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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50권, 숙종 37년 8월 29일 병술 3번째기사 1711년 청 강희(康熙) 50년

북한 산성에 행군영건청의 명호를 두고 수령의 연한을 정하는 등의 일을 논의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일전에 북성(北城)376) 의 수신(守臣)과 양향(粮餉)을 빨리 강정(講定)하라는 뜻으로 연중(筵中)에서 분부를 내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의 말에 따라 행궁영건청(行宮營建廳)이라는 명호(名號)를 두고 낭청(郞廳)도 공조(工曹)·호조(戶曹)의 낭관(郞官)으로 1원(員)을 더 내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계복(啓覆)377) 은 9월 안에 해야 하는데, 형판(刑判) 윤덕준(尹德駿)은 병이 있어서 문서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으니, 체차(遞差)를 윤허하셔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복을 조금 늦춰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개차(改差)하라고 명하였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정경(正卿) 중에서 의망(擬望)378) 하면 참으로 간편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서 종2품(從二品) 중에서 의망하라고 명하였는데, 이튿날 대신이 공조 참판(工曹參判) 송상기(宋相琦)를 말의(末擬)하였으나 임금이 낙점(落點)하지 않고 수망(首望) 이언강(李彦綱)을 낙점하였다. 이판(吏判) 조태구(趙泰耉)가 수령(守令)의 연한(年限)을 대신에게 물어서 명백히 정식(定式)으로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하(堂下)인 수령은 10고(十考)379) 가 과한(瓜限)이므로 65세에 차제(差除)하면 69세에 10고에 찰 것이고, 당상(堂上)인 수령은 5고(五考)가 과한이므로 67세에 차제하면 69세에 또한 5고에 찰 것이다."

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그러면 당하는 66세부터, 당상은 68세부터 수령에 차제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대로 하라."

하였다. 조태구가 또 말하기를,

"전 찰방(察訪) 이언순(李彦純)은 하료(下僚)에 침체되어 있는 지 이미 23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10여 년 동안 두문(杜門)하여 왔는데, 자처(自處)를 잘한다고 세상에서 일컬으니, 침체되어 있는 것을 소통시키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이언순은 귀양가 있을 때에 좌죄(坐罪)된 것이 있어서 이제까지 침체되었으나, 변통하여도 안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승륙(陞六)380) 하라고 명하였다. 조태구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하고(下考)381) 에 있으니, 탕척(蕩滌)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하고를 탕척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조태구는 말하기를,

"이미 승륙(陞六)하라고 명하셨으니, 하고는 절로 탕척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다시 품백(稟白)하지 않았다. 수찬(修撰) 이세근(李世謹)이 말하기를,

"조대수(趙大壽)는 이름이 단서(丹書)382) 기묘년383) 의 과거(科擧) 때에 사정(私情)을 쓴 일이다.】 에 적혀 있는 지 12년이 되었는데, 10년이면 천도(天道)도 조금 변하는 것입니다. 인조(仁祖) 때에 조박(趙璞)이 좌죄(坐罪)된 것은 이보다 자못 무거웠는 데도 유배되었다가 석방되고 끝내는 서용되었으니, 오늘날에도 종신토록 폐기하게 하지 말아서 스스로 새로워질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김창집은 말하기를,

"대개 듣건대 조대수의 공초(供招)에 ‘심익창(沈益昌)의 글머리에 유세기(兪世基)의 자호(字號)가 보이므로 곧 찢었다.’는 등의 말로 자복(自服)하였다 합니다. 또 유세기의 글은 시관(試官)들이 다 좋다고 일컬으므로 그도 그 문체(文體)는 취할 만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뒤에 유세기가 승복(承服)하였을 때에는 조대수가 이미 귀양갔으므로 다시 빙문(憑問)하지 않았다 합니다. 유신(儒臣)이 조박의 일을 인용하여 말하였으나, 일이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참작하여 처분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고, 제신(諸臣) 중에서 이언강·조태구·김만채(金萬埰)와 양사(兩司)의 이야(李壄)·김계환(金啓煥) 등은 다 줄곧 폐기하는 것은 억울하다 하였다. 이언강·조태구의 말은 다 ‘고 상(故相) 민진장(閔鎭長)이 스스로 등제(等第)를 쓰고 상소까지 하였으니 사정을 쓴 자취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조대수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제신이 말한 스스로 새로워질 길을 연다는 것은 옳으니, 서용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튿날 정사(政事)384) 에 곧 이언순을 전적(典籍)으로 승서(陞敍)하고, 조대수를 예빈 정(禮賓正)으로 삼았다.

삼가 살피건대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쓰는 것으로 말하자면, 글머리의 자호가 전통(傳通)되는 것보다 무엇이 더 크겠는가? 조대수가 이미 이것을 자복하였는데, 이제는 다만 등제를 쓴 것이 상시관(上試官)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 단정하여 사정을 쓰지 않은 증거로 삼았다. 대개 그때 윤홍리(尹弘离)·오도일(吳道一)유세기의 글 때문에 각각 소견을 주장하여 종일 서로 다투므로, 민진장이 조정하려고 스스로 그 등제를 썼을 뿐인데, 조대수는 그 사이에서 그 글이 취할 만하다고 힘껏 칭찬하였으니, 민진장이 끝에 가서 등제를 쓴 것이 어찌 조대수에게 사정이 없었다는 증거가 되겠는가? 그 말을 꾸며서 두루 엄폐하고 감심(甘心)하여 속이는 정상이 참으로 통탄스럽다. 더구나 조태구이언순의 하고(下考)를 탕척하는 일에 대하여는 다만 ‘이미 승륙(陞六)하라고 명하셨으니, 하고(下考)는 절로 탕척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다시는 품지(稟旨)하지 않았으니, 아! 무엄하다. 그 때의 거조(擧條) 가운데에서 대신이 지난(持難)한 말과 조태구의 절로 탕척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처음에는 모두 삭제하였는데, 임금이 도로 내려서 첨가하여 넣으라고 명하였으니 문득 그 방종(放縱)한 정상을 굽어 통촉하였음이 있는 것일까?


  • 【태백산사고본】 58책 50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10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행형(行刑) / 사법-재판(裁判)

  • [註 376]
    북성(北城) : 북한 산성(北漢山城).
  • [註 377]
    계복(啓覆) : 조선조 때 임금에게 상주하여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던 일. 1차 심리를 초복(初覆), 2차 심리를 재복(再覆), 3차 심리를 삼복(三覆)이라 함.
  • [註 378]
    의망(擬望) : 삼망(三望)의 후보자를 추천함. 삼망은 1인의 관원을 채용하는 데 문관(文官)은 이조(吏曹)에서,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3인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는 것으로, 임금은 그 중 1인에게 낙점(落點)하여 결정함.
  • [註 379]
    10고(十考) : 5년 동안에 관원의 근무 성적을 열 번 고사하던 일. 곧 5년의 임기를 말함.
  • [註 380]
    승륙(陞六) : 7품 이하의 벼슬아치가 6품에 오름.
  • [註 381]
    하고(下考) : 관리의 근무 성적을 고사(考査)함에 있어서 최하의 등제(等第)에 드는 것.
  • [註 382]
    단서(丹書) : 죄인의 죄명과 성명을 주서(朱書)해 놓은 문서.
  • [註 383]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 [註 384]
    정사(政事) : 벼슬아치의 임면·출척에 관한 사무.

○引見大臣、備局諸臣。 上日前以北城守臣及糧餉從速講定之意, 下敎筵中, 至是又因左議政金昌集之言, 命設行宮營建廳號, 郞廳亦以工、戶曹郞, 加出一員。 昌集曰: "啓覆當於九月內爲之, 而刑判尹德駿有病, 文書未易修整, 似當許遞。 否則啓覆似當差退。" 上命改差。 昌集又言: " 正卿中擬望苟簡。" 上命問于大臣, 從二品中擬望, 翌日大臣以工曹參判宋相琦, 末擬, 上不落點, 以首望李彦綱爲之。 吏判趙泰耉請以守令年限, 詢于大臣, 明白定式, 上曰: "堂下守令, 十考爲瓜限, 六十五歲差除, 則六十九歲當滿十考, 堂上守令, 五考爲瓜限, 六十七歲差除, 則六十九歲亦當滿五考矣。" 昌集曰: "然則堂下自六十六歲, 堂上自六十八歲, 不得除守令矣。" 上曰: "依此爲之。" 泰耉又曰: "前察訪李彦純, 沈屈下僚, 已二十三年。 渠十餘年杜門, 世稱自處之善, 合有疏滯之道。" 昌集曰: "彦純在謫時, 有所坐, 至今沈屈, 而變通恐無不可。" 上命陞六。 泰耉曰: "方在下考, 似當蕩滌。" 昌集曰: "蕩滌下考, 未知其可也。" 泰耉曰: "旣命陞六, 則下考自當歸於蕩滌。" 仍不復稟白。 修撰李世瑾曰: "趙大壽名在丹書, 【己卯科用情事也。】 十有二年。 十年則天道亦小變矣。 仁廟趙璞坐, 比此頗重, 而被配見釋, 終蒙甄敍。 今亦勿令終身廢棄, 以開自新之路, 似宜。" 昌集曰: "蓋聞大壽之招, 以沈益昌文頭兪世基字號, 見卽裂破等語, 自服。 又言兪世基之文, 諸試官皆稱善, 故渠亦言其文體可取, 其後世基承款時, 大壽已被謫, 故不復憑問矣。 儒臣引趙璞事爲言, 而事涉重大, 惟在參酌處分。" 諸臣李彦綱趙泰耉金萬埰、兩司李壄金啓煥等, 皆以一向廢棄爲冤。 彦綱泰耉之言, 皆曰故相閔鎭長, 自爲書等, 至於陳疏, 則可見其無用情之跡, 上以爲: "大壽不可謂無罪, 而諸臣所謂開其自新之路者是矣, 敍用可也。" 翌日政, 卽陞彦純爲典籍, 大壽爲禮賓正。 謹按科場用私, 孰有大於文頭字號之傳通者乎? 大壽旣以此自服, 而今乃只以書等之出於上試官, 斷爲其不用情之證。 蓋其時尹弘离吳道一, 以世基文, 各主所見, 終日相爭, 閔鎭長欲爲調劑, 自書其等而已。 大壽在其間, 力讃其文之可取, 則鎭長之末後書等, 豈可爲大壽無私之證耶? 其飾辭周遮, 甘心欺誣之狀, 誠可痛也。 況泰耉之於彦純, 蕩滌下考事, 只曰旣命陞六, 則下考自當蕩滌, 更不稟旨, 噫其無嚴矣。 其時擧條中, 大臣持難之言, 及泰耉自當蕩滌之說, 始竝刪沒, 上命還下添入, 抑有以俯燭其放縱之狀耶?


  • 【태백산사고본】 58책 50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10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행형(行刑) / 사법-재판(裁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