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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0권, 숙종 37년 8월 17일 갑술 2번째기사 1711년 청 강희(康熙) 50년

판중추 이이명의 양역 변통에 대한 차자

일전에 판중추(判中樞) 이이명(李頤命)이 양역(良役)의 변통하는 일로 순문(詢問)하라는 명을 받고 차자(箚子)를 올려, 정포(丁布)가 가장 편리함을 따로 조목을 갖추어 말하되, 먼저 권계(勸戒)하는 말을 올리니, 대략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논하는 자는 씀씀이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첫째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접때 유신(儒臣)이 사대부(士大夫)의 사치하는 풍조를 금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은 옳으나, 이는 또한 성명(聖明)께서 검약을 밝히고 청렴을 장려하여 일세(一世)를 이끌어 사대부가 화려한 옷을 부끄러워하고 높고 밝은 집을 꺼리게 하시면 백성이 바람에 풀 쓰러지듯 절로 감화(感化)할 것이니, 어찌 신칙(申飭)하기를 기다려서야 그치겠습니까? 옛말에 ‘사치의 해독은 천재(天災)보다 심하다.’ 하였으니, 천하의 일은 그 근본을 헤아리지 않고 그 말단을 다스리는 것은 없습니다. 전하께서 한 번 검약을 밝힘으로써 백성의 폐단이 고쳐질 수 있고 사치한 풍속이 변할 수 있을 것이니, 신(臣)이 씀씀이를 절약하는 것을 앞세우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고, 그 조목에는,

"두 대신(大臣)과 조태구(趙泰耉)가, ‘외방(外方)에 엄하게 신칙하여 교생(校生) 이하 제색(諸色)으로서 모루(冒漏)346) 한 자를 찾아내어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의 대신으로 채울 것’을 아뢴 것은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폐단도 줄겠으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것은 근본을 뽑고 원천을 막는 것이 아니고, 오래도록 이로운 것도 아니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필(匹)을 내는 신역(身役)은 참으로 천하 만고(天下萬古)에 없던 것이고, 군역(軍役)이라는 명목으로 가혹하게 거두는 것도 천하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이제 모루한 제색으로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의 수를 채울 수 있다면 이웃이나 겨레붙이의 원망은 당장에 조금 펼 수 있겠지만 한 사람이 두 필을 내는 데에 대한 원망은 어느 때에 그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에 앞서 국가에서 여군(餘軍)을 찾아내고 단졸(團卒)347) 을 줄여서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의 수를 채운 일은 전에도 있었지만, 수년이 못 가서 그 폐단은 여전하였습니다. 오늘날 과연 남김없이 찾아내더라도 모루한 자의 수가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의 수와 맞을는지 또한 어찌 알 수 있겠으며, 한가히 놀던 자를 찾아내더라도 그들이 어찌 즐거이 종사하겠습니까? 작은 변통과 작은 보탬은 되겠으나, 끝내 그 실효가 있는 것은 보지 못할 것입니다.

김우항(金宇杭)·박권(朴權)은 다 호포(戶布)를 주장하였는데, 호포의 의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므로 신도 이해(利害)를 자세히 생각하였으나, 불편한 꼬투리가 없지 않습니다. 호(戶)마다 포(布)를 거두면 간사한 백성이 두세 호를 합하여 한 호로 만들 것이니, 호가 줄면 포도 줄 것이며, 군정(軍丁)이 있는 호마다 한 필을 내면 지나치겠습니다. 세 등급으로 나누려 하면 20구(口) 이상을 상호(上戶)로 하고 10구 이상을 중호(中戶)로 하며 그 아래를 하호(下戶)로 해야 할 것이니, 많고 적은 것이 정연(井然)하게 고르지 못할 것이며, 빈부(貧富)에 따라 차등을 두려 하면 또한 살펴서 정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세 등급을 다 한 필로 하면 구별이 없을 뿐 아니라 경용(經用)에 모자랄 것입니다. 중호를 두 필로 하고 상호를 세 필로 하면 경용에 넉넉하겠으나, 세 필은 너무 많지 않겠습니까? 유봉휘(柳鳳輝)가 아뢴 양포(良布) 한 필이라는 말은 신역에 비하여 포가 반으로 줄고 명목도 천(賤)하지 않으며 균등하여 시끄러움이 없을 듯합니다마는, 지금 신역에 종사해야 할 양정(良丁)에게 모두 한 필씩 줄이면, 보통 때 두 필도 모자랐는데, 한 필로는 반드시 경용에 모자랄 것입니다. 전에 한가히 놀던 무리에게서 양포를 거두려 하면, 우리 나라의 풍속은 사람에 차등이 많아서 사족(士族)이 있고 품관(品官)이 있고 한산(閑散)이 있고 군관(軍官)·교생(校生)이 있으므로, 어느 등급으로 한정하여야 적당할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두 가지 말에는 다 막히는 것이 있으므로 반드시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신은 구전(口錢)으로 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생각합니다. 삼대(三代)348) 이후로는 한(漢)나라가 가장 고대에 가까운데, 고제(高帝)는 사책(史冊)에 그 규모가 넓고 멀다고 일컬었으니, 후세에서 본뜰 만한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한나라의 법은 15세부터 65세까지의 백성을 정(丁)으로 하고, 정은 부전(賦錢) 1백 20문(文)을 냈는데, 이때부터 역대(歷代)에서 이를 따랐고, 그 수를 증감하는 일이 있긴 해도 모두 구(口)에 따라 부(賦)를 내었습니다. 이제 청인(淸人)까지도 무은(畝銀)·정은(丁銀)의 명목이 있으니, 황조(皇朝)349) 의 옛 제도를 따라 쓰는 것입니다. 구에 따라 부를 내는 것은 삼대의 글에 보이지는 않으나 한나라 이후로 천하에서 시행하여, 성정(成丁)350) 인 자는 부를 내고 노약(老弱)한 자는 면제하였는데, 그 법이 매우 조리가 있어서 몸이 있는 자라면 부가 있으므로 차등이 없습니다. 오늘날 아뢴 세 가지 의논에 비교하여 보면, 신역 두 필에 비하여 4분의 3이 덜하며, 양포 두 필에 비하여도 반이 덜하고, 호포에 비하여 대등한 호가 고르지 않은 폐단이 없습니다. 또 수십·수백 구(口)의 호(戶)일지라도 노비는 천구(賤口)라 하여 면하고, 양인(良人)만은 부자 형제가 같이 산다 하여 성정인 자는 부를 내게 되니, 인가(人家)에서 부를 내야 할 자는 많아야 예닐곱 정에 지나지 않으므로 지금의 군역법(軍役法)에 따라 다섯에서 하나를 면하면 한 집에 부를 내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한나라의 법은 남자·여자가 다 부를 내나, 우리 나라의 풍속은 천구(賤口) 외에 여자는 역(役)이 없으므로 지금 부를 내게 할 수 없지만, 출가하면 지아비의 부를 도우므로 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각각 60문(文)을 내는 것이 되니, 한나라 때에 비하여 또한 가볍습니다. 그 밖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정이면 역역(力役)하는 사람이 되니, 비록 매우 가난하더라도 땔나무를 팔고 짚신을 팔아서 이것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족(士族) 이하 한가히 노는 무리가 각각 전에 없던 부를 내게 되면 반드시 원망하는 말이 있을 것이니, 전부터 호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오로지 이 무리가 헛된 의논을 격렬히 선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조금 사리를 아는 자는 마찬가지로 임금의 백성인데 나만 어찌 편안하겠느냐고 생각하여 원망하지 않고, 전에 군역을 꺼리던 자는 조금 쓰는 것은 있더라도 뒷 근심은 아주 없으므로 원망하지 않는데, 완강하고 무리한 자만이 원망할 것이니, 이것이 오히려 백골(白骨)·황구(黃口)의 원망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1. 이 법을 시행한다면, 그 가운데에도 부를 낼 수 없는 자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공사(公私)의 천구와 충신·효자·열녀 및 공신(功臣)의 적장(嫡長)과 종친(宗親)·문관(文官)·무관(武官)의 2품(品) 이상과 노약·병폐(病廢)·유개(流丐)351) ·유장(柳匠)352) ·포척(鮑尺)353) 과 부모의 나이가 여든인 자와 당번(當番)하거나 장정(長征)하는 군졸은 다 부를 면제해야 할 것입니다.

1. 한나라 때에는 명목을 구전이라 하였으나, 이제는 고쳐서 정포(丁布)라 칭해야 할 듯합니다. 성정(成丁)이 되어 부를 내므로 정(丁)이라 하고, 포(布)로 바칠 수 있으므로 포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전(錢)은 관가에서 나오는데, 구리[銅]는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므로 해마다 수백만 관(貫)을 내도록 요구할 수 없으나, 포는 토산(土産)으로 백성에게서 나오니, 한때에 많이 장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포 한 필을 내면 합하여 전(錢) 2백 40문이니, 곧 근년에 포 한 필의 대전(代錢)을 1냥 5전으로 정식(定式)을 한 것과 서로 비슷합니다. 같이 사는 2정(丁), 4정은 힘을 합하여 함께 포를 바치고, 1정 또는 3정 중의 1정은 각각 부전(賦錢)을 바치되 단정(單丁)인 두 호(戶)가 다 함께 포를 바치기를 바라면 허가하며, 연강(沿江)·연해(沿海)의 작미(作米)354) 는 군포(軍布)의 예(例)에 따라 숙위(宿衛)하는 군졸을 먹이면, 막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1. 이 법이 시행될 수 있다면, 경외(京外)에 신칙(申飭)하여 누적(漏籍)된 자를 처벌하는 법을 더 엄하게 해야 하겠으나, 양민(良民)이 그 역이 쉬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 엄하게 하지 않더라도 자수(自首)할 것입니다. 또 어미의 역을 따르는 법을 다시 시행하여 양구(良口)가 늘게 하면 오래 시행하여도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1. 이 법이 시행될 수 있다면, 먼저 이번 식년(式年)의 장적(帳籍)에서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정(男丁)을 셈하여 그 중에서 부역을 면제해야 할 자를 제외하고, 또 본병(本兵)355) ·삼군문(三軍門)356) ·제각사(諸各司)와 외방의 감영(監營)·병영(兵營)·통영(統營)·수영(水營)·방영(防營)357) ·각 진보(鎭堡)의 모든 신포(身布)를 용도(用度)로 한 것을 살펴서 수량을 헤아려 각각 남겨두고, 그 나머지는 항식(恒式)을 정하여 그 총수(總數)를 받아들여야 할 정포(丁布)의 수와 비교하여 알맞고 모자라는 것을 보고, 따로 한 아문(衙門)을 두어 선혜청(宣惠廳)처럼 그 분파(分派)하고 출입(出入)하는 것을 구관(勾管)하며, 대동(大同)358) 을 상납하는 예(例)처럼 선가(船價)·마가(馬價)를 원수(元數)에서 덜어내고 해마다 남는 수가 있거든 따로 저축하여 수재(水災)·한재(旱災)·전쟁 등 불시에 쓰이는 것에 대비하고, 저축이 더욱 많아지면 서한(西漢) 때의 옛일에 따라 때때로 그 부(賦)를 감면하는 것이 참으로 편리하겠습니다.

1. 이 법이 시행될 수 있다면, 병제(兵制)는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금위영·어영청 두 영문(營門)에서 죄다 상번(上番)하더라도 훈국(訓局)359) 까지 합하여 5, 6천 인을 넘지 않으니, 숙위의 수가 적어서 한심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기병(騎兵)·보병(步兵)과 삼군문의 호수(戶首)·보인(保人)을 합하여 장정 30만 명을 정밀하게 뽑아서 군문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번(番)마다 모두 1만 인을 징발하면 수가 적을 걱정이 없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군(漕軍)·수군(水軍) 이외의 기병·보병·속오(束伍)360) ·신선(新選) 등 여러 가지 병명(兵名)이 있는 자와 각 고을의 신역이 있는 보인은 모두 폐지하고, 선군(選軍) 30만 명 안에서 상번하는 자는 그 해의 부를 면제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3분의 1을 감면하여 세 사람이 한 필의 포(布)를 내게 하면, 한정(閑丁)에 비하여 조금 가벼워지고 상번하는 자에 비해서는 구별이 있을 것입니다. 당(唐)나라 두목(杜牧)361) 이 군사를 논하기를, ‘번상(番上)보다 좋은 것이 없고 장정(長征)보다 좋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제 외방의 정장(精壯)한 자를 정선하면 훈국의 군사도 점차 번상하는 군사로 바꾸어 장정의 폐단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선군 중에서 상번하지 않는 자는 각도의 병사(兵使)를 시켜 일이 없으면 봄·가을로 조련(操鍊)하고 일이 있으면 거느리고 근왕(勤王)하게 할 것입니다. 대략 이렇게 하면 절목(節目)은 일을 맡은 자가 익히 강구하고 살펴서 정할 것이니, 지금 상세히 논할 것 없습니다.

1. 예전에는 군사를 농민에 붙였으며, 후세에서는 농민이 군사를 급양(給養)하고 군사가 농민을 지켰는데, 이제는 군사를 급양하는 방도를 오로지 정포(丁布)에 의지하니, 혹 모자랄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예전에 태공(太公)제(齊)에 봉해져서 어염(魚鹽)으로 천하에서 부강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에 닿았으므로 어염의 이익이 많지 않다 할 수 없으나, 임진란 이후로 제궁(諸宮)·각사(各司)와 세가(勢家)·토호(土豪)가 섬을 나누어 차지하고 각각 어장(漁場)을 세놓아 사사로이 그 이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이것도 역대(歷代)에는 없던 일이니, 이제 죄다 대농(大農)에게 돌려서 양병(養兵)을 돕게 하는 것이 또한 편리하겠습니다.

1. 이 법이 시행되면, 원망하는 자는 적고 기뻐하는 자는 많을 것이니, 대개 강족(强族)만이 감히 빠질 수 없고 하호(下戶)가 매우 치우치게 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거두는 것은 적고 부역은 고르며, 법은 매우 간명(簡明)하고 이익은 매우 큽니다. 또 전토(田土)가 있는 자는 세(稅)가 있고 몸이 있는 자는 포(布)가 있으므로 백성에게는 일정한 역(役)이 있고 나라에는 상례로 받는 재물이 있으며, 한정(閑丁)에게는 여유가 있고 투사(鬪士)는 절로 훨씬 넉넉하며, 민역(民役)은 이미 줄고서도 국용(國用)은 절로 넉넉할 것입니다."

하고, 그 아래에 또,

"우리 나라 양역(良役)의 신포(身布)는 당초에 법을 제정한 것이 반드시 이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는 나라의 큰 정사에 관계되니, 《실록(實錄)》에 실려 있는 것에서 시말(始末)을 아울러 살필 수 있다면, 변통할 때에 의지하여 보태는 것이 있을 만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강도(江都)362) 에 있는 《실록》을 사관(史館)으로 옮겨서 한 본(本)을 베껴 내게 하여 본관(本館)이나 북한(北漢)에 두어 뒷날에 살펴보기 쉽게 하되, 먼저 군국(軍國)에 관한 법제(法制)의 연혁(沿革)을 살펴 내어 위와 같은 몇 가지 일은 분류하여 권(卷)으로 만들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에 계하(啓下)하였다. 임금이 누누이 차자(箚子)로 아뢴 데에서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볼 수 있다고 답하고, 묘당(廟堂)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우의정(右議政) 조상우(趙相愚)가 또 차자(箚子)를 올려 그 불편을 논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법은 옛날에 시행했어야 할 것이고 오늘날에는 시행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의 규모와 명분이 징포(徵布)하는 법을 중하게 여기며, 납전(納錢)하는 규례는 평민에게만 미치고 사족(士族)에게 미치지 않은 지 이제 수백 년이나 되었는데, 더구나 전의 일로 말하면 일찍이 태종(太宗) 때에 고려말의 호포법(戶布法)을 특별히 명하여 폐지하셨으니, 성의(聖意)를 대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폐단을 범연히 논하면 참으로 치우치게 무거워서 고르지 않겠으나, 그 진실을 천천히 구명하면 상하가 오히려 유지할 수 있고 기강이 오히려 매우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은 반드시 사족(士族)에게 이 근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인심·세도(世道)가 날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가는데,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새 법을 만들어 전에 역(役)이 없던 사족에게서 포(布) 또는 전(錢)을 섞어 거둔다면, 반드시 물고기가 놀라고 새가 흩어지며 솥의 물이 끓는 듯이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바쳐야 하는데 바치지 않는 것을 극진히 독촉할 때에, 마지 못하여 가두고 매로 때리는 것이 서민에게 하는 것과 구별이 없게 된다면, 유식한 사족은 오히려 혹 영을 받들겠으나, 이따금 강경하여 순종하지 않는 무리가 있어서 위를 공경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만을 품고서 백성을 속이고 한 지방을 선동한다면, 뒷일을 잘 수습할 방책이 없어서 반드시 서제(噬臍)363) 의 뉘우침이 있을 것이니, 구법(舊法)을 더욱 밝혀 잡역을 바로 잡고 양정(良丁)을 널리 찾아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으로 하여금 그 일을 맡아서 경조(京兆)364) 의 판적(版籍)을 상세히 살펴 여러 가지 역명(役名)을 베껴 내게 하여 의거하여 맞추어 볼 바탕을 삼고, 각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낱낱이 베껴서 신보(申報)하게 하되 사실대로 신보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많고 적음에 따라 특별히 논하여 벌하고, 수령(守令)을 차출하여 보낼 때에는 반드시 강명(剛明)하여 일을 처리할 만한 자를 가려서 간사한 백성이 속이는 자취를 살피고 교활한 서리(胥吏)가 뇌물을 받는 길을 막으며 편리한 방법으로 찾아내어 일체 이름을 적어서 보충하게 하되, 혹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부족한 액수를 셈하여 곧 편배(編配)365) 하는 율(律)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나라에는 크게 경장(更張)하는 일이 없고, 백성은 크게 놀라 소요하는 걱정이 없으며, 이웃이나 겨레붙이에게서 억지로 거두는 폐단은 이때부터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또 차자로 아뢴 일은 나라를 위하여 깊이 생각한 데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매우 마땅하다고 답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때 임금은 뜻을 돋우어 양역(良役)의 폐단을 고치려 하였으나, 묘당의 의논이 분열되어 각기 소견을 주장하였으므로, 이제까지 십수 년이 되어도 아직 한 명령을 내거나 한 방책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식견이 있는 자가 한탄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8책 50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0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군사-군역(軍役)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역사-편사(編史) / 역사-전사(前史)

  • [註 346]
    모루(冒漏) : 법을 어겨 신역 등에서 빠짐.
  • [註 347]
    단졸(團卒) : 민병(民兵).
  • [註 348]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349]
    황조(皇朝) : 명나라.
  • [註 350]
    성정(成丁) : 성년이 된 장정.
  • [註 351]
    유개(流丐) : 떠돌며 빌어 먹는 사람.
  • [註 352]
    유장(柳匠) : 고리장이.
  • [註 353]
    포척(鮑尺) : 물속에 들어가서 전복을 따는 사람.
  • [註 354]
    작미(作米) : 갈음하여 쌀로 바꾸어 만듦.
  • [註 355]
    본병(本兵) : 병조(兵曹).
  • [註 356]
    삼군문(三軍門) : 훈련 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 [註 357]
    방영(防營) : 방어사영(防禦使營).
  • [註 358]
    대동(大同) : 선조조 이후 각 지방에서 바치던 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내게 하던 것. 대동미(大同米).
  • [註 359]
    훈국(訓局) : 훈련 도감.
  • [註 360]
    속오(束伍) : 조선 선조(宣祖) 때 창설된 군대 조직. 지방의 신역(身役)이나 벼슬이 없는 15세 이상의 양민(良民)·양반(兩班)의 자제를 골라 조직하여 평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게 하고, 조련(操鍊) 때와 유사시에는 군역을 치렀음.
  • [註 361]
    두목(杜牧) : 당나라 후기의 시인.
  • [註 362]
    강도(江都) : 강화부(江華府).
  • [註 363]
    서제(噬臍) : 궁지에 빠진 사향 노루가 그 배꼽의 사향 때문이라고 해서 배꼽을 물어뜯으려 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후회하여도 이미 늦음을 비유하는 말.
  • [註 364]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 [註 365]
    편배(編配) : 유배 죄인을 배치하는 것.

○日前, 判中樞李頤命, 以良役變通事, 承詢問之命, 上箚言, 丁布之最便, 別具條目, 而先進勸戒之說。 略曰:

自古論爲邦者, 莫不以節用愛民, 爲第一。 頃日儒臣請禁士夫之侈風, 其言是矣, 而此亦在聖明昭儉奬廉, 導率一世, 使士大夫, 恥華美之服, 畏高明之室, 則下民自化於風草, 何待申飭而後止也? 古語云: "奢侈之害, 甚於天災。" 天下之事, 未有不揣其本而齊其末者。 殿下, 一昭儉而民弊可革, 侈風可變。 臣以節用爲先者, 此也。 其目曰, 兩大臣及趙泰耉所陳, 嚴飭外方, 搜括校生以下諸色, 冒漏以充逃故之代云者, 事不張大, 弊亦減歇, 而臣愚以爲, 此非拔本塞源, 又非長久之利也。 一人二疋之役, 誠天下萬古之所無也, 名以軍而虐斂者, 亦天下萬古之所無也。 今以諸色冒漏, 能充其逃故, 則隣族之怨, 可以少紓於目前, 一人二疋之怨, 何時可已乎? 況前此朝家, 搜餘軍減團卒, 以補逃故者, 曾亦有之, 而不出數年, 其弊自若。 設令今日果能搜補無餘, 冒漏者之數, 恰當於逃故, 亦何可知也, 閑遊者被搜, 其可樂從乎? 謂之小變小益則可也, 終未見其有實效也。 金宇杭朴權, 俱以戶布爲主。 戶布之議, 其來已久, 臣亦細思利害, 不無不便之端矣。 逐戶收布, 奸民將合二三爲一戶, 戶縮則布亦縮矣, 軍丁之戶, 一疋則過矣。 欲分三等, 則當以二十口以上爲上戶, 十口以上爲中戶, 其下爲下戶, 多寡不能井井均齊矣, 欲以貧富差等, 則亦難審定矣, 三等俱一疋, 則不但無別, 必不足於經用矣。 中戶二疋, 上戶三疋, 則雖足於經用, 三疋不已多乎? 柳鳳輝所陳良布一疋之說, 比身役布減其半, 名亦不賤, 似若均齊無騷, 而但以卽今應役良丁, 俱減一疋, 則常時二猶不足, 一疋必不足於經用。 欲加(歛)〔斂〕 良布於曾前閑游之輩, 則國俗人多差等, 有士族焉, 有品官焉, 有閑散焉, 有軍官、校生焉, 未知限以何等, 方可適宜乎? 二說俱有窒礙, 正宜商量。 臣則最以口錢爲勝。 三代以後, 西漢最近於古, 高帝史稱其規模宏遠, 後世之所可效者, 不其在是乎? 律民年十五, 至六十五爲丁, 丁出賦錢一百二十文。 自此歷代因之, 雖增損其數, 無不逐口以賦。 雖今淸人, 亦有畝銀、丁銀之名, 遵用皇朝舊制也。 逐口以賦, 雖不見於三代之文, 自以後, 天下行之。 成丁者出賦, 老弱免焉, 其法極有條理, 有身者有賦, 無有差等。 以今日三者之議參看, 則比身役二疋, 減其四之三, 比良布二疋, 又減其半, 比戶布, 無等戶不均之弊。 且雖數十百口之戶, 奴婢以賤口而免, 獨良人以父子、兄弟之同居, 而成丁者賦焉, 計人家應賦者, 多不過六七丁, 依今軍役之法, 五免其一, 一家出賦者無多。 法男女俱賦, 而國俗, 賤口之外, 婦人無役, 今不可出賦, 而出家則助夫之賦, 是爲一男一女, 各出六十文, 比又輕。 其外一男一女成丁, 則爲力役之人, 雖甚貧殘, 賣柴販履, 猶可辦此矣。 然士族以下閑游之類, 各出無前之賦, 必有怨言。 從前戶布之不成, 亶由此輩之激扇浮議耳。 其中稍識事理者, 以爲均是王民, 我何獨逸, 不以爲怨, 曾畏軍役者, 雖有小費, 永無後患, 不以爲怨, 獨强梁無賴者, 以爲怨, 此不猶愈於白骨、黃口之怨乎? 一, 此法若行, 則其中亦多有不可出賦者。 公私賤口、忠臣、孝子、烈女及功臣嫡長、宗親、文武二品以上、老弱、病廢、流丐、柳匠、鮑尺及父母年八十者、當番及長征軍卒, 俱當免賦矣。 一, 時雖名以口錢, 今則似當改稱丁布。 成丁而出賦, 故謂之丁, 可賦以布, 故謂之布。 蓋錢出於官, 而銅非國産, 不可每歲責出數百萬貫矣, 布則土産, 而出於民, 一時可以多辦矣。 今使二人共納布一疋, 則合錢二百四十文, 是與近年定式布一疋代錢一兩五錢者, 相近。 同居二丁、四丁, 合力共賦布, 一丁及三丁之一, 各賦錢, 單丁兩戶, 俱願共賦布, 許之, 沿江沿海作米, 依軍布之例, 以餉宿衛軍卒如是, 可無窘礙矣。 一, 此法如可行, 則當申飭京外, 更嚴漏籍之律, 而良民若知其役之當歇, 雖不嚴, 當自首矣。 又復行從母役之法, 使良口增多, 可以久行無弊矣。 一, 此法如可行, 則當先取今式年帳籍, 計其男丁十五以上, 六十以下, 除其當免賦役者, 又査本兵、三軍門、諸各司、外方監ㆍ兵ㆍ統ㆍ水ㆍ防營、各鎭堡, 凡以身布爲用度者, 裁量多寡, 各存贏餘, 定其恒式, 以其摠數, 較諸丁布當納之數, 以觀其足不足, 別設一衙門, 如惠廳句管, 其分派出入, 除出船、馬價於元數, 如大同上納之例, 每年如有餘數, 別爲儲蓄, 以備水旱、兵革不時之用, 蓄積滋多, 依西漢故事, 時蠲其賦, 允爲便益。 一, 此法如可行, 則兵制不可不變。 卽今禁、御兩營, 雖盡數上番, 通訓局不過爲五六千人, 宿衛之單弱, 可爲寒心。 今合騎ㆍ步兵、三軍門戶ㆍ保, 精選丁壯三十萬, 分隷於軍門, 每番合徵萬人, 可無單弱之虞矣。 漕、水軍外, 騎ㆍ步ㆍ兵, 束伍、新選等諸色有兵名者, 及各邑保人有身役者, 一倂罷之, 選軍三十萬內上番者, 免其年之賦, 其餘竝減三之一, 三人共一布, 比閑丁則稍輕, 比上番者則有別矣。 杜牧之論兵曰: "莫善於番上, 莫不善於長征。" 今若精選外方精壯, 則訓局兵, 亦宜漸次變爲番上之卒, 以除長征之弊矣。 選軍之不上番者, 則令各道兵使, 無事則春秋操鍊, 有事則領率勤王。 大略如斯節目, 則當事者當熟講審定, 今不必細論。 一, 古者兵寓於農, 後世農養其兵, 兵衛其農。 今則養兵之具, 專靠於丁布, 或不無不足之患。 昔太公封於, 以魚鹽富强於天下。 我國三陲際海, 魚鹽之利, 不爲不多, 而壬辰亂後, 諸宮、各司及勢家、土豪, 分占島嶼, 各稅漁場, 私擅其利。 此亦歷代之所未有也。 今宜盡歸大農, 以助養兵, 亦爲便益。 一, 此法之行, 怨者少而悅者多, 蓋强族不敢獨漏, 下戶不至偏苦。 其取財也寡, 賦役也均, 法至簡而利甚博。 且有田者此有稅, 有身者此有布, 民有一定之役, 國有常賦之財, 閑丁有餘, 而鬪士自倍, 民役旣減, 而國用自足矣。

其下又以爲我國良役身布, 其初制法, 必不如是, 此係國之大政, 當載實錄, 若能竝考源委, 通變之際, 可有資益矣。 仍請移安江都實錄於史館, 令謄出一本, 藏于本館或北漢, 以爲後日易考之地, 先令考出軍國法制之沿革, 如上數件事者, 分類作卷, 啓下備局。 上答以縷縷箚陳, 可見憂國之忱。 令廟堂稟處。 至是, 右議政趙相愚又箚論其不便曰:

臣愚竊以爲, 此法惟當行之於古, 不當行之於今。 何者, 我國規模,名分爲重, 徵布之法, 納錢之規, 只及於平民, 不及於士族, 今已累百年。 況以前事言之, 曾於太宗朝, 季戶布之法, 特命停罷, 聖意所在, 槪可以想矣。 今若泛論其弊, 則誠爲偏重而不均, 徐究其實, 則上下之尙能維持, 綱紀之猶不甚亂, 未必不由於士族之無此患也。 況今人心世道, 日趨於莫可收拾之域, 而不量時勢, 猝創新法, 或布或錢, 混徵於曾前無役之士族, 則必將魚駭鳥散, 所在鼎沸。 至於當納不納, 十分催督之時, 不得已拘囚鞭扑, 與庶民無別, 則有識之士, 猶或奉令, 而間有强梗不率之徒, 不思親上之義, 徒懷怨國之心, 詿誤百姓, 煽動一方, 則將無善後之策, 而必有噬臍之悔。 莫如申明舊法, 釐正雜役, 廣搜良丁之爲愈也。 宜令備局堂上, 掌其事, 細考京兆版籍, 謄出諸色役名, 以爲憑準之地, 移關諸道, 使之一一謄報, 如有不以實報者, 從其多少, 別樣論罰, 守宰之差遣也, 必擇其剛明可辦事者, 察奸民詐僞之迹, 杜猾吏受賕之路, 方便搜討, 一切簽補, 或有不能擧職者, 亦計闕額之數, 輒施編配之律。 果能如此, 則國無大更張之擧, 民無大驚擾之患, 侵徵隣族之弊, 從此可祛。

上又以箚陳之事, 出於爲國深思, 誠甚得宜爲答, 令廟堂稟處。 時, 上銳意欲革良役之弊, 而廟謨分裂, 各主所見, 至今十數年, 尙未能發一令施一策, 識者恨之。


  • 【태백산사고본】 58책 50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40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군사-군역(軍役)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역사-편사(編史)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