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안동의 관왕묘를 보수하도록 하고, 예조에서 관왕묘의 향사 절목을 정하다
일전에 임금이 고금도(古今島)관왕묘(關王廟)013) 에 쓸 향축(香祝)을 가지고 가는 단자(單子) 때문에 정원(政院)에 묻기를,
"성주(星州)·안동(安東) 양읍의 관왕묘(關王廟)의 향사(享祀)도 또한 고금도의 향사하는 예에 의하여 하도록 일찍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정식(定式)으로 거행하게 하였는데, 이제 마패 단자(馬牌單子)를 들인 것은 단지 이 고금도 한 곳뿐이니, 어째서이냐?"
하니, 정원에서 예조 낭청(禮曹郞廳)을 불러 물어서 대답하기를,
"안동(安東)·성주(星州)의 관왕묘(關王廟)는 현존하고 있다고 하나 형편을 상세히 알 수 없으니, 마땅히 본도에 발문(發問)한 뒤에 거행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계미년014) 에 거가(車駕)가 남관묘(南關廟)에 머물렀을 때, 양읍(兩邑)의 관왕묘가 현존하고 있는 형편을 본도로 하여금 사문(査問)케 한 뒤에 본도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예조(禮曹)에서 복계(覆啓)하기에 이미 폐치(廢置)하지 말고 별도로 보수(補修)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이제 해조(該曹)에서 다시 본도에 발문(發問)하려는 것은 그 당시의 곡절(曲折)을 상세히 알지 못해서인 것 같다."
하니, 정원(政院)에서 예조 당랑(禮曹堂郞)을 추고하기를 청하고, 이내
"고금도(古今島)와 더불어 일체(一體)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에 이르러 예조에서 다시 절목(節目)을 정하여 들이고, 이어서 아뢰기를,
"성의(聖意)가 이미 그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에 감동하셨고, 또 중국의 장사(將士)가 동정(東征)015) 하였을 때 세운 바라, 개연(愾然)히 비풍(匪風)·하천(下泉)016) 의 생각이 있었으니, 성명(成命)017) 의 아래에서 어찌 감히 의논을 용납하겠습니까? 안동(安東)의 관묘(關廟)는 만력(萬曆)018) 무술년019) 에 진정영 도사(眞定營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세운 것으로, 석상(石像)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성(府城) 내의 북산(北山) 정상(頂上)에 있었으며, 비(碑)를 세워 동정(東征)한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병오년020) 에 서악사(西岳寺)의 동대(東臺)로 옮겨 모셨습니다. 비문(碑文)은 많이 마멸되었으나 비음(碑陰)021) 에 제장(諸將)의 명호(名號)는 모두 있으며, 묘(廟)는 절에서 3, 4칸[間] 남짓 떨어져 있고 묘 앞 땅도 3, 4칸 남짓한데 층계(層堦)가 있어 평탄하지 못합니다. 성주(星州)의 관묘(關廟)는 동문(東門) 밖에 있으며, 만력(萬曆)정유년022) 에 중국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세운 것으로 소상(塑像)이 있습니다. 묘우(廟宇)는 3칸[間]이고, 뜰의 넓이는 2칸[間] 남짓하다고 하며, 안동(安東)의 중간에 옮겨 세웠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제 이미 조가(朝家)로부터 향사(享祀)한다면 사체(事體)가 전과 다르니 승사(僧舍)의 곁에 붙여둘 수 없으며, 또 그 지형(地形)이 평탄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행사(行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주의 묘정(廟庭)이 단지 2칸 남짓하다면 또한 협착(狹窄)하니, 이번 향사가 지난 뒤에 아울러 조용히 살펴보고 계문(啓聞)하여 변통(變通)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절목(節目)은 한결같이 동관묘(東關廟)·남관묘(南關廟)의 예(例)에 의하여 제일(祭日)은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을 쓰고, 제수(祭羞)는 변두(籩豆)023) 를 사용하며, 헌관(獻官)은 본읍 영장(本邑營將)이나 혹은 당상(堂上)의 무관 수령(武官守令)을 뽑아서 보내고, 배위(配位)에는 당하 무관(堂下武官)을 뽑아 쓰며, 제집사(諸執事)는 향장관(鄕將官)을 임용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5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84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외교-명(明)
- [註 013]관왕묘(關王廟) :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장수인 관우(關羽)의 영(靈)을 모신 사당[廟].
- [註 014]
계미년 : 1703 숙종 29년.- [註 015]
동정(東征) : 임진 왜란 때 중국 장사가 와서 구원한 것을 말함.- [註 016]
비풍(匪風)·하천(下泉) : 멸망한 왕조(王朝)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비풍은 주실(周室)이 쇠함을 탄식하여 현인(賢人)이 지은 시이고, 하천은 왕실이 능이(陵夷)되어 소국(小國)이 곤폐(困弊)스러운 것을 비유하여 지은 시(詩)임.- [註 017]
성명(成命) : 이미 내려진 임금의 명령.- [註 018]
만력(萬曆) :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註 019]
무술년 : 1598 선조 31년.- [註 020]
병오년 : 1666 현종 7년.- [註 021]
비음(碑陰) : 빗돌 뒷면에 쓴 글.- [註 022]
정유년 : 1597 선조 30년.- [註 023]
변두(籩豆) : 제사에 쓰는 그릇을 말하는데, 변(籩)은 대나무로 만들어 마른 음식을 담고, 두(豆)는 나무로 만들어 진 음식을 담았음. 신위의 좌편에 변을 놓고 우편에 두를 진설하였음.○日前, 上以古今島關王廟香祝齎去單子, 問于政院曰: "星州、安東兩邑關王廟享祀, 亦依古今島享祀事, 曾令本道, 定式擧行, 今入馬牌單子, 只是古今島一處者, 何也?" 政院招問禮曹郞廳, 對以安東、星州關王廟現存形止, 未能詳知, 當發問於本道後擧行。 上敎以癸未年駕次南關廟時, 令兩邑關王廟現存形止, 査問本道後, 因本道狀聞, 禮曹覆啓, 已令勿爲廢置, 另加修補。 今該曹之更欲發問於本道者, 似未詳其時曲折也。 政院請推禮曹堂郞, 仍令與古今島, 一體擧行, 從之。 至是, 禮曹更定節目以入, 仍啓曰: "聖意旣感其精忠義烈, 且爲中朝將士東征時所建, 愾然有《匪風》、《下泉》之思, 則成命之下, 何敢容議? 安東關廟, 萬曆戊戌, 眞定營都司薛虎臣所建, 有石像。 初在府城內北山之頂, 立碑以記東征之役, 丙午移安西岳寺東臺。 碑文漫漶, 而碑陰諸將名號俱存, 廟去寺三四間許, 廟前地亦三四間許, 而有層階, 欠平坦。 星州關廟在東門外, 萬曆丁酉, 天將茅國器所建, 有塑像。 廟宇三間, 庭廣二間許云。 安東之中間移設, 未知其故, 而今旣自朝家享祀, 則事體異於前, 不可附置僧舍之側, 且其地形, 不得平坦, 則恐難行祀。 星州廟庭, 只二間許, 則亦狹窄, 過今番享祀後, 竝令從容看審, 啓聞變通。" 從之。 其節目, 一依東、南關廟例, 祭日用驚蟄、霜降, 祭羞用籩豆, 而獻官以本邑營將或堂上武守令差遣, 配位則差堂下武官, 諸執事用鄕將官。
- 【태백산사고본】 57책 50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84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외교-명(明)
- [註 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