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국의 왕호 복구 요청과 위원의 사관 일 등을 의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니, 영의정(領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왜인(倭人)의 서계(書契) 중에 왕호(王號)를 복구하기를 청한 일을 가지고 아뢰기를,
"국왕(國王)으로 썼던 것이 이미 구식(舊式)이었으니, 예전 것을 따라서 개서(改書)하기를 청한 것은 참람(僭濫)한 호칭은 아니며, 또 만서(嫚書)257) 와도 다르나, 지금 국서(國書)를 이미 작성하여 사명(使命)이 벌써 떠난 뒤에 비로소 감히 치서(馳書)하여 통보한 것은 일이 심히 해괴합니다. 동래부(東萊府)로 하여금 받은 서계(書契)를 돌려보내게 하고, 이로부터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회답(回答)하기를, ‘국서(國書)가 이미 이루어지고 사명(使命)이 벌써 떠나서 청허(聽許)할 길이 없으니, 혹은 다른 때를 기다리라.’고 이르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 우의정(右議政) 조상우(趙相愚), 병조 판서(兵曹判書) 최석항(崔錫恒), 좌참찬(左參贊) 이언강(李彦綱), 훈련 도정(訓鍊都正) 윤취상(尹就商), 병조 참판(兵曹參判) 윤지인(尹趾仁) 등이 진달한 바도 대개 서종태와 같았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진규(金鎭圭)는 말하기를,
"지금 사신(使臣)이 국서(國書)를 받들고 발행(發行)한 뒤에 몹시 바쁘게 이서(移書)하고 그 사유(事由)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우리를 경멸한 것입니다. 조정(朝廷)으로부터 그 가부(可否)를 답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존엄성이 없는 것이니, 만약 이제 동래부(東萊府)에서 그 서계(書契)를 받고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회답하고, 또 변신(邊臣)이 감히 이를 받아 올리지 못하는 뜻을 보이면, 저들이 반드시 말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할 즈음에는 또한 그 사정(事情)을 점차 정탐해 알 수 있을 것이니, 일이 변동하는 것을 보고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고, 공조 참판(工曹參判) 권상유(權尙游)는 말하기를,
"옛적에 만이(蠻夷)를 대접(待接)하는 길은 비록 업신여기는 글이라도 오히려 간혹 힘써 따르기도 하는 것인데, 하물며 본시 서로 업신여기는 뜻도 없고 또 이미 허용(許容)한 규례(規例)가 있으니, 반드시 배척하여 거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단지 사세(事勢)가 급박(急迫)한 데 구애되어 우선 막으려고 하면 이치가 굽어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저들에게 혹 생경(生梗)한 뒤에 바야흐로 청종(聽從)을 윤허(允許)하면, 이것은 참으로 약점을 보이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법식(法式)을 고치어서 보내는 것이 우리에게도 손실(損失)되는 게 없고, 저들에게 있어서도 소망(所望)을 이루게 되어 순리(順理)롭고 또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급한 일에 임하여 갑자기 발생(發生)케 한 이 습성(習性)은 미워할 만하며, 번번이 곡진하게 좇으면 약점을 보이는 것이 또한 심한 까닭으로 처음에 엄중히 배척하려고 하였는데, 권상유의 환란(患難)을 염려하는 말에 별안간 그 옳음을 깨달았다. 과연 그렇게 하면 욕(辱)을 끼침이 적지 않을 것이니, 내 당초의 견해를 고수(固守)할 수 없다."
하였다. 이언강이 비국 랑(備局郞)을 파견(派遣)하여 윤지완(尹趾完)에게 문의(問議)하고, 한편으로는 동래부(東萊府)에 분부(分付)하여 서계(書契)를 받아 보내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 수일 만에 비국 랑(備局郞)이 윤지완에게 문의하고 들어왔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전부터 국서(國書)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으로 일컫다가 뒤에 그가 대군(大君)으로 고침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또한 대군으로 썼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스스로 왕(王)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가 왕(王)이라고 일컫는 것을 알았으면 국서(國書)를 고쳐 보내는 것이 본시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혹 말하기를, ‘저희는 지휘(指揮)하는 것같이 되고 우리는 받들어 따르는 것같이 된다.’고 이르지만, 마땅히 그 일의 가부(可否)만을 관찰할 따름이지 지휘하거나 받들어 따른다는 혐의(嫌疑)는 반드시 그러할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신(使臣)의 배 타는 것이 아직도 멀었으니, 국서(國書)를 고칠 만하면 고치는 것이지, 무엇이 전도(顚倒)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윤지완의 말에 따라 국서(國書)를 고치어 보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위원(渭原)의 사관(査官)이 먼저 북도(北道)로 가는 길을 정하려는 일로써 물으니,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재신(宰臣) 등이 극력 막으려고 하였는데, 그가 밀지(密旨)를 내어보이는 일이 없으니 받은 것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끝내 막기가 어려우면 폐사군(廢四郡)의 연강 지대(沿江地帶)로 길을 안내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길은 이따금 인마(人馬)가 불통(不通)되는 곳이어서 그 형세(形勢)가 마땅히 스스로 저편으로 도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언강(李彦綱)은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북도(北道)로 돌아서 간다면 길을 안내할 차원(差員) 이외에 해당 도신(道臣)도 마땅히 따라가야 할 것이니, 재신(宰臣)의 거취(去就)도 마땅히 미리 분부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제신(諸臣)이 모두 말하기를,
"별도로 재신(宰臣)을 보내는 것은 단지 위원(渭原)에 가서 문위(問慰)하는 것만을 위함이요 북도(北道)까지 따라갈 의리(義理)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유독 권상유(權尙游)만이 말하기를,
"마땅히 따라가서 감사(監司)와 상의(相議)하여서 변화(變化)에 대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유집일(兪集一)에게 올라오도록 명하고, 함경 감사(咸鏡監司)는 그 경상(境上)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유집일의〉 일행을 호송토록 하였다. 서종태(徐宗泰)가 이르기를,
"남병사(南兵使) 이상집(李尙)의 사장(辭狀)에 감사(監司) 이선부(李善溥)를 저훼(詆毁)하고 배척(排斥)함이 극히 낭자(狼藉)하였으니, 교만(驕慢)한 습관이 진실로 한심(寒心)합니다. 파직(罷職)만으로는 너무 가벼우니, 마땅히 잡아다가 문초(問招)하게 하소서."
하고, 김창집(金昌集)은 이르기를,
"파직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파직시켰다. 서종태가 또 이르기를,
"전(前)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의 직접(職牒)을 도로 준 지가 벌써 반년(半年)이나 되었는 데도 다시 처분(處分)이 없었으니, 앞으로 만약 서관(庶官)과 같이 일례(一例)로 서용(敍用)하게 되면 아마도 대우(待遇)하시는 예가 아닌가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하겠다."
하고, 이튿날에 특별히 명하여 서용케 하였다. 서종태가 또 정호(鄭澔)를 참작(參酌)하여 처리하기를 청하며 이르기를,
"정호도 장점(長點)이 없지 않으나, 다만 당론(黨論)에 병들었기에 지난번의 거조(擧措)도 또한 놀랍고 괴이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태우(李泰宇)의 상소(上疏) 가운데에, 아들을 보내어 향유(鄕儒)를 맞아들이어 상소하는 일을 지휘(指揮)하고 사주(使嗾)하였다고 이른 데 이르러서는 전혀 사실과 다른 것입니다. 멀리 변경(邊境)에 귀양보내 쫓은 것은 끝내 과중(過重)합니다."
하고, 권상유(權尙游)·조상우(趙相愚)도 또한 아뢰니, 임금이 방송(放送)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50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97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 [註 257]만서(嫚書) : 업신여기는 글.
○乙卯/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徐宗泰以倭人書契中, 請復王號事, 白曰: "書以國王, 旣是舊式, 則請從舊而改書者, 非如僭號, 且異嫚書, 而到今國書已成, 使命已發之後, 始敢馳書以通, 事甚可駭。 令萊府, 受送書契, 自此據理回答曰: "國書已成, 使命已發, 未及聽許, 容竣他時’ 云, 則似爲得宜。" 左議政金昌集、右議政趙相愚、兵曹判書崔錫恒、左參贊李彦綱、訓鍊都正尹就商、兵曹參判尹趾仁等所陳, 槪與宗泰同。 禮曹參判金鎭圭曰: "今於使臣奉書發行之後, 忙迫移書, 不明言其事由者, 蓋輕我也。 自朝廷, 答其可否, 事體不尊。 若令萊府, 受其書契, 據理回答, 且示邊臣不敢受上之意, 則彼必有所言。 如是之際, 亦可漸探其事情, 觀變更議也。" 工曹參判權尙游曰: "古昔待蠻夷之道, 雖嫚書, 尙或勉從。 況本無相嫚之意, 且有已許之規, 不必斥絶。 今若只拘於事勢急遽, 姑欲防塞, 則理屈不可得力。 彼或生梗之後, 方許聽從, 則此眞示弱也。 臣意則改式以送, 於我無損, 在彼滿望, 順且無事矣。" 上曰: "臨急猝發, 此習可惡。 每每曲從, 則示弱亦甚, 故初欲嚴斥矣。 權尙游慮患之說, 頓覺其爲是。 果爾則貽辱不細, 予不可膠守初見矣。" 李彦綱請發遣備局郞, 問議於尹趾完, 一邊分付萊府, 受送書契, 上從之。 後數日, 備局郞問議於趾完而入來。 其言曰: "自前國書, 稱以日本國王, 而後因渠之改以大君, 我亦以大君書之。 今之自王, 非我所能禁, 而知其稱王, 則改送國書, 固無所妨。 或以爲: ‘彼若指揮, 我若奉承’ 云, 當觀其事之可否而已, 指揮奉承之嫌, 未知其必然也。 使臣乘船尙遠, 國書可改則改, 有何顚倒乎?" 上從趾完言, 命改送國書。 上以渭原査官, 先定北道去路事, 問之, 宗泰曰: "宰臣等力爲防塞, 而彼無出示密旨之事, 似無所受而然矣。 終難防塞, 則不得不以廢四郡沿江處指路, 而此路往往不通人馬, 其勢自當還向彼邊矣。 "彦綱曰: "彼若轉往北道, 則指路差員之外, 該道臣, 自當隨往, 而宰臣去就, 則亦當預先分付矣。" 諸臣皆以爲: "別遣宰臣, 只爲渭原問慰, 無隨往北道之義。" 獨權尙游以爲: "宜令隨往, 與監司相議處變。" 上命兪集一上來, 咸鏡監司, 待其境上護行。 宗泰曰: "南兵使李尙 辭狀, 詆斥監司李善溥, 極其狼藉, 驕傲之習, 誠可寒心。 罷職則太輕, 當拿問矣。" 昌集曰: "罷職則不可已。" 上命罷職。 宗泰又曰前判中樞崔錫鼎, 職牒還給, 已至半年, 更無處分。 前頭若與庶官, 一例敍用, 則恐非待遇之例也。" 上曰: "當量處之。" 翌日, 特命敍用。 宗泰又請鄭澔酌處曰: "澔不無長處, 而但病於黨論。 向來擧措, 亦多駭異, 而至於李泰宇疏中, 送子邀致鄕儒, 指嗾疏事云者, 則全是爽實。 竄逐絶塞, 終至過重。" 權尙游、趙相愚, 亦白之, 上命放送。
- 【태백산사고본】 57책 50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97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