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고금도의 관왕묘에 진인과 이순신을 향사하는 일을 논의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난 가을에 대신(大臣)들이 전라도(全羅道) 고금도(古今島)의 진인(陳璘) 도독(都督)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일을 진달(陳達)하여 윤허받았는데, 나중에 듣건대 진 도독(陳都督)은 관왕묘(關王廟)452) 를 창건하였고, 그후에 진 도독과 이순신을 동무(東廡)에 추향(追享)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왕묘와 지세가 너무 가까와서 담장으로 경계를 구획(區劃)할 수가 없으니, 지금 만약 사액(賜額)한다면, 곧 관묘(關廟)의 액호(額號)가 되는 것입니다. 관왕은 당연히 지존(至尊)과 함께 뜰을 나누어 대등한 예절을 갖추어야 할 사람이니, 그 묘우(廟宇)에 사액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진 도독 또한 중국의 사명을 받들었던 장수이므로, 우리 조정에서 신하로 예대(禮待)할 수는 없습니다. 이순신과 함께 향사(享祠)하고 치제(致祭)하는 것은 방애(妨碍)됨이 많으니, 청컨대 대신(大臣)들에게 의논하소서."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만약 선무사(宣武祠)453) ·무열사(武烈祠)454) 의 예를 쓴다면, 단지 관묘(關廟)에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게시하고, 또 ‘선액(宣額)’이라는 두 글자를 빼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제례(祭禮) 또한 선무사(宣武祠)의 의식(儀式)에 의거해야 합니다. 이순신에 이르러서는 이미 도독(都督)과 한 실(室)에 병향(並享)하였으니, 소중하게 여기는 뜻이 있습니다. 또 충성(忠誠)과 노고(勞苦)가 특이하여, 무릇 숭배하여 보답하는 데 관계된 은전(恩典)은 상격(常格)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니, 관원(官員)을 차견(差遣)하여 제사를 지낼 즈음에 일체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서종태(徐宗泰)는 말하기를,
"새로운 묘우(廟宇)는 따로 세운 것이 아니고, 무우(廡宇)에서 향사(享祠)하는 것이라면, 한 묘우(廟宇) 안에서 무우에 편액(扁額)을 걸어두는 것은 일이 매우 불편할 것이니, 단지 관왕묘에만 큰 것을 걸어 일컫게 함이 마땅합니다. 제례(祭禮)에 이르러서는 도독의 제식(祭式)에는 향(香) 및 축사(祝辭)를 내리는 것과, 관원과 집사(執事)를 무열사·선무사의 예에 의하여 준행(遵行)함이 마땅합니다. 이순신(李舜臣)은 우리 나라 사람의 사액(賜額)한 사원(祠院)에 평소 향사(享祀)할 때에, 본래 조정에서 관원을 보낸 규례(規例)가 없으니, 단지 다른 사묘(祠廟)의 예에 의거하여 유생(儒生)·교생(校生)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비록 한 실(室) 안에 있다 하더라도 이는 후(厚)함과 박(薄)함의 차이가 있는 데에서 나온 소치이니, 아마도 방애됨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만약 아름다운 칭호(稱號)를 하여 두 묘우(廟宇)의 뜻을 포괄하게 하려면, 관묘에 편액(扁額)을 내리면서 ‘사액(賜額)’ 두 글자를 빼버려도 그 뜻에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순신이 비록 우리 나라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첨사(僉使)로 하여금 일체로 거행하게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은 말하기를,
"기자(箕子)의 예(禮)를 관묘에 준용(準用)함이 거의 옳을 것이요, 도독의 지위(地位)는 석성(石星)·이여송(李如松) 등 여러 공(公)의 반열(班列)에 참여할 수 있으므로, 묘우를 일컬어 편액(扁額)을 거는 것은 근거할 바가 없지 않으나, 단지 선액(宣額)이라 일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묘(文廟)에도 우리 나라의 선현(先賢)들을 많이 종향(從享)하였는데, 봄·가을의 석전(釋奠)에 관원을 차견(差遣)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개 그 소중함이 성묘(聖廟)에 있기 때문입니다. 2품 이상의 무신(武臣)으로 조용(調用)되었다가 졸(卒)하였을 경우, 조정에서 또한 오히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이순신의 공로(功勞)는 국조(國朝) 이래로 없던 것이었으니, 비록 사묘(祠廟)에서 거행하는 향사(享祀)라 하더라도,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는 것이 숭배하여 보은(報恩)하는 도리에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좌상(左相)의 의논을 쓰도록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또 아뢰기를,
"경중(京中)에서는 관왕묘의 제일(祭日)을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을 쓰니, 봄·가을에 각각 이날로 설행(設行)한다는 뜻을 또한 지위(知委)하소서. 그리고 찬품(饌品)은 한결같이 선무사(宣武祠)의 규례에 의거할 것이며, 향(香)가 축문(祝文)은 경중(京中)에서 내려보냄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비록 성묘(聖廟)의 규례로 말하더라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따로 축문(祝文)을 고하는 일은 없었으니, 관묘(關廟)의 축문(祝文) 말단(末端)에 진 도독과 이순신을 배식(配食)한다는 뜻을 첨입(添入)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56책 49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80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인사-관리(管理) / 외교-명(明)
- [註 452]관왕묘(關王廟) : 관우(關羽)의 사당.
- [註 453]
선무사(宣武祠) : 임진 왜란 때 원군(援軍)을 이끌고 와 활약한 명(明)나라 병부 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도성(都城) 남문(南門) 안에 있었음.- [註 454]
무열사(武烈祠) : 임진 왜란 때 공이 많은 명(明)나라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이하 이여송(李如松)·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 등을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평양(平壤) 서문(西門) 안에 있었음.○禮曹啓言: "大臣於前秋, 以全羅道 古今島, 陳都督璘及忠武公 李舜臣祠宇賜額事, 陳達蒙允, 追聞陳都督, 創建關王廟, 其後追享陳都督及李舜臣於東廡, 而與關廟, 地勢逼近, 不可限以垣墻。 今若賜額, 則便是關廟額號也。 關王當與至尊, 分庭抗禮之人, 不當賜額於其廟, 陳都督亦天朝奉命之將, 我朝不可以臣禮待之。 且與李舜臣, 同享致祭, 節目多妨礙, 請議于大臣。" 判府事李濡以爲: "若用宣武、武烈祠之例, 只揭美稱於關廟, 且去宣額二字, 似得宜, 祭禮亦依宣武儀式, 而至於李舜臣, 旣與都督, 竝享一室, 則所重在焉。 又其忠勞特異, 凡係崇報之典, 不必拘於常格。 差官行祀之際, 仍令一體行之, 恐無損於國體。" 左議政徐宗泰以爲: "新廟果非別建, 而享於廡宇, 則一廟之內, 揭額於廡宇, 事甚不便。 只當以關王廟, 擧其大而爲稱, 至於祭禮, 則都督祭式降香祝辭, 官員、執事, 當遵武烈祠、宣武祠之例。 李舜臣則我朝人, 賜額祠院, 常時祀享, 本無朝廷遣官之規, 只當依他祠廟之例, 以儒、校生行之。 雖在一室之內, 此出於事有降殺而致然, 恐無所妨。" 右議政金昌集以爲: "若以美稱之, 包得兩廟之義者, 宣額于關廟, 而去其賜額二字, 則未見其爲害義。 李舜臣雖是我朝人, 仍令僉使, 一體行之, 亦恐無妨。" 判府事李頣命以爲: "箕子之禮, 庶推於關廟, 都督之位, 可班於石、李諸公, 稱廟而揭額, 不爲無所據矣, 但不可謂之宣額耳。 文廟從享, 亦多我國之賢, 而春秋釋菜, 差官而祭, 蓋其所重, 在於聖廟也。 二品以上常調武臣之卒, 朝廷亦猶遣官致祭, 李舜臣之功, 國朝以來所未有, 雖祠廟常祀, 歲再遣官, 崇報之道, 未或過矣。" 命用左相議。 禮曹又奏, 京中關王廟祭日, 用驚蟄、霜降, 春秋各以此日設行之意, 亦爲知委。 饌品一依宣武祠, 香、祝則當自京下送, 而雖以聖廟規例言之, 東、西廡, 無別爲祝告之事, 關廟祝文末端, 添入陳都督、李舜臣配食之意, 似當。"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56책 49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80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인사-관리(管理) / 외교-명(明)
- [註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