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반사 유집일·평안 감사 이제·참핵사 송정명이 위원의 사관 일로 봉계하다
접반사(接伴使) 유집일(兪集一)·평안 감사(平安監司) 이제(李濟)·참핵사(參覈使) 송정명(宋正明) 등이 5월 27일에 봉계(封啓)하기를,
"사관(査官)이 위원(渭原)에 도착하여 이른 아침에 필첩식(筆帖式)263) 1인과 봉성(鳳城)의 장경(章京)264) 1인으로 하여금 정범 죄인(正犯罪人)을 거느리게 하여 오로량(吾老梁) 땅의 살해(殺害)한 곳으로 가서 심사(審査)하고 오후(午後)에 돌아왔습니다. 살해한 지방이란 이편의 오로량(吾老梁)과 저편의 조유덕(照踰德)인데, 모두 자세히 살펴 조사(調査)하여 기록하고 와서는 또 말하기를, ‘이제 마땅히 곧 강계(江界)로부터 다시 경원(慶源)으로 나가겠으니, 강계의 지로인(指路人)265) 을 모름지기 정하여 보내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연강(沿江)은 지로인(指路人)을 비록 정하여 보내더라도 북로(北路)는 결단코 지정(指定)하여 보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개 사관(査官)이 연강(沿江)의 길을 경유하지 않고 우리 내지(內地)로 향하려고 하니, 그의 지향(指向)하는 뜻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연강을 경유하지 않고 우리 내지를 경유하는 것은 이른바 피차(彼此)의 땅을 걸치어 넘어서 강변(江邊)을 참작 심사한다는 말과 서로 어긋납니다. 재신(宰臣)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정(朝廷)에 빨리 계문(啓聞)하여 중국에 이자(移咨)하겠다는 뜻으로 반복(反復)하여 알아듣도록 잘 타일러서 기필코 중지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초 1일에 또 봉계(封啓)하였는데, 송정명(宋正明)의 봉계에 이르기를,
"어제 오후(午後)에 처음으로 개좌(開坐)하여 죄인(罪人)들을 잡아들여 자세하게 캐어 물었더니, 전번의 공초(供招)와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신이 이르기를, ‘전후(前後) 죄인의 초안(招案)과 사관(査官)의 의주(議奏)를 모두 내어보였으니, 본국(本國)에 돌아가 보고하겠는가?’ 하였더니, 사관(査官)이 대답하기를, ‘의주(議奏)는 경원(慶源)에 도착하여서 문안(文案)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본국의 문안으로써 돌아가 아뢰겠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북도(北道)의 길을 끝내 지시(指示)하지 않으니, 이 일을 결정(決定)하기 전에는 결코 완전하게 조사할 수 없다.’고 하고는, 또 자문(咨文) 1통[度]을 내어 보이기 때문에 그 자문을 우선 봉진(封進)합니다."
하였다. 유집일(兪集一) 등은 봉계(封啓)하기를,
"사관(査官)이 곧바로 강계(江界)에 가서 다시 폐사군(廢四郡)으로 돌아 들어갈 뜻으로 여러 번 역관(譯官)들에게 말하였는데, 이에 대답하기를, ‘강계는 본시 내지(內地)이기 때문에 결코 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고 이틀 동안을 서로 버티니, 28일 늦게서야 부드러운 말로 통보해 오기를, ‘진실로 그렇다면 내 마땅히 강계로 가지 않고 모레 만포(滿浦)에 가서 앞길이 험준한가 순탄한가를 관찰하여, 만일 갈 수 없을 것 같으면 다시 의논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하고, 또 도차사원(都差使員)을 불러 의주(義州)로부터 폐사군(廢四郡)과 삼갑(三甲)266) ·육진(六鎭)에 이르는 연변(沿邊)의 파수(把守)와 지방의 원근(遠近)을 상세하게 써 오라고 일렀다 하기에, 본도(本道)의 파수는 단지 지명(地名)만을 기록하고 북로(北路)는 아주 멀어서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핑계하여 삼갑·육진의 군명(郡名)만을 써서 주었습니다. 사관(査官)이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는 북청(北靑)으로부터 육진(六鎭)을 통행(通行)한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내 보이지 않느냐?’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여기는 내지(內地)이기 때문에 논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또 북청(北靑)은 결단코 써 줄 수 없다고 말하였더니 사관(査官)이 성을 내고는 이내 한정없이 그대로 머무르겠다는 등의 말로써 공갈(恐喝)하여 경동(驚動)케 하는 계략을 썼습니다. 그가 내 보인 자문(咨文)은 곧 총관(摠管) 목극등(穆克登)의 자문이었습니다. 그 머릿말에 ‘흠차 대인(欽差大人) 목(穆) 등은 황상(皇上)이 유시(諭示)하는 일을 공손히 받든다.’고 일컬었는데, 그 말에 대략 이르기를, ‘너희들은 조선국(朝鮮國)의 관원(官員)을 대동(帶同)하여 장차 살인(殺人)한 곳을 명백하게 조사하여 해당 국왕(國王)에게 교부(交付)하여 완결(完結)하고, 그 연강(沿江)의 일대(一帶)는 다시 몰래 넘어 출입(出入)하는 길이 있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희들이 또한 가서 조사하여 밝히도록 하라.’ 하고, 하단(下端)에 ‘위는 조선 국왕(朝鮮國王)에게 자(咨)한다.’고 썼습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올려 보낸 자문(咨文)의 머릿말에 ‘흠차 대인(欽差大人)’으로 일컬었는데, 하단(下端)에 조정(朝廷)에 이자(移咨)한다고 말한 것은 해괴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전에 사명(使命)이 비록 간혹 이자(移咨)함이 있었어도 그 직명(職名)을 예거(例擧)하고 일찍이 대인(大人)으로 자칭(自稱)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 자문은 해부(該部)에서 봉지(奉旨)한 것과 다른 데도 지금까지 없었던 식례(式例)를 써서 스스로 거만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받지 않았어야 하는데 몽연(矇然)히 올려보냈습니다. 접반사(接伴使)와 감사(監司)가 이미 한 곳에 있으면서도 능히 함께 의논하여 선처(善處)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송정명(宋正明)은 우선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유집일(兪集一)과 이제(李濟)도 또한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50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98면
- 【분류】외교-야(野)
- [註 263]필첩식(筆帖式) : 청조(淸朝)의 관아에서 봉직(奉職)하던 서기.
- [註 264]
장경(章京) : 청대 만주 지방의 관직 명칭의 한 가지로, 문서를 관장함.- [註 265]
지로인(指路人) : 길을 안내하는 사람.- [註 266]
삼갑(三甲) : 삼수(三水)와 갑산(甲山).○接伴使兪集一、平安監司李濟、參覈使宋正明等, 五月卄七日封啓以爲:
査官來到渭原, 早朝令筆帖式一人、鳳城章京一人, 率正犯罪人, 往審吾老梁殺害處, 午後回還。 所謂殺害地方, 此邊吾老梁, 彼邊照踰德, 竝看審記錄以來。 又言: "今當卽從江界, 轉向慶源, 江界指路人, 須爲定送。" 答以沿江指路人, 雖定送, 而北路則決不可指送。 蓋査官, 不由沿江之路, 欲向內地, 指意叵測。
備局啓以不由沿江, 而由內地, 與所謂跨越彼此, 參審江邊之說, 相左。 令宰臣、道臣, 以馳聞朝廷, 移咨上國之意, 反復開諭, 期於寢止。 初一日, 又爲封啓。 正明之啓以爲:
昨日午後, 始爲開坐, 罪人等拿入盤問, 與前招無異。 臣謂曰: "前後罪人招案及査官議奏, 竝出示, 以爲歸報本國之地。" 答云: "議奏到慶源, 爲之文案, 尙未完就。 當以本國文案歸奏。" 又曰: "北道之路, 終不指示, 此事未決之前, 決不可完査。" 又以咨文一度出示, 故其咨文, 爲先封進。
集一等封啓以爲:
査官以直往江界, 轉入廢四郡之意, 累言於譯官輩, 而答以江界, 自是內地, 決不可許往, 兩日相持。 卄八日向晩, 以溫言報曰: "苟然則吾當不往江界, 再明當往滿浦, 觀前路險順, 如不可行, 則有更議之道。" 又招都差使員, 自義州到廢四郡及三甲、六鎭沿邊把守遠近地方, 使之詳細書來云, 故本道把守, 只錄地名, 北路則諉以絶遠, 無人諳識, 只書三甲、六鎭郡名, 以給。 査官曰: "吾聞自北靑通六鎭云, 何不出示? 答以此則內地, 非所論也。 今朝, 又以北靑, 決不可書給爲言, 査官發怒, 仍以無限仍留等說, 爲恐動之計。 其出示咨文, 卽摠管穆克登之咨也。 其頭辭, 稱欽差大人穆等, 爲欽奉上諭事。 其辭略曰: "爾等率同朝鮮國官, 將殺人之處, 査明交于該國王完結, 其沿江一帶, 不免更有出入偸越之路, 爾等亦行査明。" 下端書右咨朝鮮國王。
備局啓曰: "上送咨文頭辭, 以欽差大人爲稱, 而下端以移咨朝廷爲語, 不勝駭然。 在前使命, 雖或有移咨, 例擧其職名, 未嘗以大人自稱。 況此咨文, 異於該部奉旨, 而乃用無前式例, 自倨如此, 所當據理不受, 而矇然上送。 接伴使、監司, 旣在一處, 不能同議善處, 請正明姑先從重推考, 集一及濟, 亦推考。" 從之。
- 【태백산사고본】 57책 50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98면
- 【분류】외교-야(野)
- [註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