키는 용(庸), 가업(家業)에 부과하는 조(調)임.
  • [註 585]
    3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右尹朴權, 以良役變通陳疏曰:

良役變通事, 臣亦預聞末議, 而第念其間, 或不無窒礙不可行者, 究其大體, 亦不免爲姑息之歸。 一時之弊, 雖若可救, 數年之後, 必復如前, 恐無以副我聖上釐革弊源之意也。 良役徵布, 行之旣久, 爲弊已極。 若欲不變其制, 而但救其弊, 則用力徒勤, 而難望其實效。 譬如屋宇頹圮, 棟撓樑傾, 雖使改瓦易榱撑柱塗墍, 風雨來萃, 立見其顚壓。 必須一番毁撤, 更新結構, 方可以奠居也。 今之更革之議有二焉, 一曰丁布, 二曰戶布。 判府事臣李頤命所論丁布, 大意儘好, 而一丁當納之錢, 乃至一百二十文。 此固法, 而目今通用之錢, 比之莢錢, 輕重不啻倍蓰蓰, 則一丁所納, 其數似爲過多, 而公私賤口、長征軍卒、宗親、文武二品以上、良賤婦女, 皆在應免之中。 所減者若是夥然, 則所捧者, 必不能充其經用之費也。 至於戶布之制, 則分等之際, 口數之多寡, 不能均齊, 誠有如大臣所論者, 而取考京中今年帳籍, 則士夫家率下男女, 或至於一百三四十口之多。 此皆由於各居奴婢, 規避坊役, 合戶冒錄之致。 如此之類, 旣不可以一戶施行, 又不可分作累戶, 誠有難處者矣。 以此言之, 則丁布與戶布, 俱有弊端。 原任大臣所謂口錢最勝者, 誠確論也。 家口錢之法, 男女俱賦, 役及婦人, 近於已甚, 而蓋以農桑之業, 俱可以生財, 機杼之工, 可敵耒耟之利故也。 夫以初寬大之政, 尙且行此者, 亦豈無所見而然哉? 今若以戶口錢爲名, 凡有家戶者, 勿論男女, 自十六歲至五十五歲, 計口賦錢, 男出六十文, 女出三十文, 公私賤納貢, 與仰役者, 各減其半, 沿江沿海, 以米折錢, 木綿、麻布, 隨産計捧, 有口者出賦, 無合戶不均之患, 所納者至少, 無漏籍規免之弊。 鰥寡、孤獨、篤疾、廢疾、十五歲以前五十六歲以後, 俱在蠲賦之科, 則一戶之內, 當免者必多, 而其所納之錢, 比之戶布、丁布, 亦必減少矣。 今以京外戶口數, 大略計之, 則雖未的知其爲幾何, 而較之一年需用, 似不至相懸。 且諸各司、各衙門、各軍門浮費濫用之數, 又復參酌裁省, 則庶可無不足之憂矣。 戶口錢, 旣足爲經用, 則收布之規, 自當革罷, 七八十萬納布之軍, 莫不歡欣皷舞, 而白骨黃口, 徵族侵隣, 閑丁之難得, 吏胥之舞奸, 校生、軍官汰定呼冤之類, 種種積弊, 可以脫然一洗矣。 就其收布軍七十餘萬人中, 抄出驍健者, 必不下五十萬。 以此編作隊伍, 烟戶雜役, 一切勿侵, 春夏農作, 秋冬操鍊, 輪次上番, 以備宿衛, 不上番者, 使各道監、兵、水使分統, 無事則防守地方, 有事則領率勤王, 此乃朝府兵, 我朝五衛之制, 而各道束伍、牙兵、公私賤、老弱、疲殘之類, 一倂沙汰, 則中外軍制, 可以煥然一新矣。 此法之行, 小民無不喜悅, 而若夫大家、巨室, 率奴婢之衆多者, 以至京鄕兩班、庶孽、中人, 遽當無前之賦, 雖有不悅之心, 旣知國家之意, 出於均役恤民, 則少有知識者, 必不至於怨咨, 而其中無賴之流, 設有胥動之言, 顧其所納者不多, 想其爲怨也不深。 且以國家一視之道言之, 賦於民也, 患其不均, 不當以民之貴賤, 有所厚薄也明矣。 之租、庸、調, 先儒稱其三代後良法。 所謂調者, 卽家戶之役, 而未有貴賤區別之文。 蘇軾之疏曰: "今世三大戶之役, 自公卿以下, 無得免焉。" 之世, 公卿之不蠲戶役, 可以推知。 況今中外許多以兩班爲名者, 其可獨免一國男女所共出之戶賦, 而國家亦將憂其招怨, 不思所以均役之道耶?

答曰: "疏陳之事, 令廟堂, 商確稟處。"


  • 【태백산사고본】 58책 50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2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재정-역(役) / 신분(身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