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국에 보내는 예단의 일을 논의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일전에 대마도 대차왜(對馬島大差倭)가 나왔으므로, 동래부(東萊府)에서 그들의 저군(儲君)과 집정(執政)에게 예단(禮單)을 감제(減除)하기를 청한 연유를 힐문(詰問)하였더니, 대차왜(大差倭)가 말하기를,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글과 예물을 강호 집정(江戶執政)에게 보낸 것은 당초의 약조(約條)가 아니고, 귀국(貴國)으로부터 피로인(被虜人)을 쇄환(刷還)할 때에 비로소 있었으니 제거(除去)하여도 무방하며, 동등한 예로 대우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이른 것은 과연 망발(妄發)입니다. 저군(儲君)의 예물은 관백(關白)이 지난 겨울에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당시에 아직 정봉(定封)하지 않은 까닭에 보내지 말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부사(府使) 권이진(權以鎭)이 치계(馳啓)하기를,
"저들이 이미 이르기를, ‘아직 정봉(定封)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웃 나라에서 어찌 억지로 저군(儲君)이라 이르고 예물을 보내 줄 수 있겠습니까? 집정(執政)에게 증유(贈遺)하는 사례(事例)가 어느 때부터 생겨났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두 나라가 이미 스스로 서신(書信)을 통하고, 또 신하가 사사로이 서로 서신과 물품의 궤유(饋遺)하는 일이 있었음은 벌써 사리(事理)의 정당(正當)함은 아니었으며, 또 듣건대 저 왜인의 서신과 궤유를 받은 자는 상하(上下)를 막론하고 모두 준 것이 있다고 하니, 그 비용도 적지 않았을 것이므로, 제감을 청한 뜻이 반드시 비용을 아끼자는 데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집정(執政)에게 보내는 서신과 예물이 설령 약조(約條)에는 있지 않더라도 시행한 지 벌써 오래인지라, 무단(無端)히 폐지할 수는 없으며, 관백(關白)의 아들에게 주는 예물은 우리가 먼저 ‘유치(幼稚)한 어린 아이에게 늘상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면, 오히려 자중(自重)하고 자존(自尊)하는 바탕이 될 만하지만, 우리가 능히 하지 못한 채 저희들이 도리어 물리치니, 조종(操縱)함이 우리에게 있는지 저들에게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조사(措辭)하여 책유(責諭)함이 마땅하며, 또 서찰(書札)을 도주(島主)에게 보내어 그 회답한 것을 보고서 처리토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좌의정(左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 군주에게 통서(通書)하고 아울러 저사(儲嗣)에게 예물을 주는 것은 예(禮)가 벌써 지나치며, 집정(執政)에게 증유(贈遺)하는 것은 더욱 마땅한 바가 아니니, 이제 그의 청으로 인하여 보내지 않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그러나 저들로부터 먼저 발설(發說)하여 조종(操縱)한 것 같은 면이 있으며, 또 문자(文字)로써 진청(陳請)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거만하고 방자함이 심합니다. 만약 동래부(東萊府)로 하여금 대차왜(大差倭)에게 책유(責諭)하기를, ‘구어(口語)만으로 듣고 믿을 수 없고 도주(島主)의 서계(書契)가 있은 뒤에야 처분(處分)할 수 있으니, 모름지기 비선(飛船)을 들여보내라.’고 이르고, 도주로부터 만약 끝내 문서(文書)가 없으면 전과 다름없이 부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김창집(金昌集)은 이르기를,
"단지 차왜(差倭)의 구전(口傳)을 가지고 경솔하게 보내지 말라고 허락하면 아마도 마땅하지 못할 듯하니, 도주에게 서문(書問)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판윤(判尹) 민진후(閔鎭厚)·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진규(金鎭圭)도 또한 말하기를,
"단지 언어(言語)에만 의거하여 시행할 수는 없으니, 도주에게 서신(書信)을 보내어 그 답서(答書)를 기다려 혹 보내든 혹 보내지 않든지 함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동지중추(同知中樞) 박권(朴權)은 말하기를,
"이제 만약 그들의 청으로 인하여 제감(除減)하고 이르기를, ‘너희가 간청한 바가 비용을 덜자는 데 있으니, 조정에서 특별히 윤허(允許)하여 시행(施行)하게 하였다.’고 하면 그것이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이것을 조종(操縱)함이 저들에게 있다고 이를 수는 없습니다."
하고, 좌참찬(左參贊) 이언강(李彦綱)도 또한 보내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서종태가 이르기를,
"신이 사사로이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의논하였더니, 윤지완(尹趾完)·이유(李濡)는 말하기를, ‘그의 청으로 인해서 정지함이니 무방할 듯하다.’고 하였고, 이이명(李頤命)은 예조의 회계(回啓)가 적당함을 얻었다고 하면서, 또 말하기를, ‘왜인은 본성(本性)이 악독(惡毒)하여 혹 전해 주던 것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욕(辱)을 끼치게 되고, 더구나 관백(關白)의 아들의 예단(禮單)은 성상께서 내려 주는 것인데 받지 않는다면 더욱 국체(國體)를 손상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단지 구설(口說)에 의거하여 정지할 수는 없다. 왜인(倭人)의 변사(變辭)는 한결같지 않으니, 도주(島主)에게 서문(書問)하여 그 답서(答書)를 기다려서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장령(掌令) 윤장(尹樟)이 논하기를,
"서관(西關)171) 일로(一路)의 각읍(各邑)의 출참(出站)172) 은 도리(道里)가 균일하지 않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읍의 풍요(豐饒)하고 잔폐(殘廢)함을 짐작하여 참로(站路)의 원근(遠近)을 균일하게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말미를 얻어 고향에 내려가 기한이 넘었는 데도 오지 않는 자를 모두 조사하여 파직(罷職)하여 내치게 한 뒤에 해조(該曹)에서 전(前) 참판(參判) 조태로(趙泰老)·참지(參知) 이광좌(李光佐)·수찬(修撰) 이세근(李世瑾)·이조 정랑(吏曹正郞) 임상덕(林象德)을 현고(現告)하니,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임상덕은 논하지 말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50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92면
- 【분류】외교-왜(倭) / 교통-육운(陸運)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庚(子)〔午〕 /引見大臣、備局諸臣。 日前馬島大差倭出來, 東萊府詰問其儲君、執政處禮單請減之由, 大差倭以爲: "禮曹參判送書物於江戶執政, 非當初約條, 自貴國被虜人刷還時, 始有之, 除去無妨, 而抗禮不便云者, 果爲妄發矣。 儲君禮物, 則關白, 昨冬生一子, 時未定封, 故欲爲勿送云。" 府使權以鎭馳啓曰: "彼旣曰: ‘時未定封, 隣國豈可强謂儲君, 致遺禮物乎? 執政處贈遺, 未知事例, 起自何時, 而兩國旣自通書, 又有臣下之私相書饋, 已非事理之正, 且聞彼倭, 受書饋者, 勿論上下, 皆有所予, 其費不貲。 請除之意, 未必不出於惜費矣。" 禮曹覆奏曰: "執政處書禮, 設令不在約條, 行之已久, 不可無端廢閣。 關白子之贈禮, 自我先言, 不當每饋於幼稚之兒, 則猶可爲自重自尊之資, 而我不能爲, 彼反却之, 未知操縱在我歟? 在彼歟? 宜更措辭責諭, 且送書於島主, 觀其所答而處之。" 至是, (領)〔左〕 議政徐宗泰白曰: "通書於其君, 而竝給禮物於儲嗣, 爲禮已過, 贈遺執政, 尤無所當, 今因其請而不送, 何害? 然自渠先發, 有似操縱, 且不以文字陳請, 誠甚慢肆。 若令萊府, 責諭於大差倭, 以爲: ‘不可以口語聽信, 島主有書契後, 可以處分, 須卽入送飛船’ 云, 而島主若終無文書, 則如前附送, 似勝矣。" 右議政金昌集曰: "只以差倭口傳, 輕許勿送, 恐未得當, 書問島主, 似不可已。" 判尹閔鎭厚、禮曹參判金鎭圭, 亦以爲: "不可只憑言語而施行, 送書島主, 待其答書, 而或送或否, 似宜矣。" 同知中樞朴權則以爲: "今若因其請而除之曰: ‘爾之所懇, 旣在省費, 朝家特爲許施’ 云, 則未知其有損國體, 而不可謂操縱在被也。" 左參贊李彦綱亦以勿送爲是。 宗泰曰: "臣私議於原任大臣, 則尹趾完、李濡以爲: ‘因其請而停止, 似無所妨。’ 李頤命則以禮曹回啓爲得宜, 而又言: ‘倭本性毒, 或未得傳給, 則反爲貽辱。 況關白子禮單, 自上所賜, 而不受, 則尤損國體’ 云矣。" 上曰: "不可只憑口說而停之。 倭人變辭不一, 書問島主, 待其答書而處之。" 掌令尹樟論: "西關一路, 各邑出站, 道里不均, 請令道臣, 酌量各邑之豐殘, 均定站路之遠近。" 上允之。 上命受由下鄕, 過限不來者, 竝査出罷職後, 該曹以前參判趙泰老、參知李光佐、修撰李世瑾、吏曹正郞林象德現告, 上特命象德勿論。
- 【태백산사고본】 57책 50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92면
- 【분류】외교-왜(倭) / 교통-육운(陸運)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