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판서 김우항이 군국의 계책을 상소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우항(金宇杭)이 상소(上疏)하기를,
"이전에 바다 가운데에서 출몰(出沒)하던 배가 우리 나라 지방에 가까운 것은 해서(海西)에 많았으니, 이제 해서에 더욱 힘을 들여야 마땅합니다. 해서에 있는 금위영(禁衛營)의 보군(步軍)이 총계 2천 명인데, 이들은 모두 포수(砲手)이므로 전진(戰陣)에 쓸 수 있으니, 마땅히 이들을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이름을 ‘아병(牙兵)’이라고 하소서. 그리고 금위영(禁衛營)의 별효위(別驍衛) 8백 40명이 모두 해서에 있는데, 매달 56명씩 돌아가서 상번(上番)하는데 56명의 입번(立番)이 군문(軍門)에 있어서는 별 손익(損益)이 없으며, 또 사마(司馬)가 주장(主將)이 되고 7백 명의 금군(禁軍)을 휘하(麾下)에 두어 곧 금영(禁營)의 소속과 같으니, 비록 이 별효위가 아니라 하더라도 마군(馬軍)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이제부터 별효위 8백여 명을 보군(步軍) 2천 명과 아울러 영구히 본영(本營)에서 줄여서 해서의 두 영(營)에 나누어 소속시킨다면, 급할 때에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금천(金川) 이동(以東)의 청석동(靑石洞)은 진실로 한 사람이 만 명을 막을 수 있는 관문(關門)이 되는 땅이니, 조태로(趙泰老)가 상소(上疏)한 가운데 진계(陳啓)한 바와 같이, 송도 유수(松都留守)에게 사호(使號)를 정하고 장권(將權)을 위임해 청석동(靑石洞)에서 방수(防守)에 진력(盡力)하게 하면, 비록 대적(大敵)이 있더라도 반드시 승승 장구(乘勝長驅)하여 곧바로 경성(京城)까지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회양(淮陽)은 철령(鐵嶺)과 추령(楸嶺)의 아래에 끼여 있어서, 진실로 국가(國家)의 관방(關防)입니다. 마땅히 방영(防營)을 설치하고, 특별히 직질(職秩)이 높은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가려서 부사(府使)를 엇갈려 차임(差任)하여, 춘천(春川)과 더불어 좌우(左右)의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영동(嶺東)과 영서(嶺西) 각 고을의 군무(軍務)를 나누어 주어 관할(管轄)하게 하되, 경내(境內)의 군병을 본읍(本邑)에 전속(專屬)시켜서 독진(獨鎭)을 삼아 수원(水原)의 제도와 같게 하면, 거의 차단(遮斷)하여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연하(輦下)의 다섯 군문(軍門) 가운데 수어사(守禦使)와 총융사(摠戎使)는 모두 군병이 없는 장수(將帥)로 성(城) 안에 있게 하니, 매우 의의(意義)가 없습니다. 수어사(守禦使)는 그래도 갈 만한 신지(信地)가 있으나, 총융사(摠戎使)는 난리에 임하여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갑작스럽고도 황급한 때에 흩어져 있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을 반드시 전령(傳令)하여 모이게 하지 못할 것이니, 호종(扈從)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반드시 길에서 방황하며 따라 갈 곳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미 염려스럽습니다. 그런데 1년마다 한 번씩 하는 순조(巡操)도 흉년이 들면 또한 정지하니, 장수(將帥)와 병졸(兵卒)이 서로 만나 볼 수가 없습니다. 경기 감사(京畿監司)는 기보(畿輔)의 중임(重任)으로서 또 순찰사(巡察使)와 절도사(節度使)를 겸하고 있는데, 도내(道內)의 군사는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의 두 곳에 전속(專屬)시키고, 단지 약간의 기수(旗手)만 있어서 돌아가며 입번(立番)하게 하니, 영문(營門)의 모양을 이루지 못합니다. 만약 경기 감사로 하여금 총융사(摠戎使)를 겸하게 하여 봄·가을로 순력(巡歷)할 때 군사를 점열(點閱)하게 하고, 또 조련(操鍊)을 시행하여 만약 변란(變亂)을 만나면, 좌우(左右)의 방어사(防禦使)와 각 고을의 수령(守令)과 함께 혹 적을 맞는 지역에서 방어(防禦)하게 하거나, 혹은 주필(駐蹕)하는 곳을 방위(防衛)하게 한다면 반드시 크게 힘을 얻게 될 것이니, 단지 장수의 이름만 있고 그 실상이 없는 총융사와는 서로 차이가 많습니다."
하고, 상소 말미에 극론(極論)하기를,
"도성(都城)의 형편은 족히 믿을 만하며, 의리(義理)와 이해(利害)로 헤아려 보더라도 모두 지키지 않을 수 없는데, 반드시 급할 때에 피하여 달아날 계책(計策)을 삼는다면, 북한(北漢)은 안이 험준(險峻)하고 또 좁아서 도리어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으로써 의귀(依歸)할 곳을 삼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누누이 조목(條目)으로 진계(陳啓)한 바가 진실로 시국(時局)을 근심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으나, 마침내 정지하고 거행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6책 49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7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戶曹判書金宇杭上疏曰:
從前海舶之出沒洋中, 近我地方者, 多在海西, 今當尤致力於海西。 禁衛營步軍之在海西者, 摠計二千名。 此皆砲手, 可用於戰陣者, 宜以此分屬本道監、兵使, 名之曰牙兵。 禁衛營別驍衛八百四十名, 皆在海西, 每朔五十六名, 輪回上番。 五十六名之立番, 在軍門無甚損益, 且司馬爲主將, 七百禁軍, 在麾下, 便同禁營所屬, 雖非此別驍衛, 不患無馬軍。 宜自今別驍衛八百餘名, 竝與步軍二千名, 而永減於本營, 分屬於海西兩營, 則緩急可以得力矣。
又曰:
金川以東靑石洞, 實爲一夫當關之地。 宜如趙泰老疏中所陳, 松都留守, 定使號, 委以將權, 使之盡力, 防守於靑石洞, 則雖有大敵, 必不敢長驅, 直抵京城也。
又曰:
淮陽, 介在鐵、楸兩嶺之下, 誠國家之關防也。 宜設置防營, 另擇秩高文武, 交差府使, 與春川, 爲左右防禦使, 嶺東、西各邑軍務, 分授管轄, 境內軍兵, 專屬本邑, (非)〔作〕 爲獨鎭, 如水原之制, 則庶可以遮遏捍蔽矣。
又曰:
輦下五軍門中, 守禦使、摠戎使, 皆以無軍將, 在於城內, 甚無意義。 守禦使猶有可往之信地, 而摠戎使, 臨亂則將何往乎? 急遽倉卒之際, 散在烏合之卒, 必不能傳令期會, 不過扈從而已。 不然則必彷徨道路, 無所適從, 此已可慮, 而一年一度之巡操, 年凶則亦停, 將卒不相見。 京畿監司以畿輔重任, 且兼巡察、節度, 而道內軍兵, 專屬於守禦、摠戎兩廳, 只有旗手若干, 輪回立番, 不成營門貌樣。 若以京畿監司, 兼摠戎使, 春秋巡歷時, 點視軍兵, 且行操鍊, 如遇變亂, 與左右防禦使及各邑守令, 或防遏於受敵之地, 或捍衛於駐蹕之所, 則必大得力, 與摠戎使之徒有將號而無其實者, 相去萬萬。
疏末, 又極論都城形便足恃, 參以義理利害俱不可不守, 而必欲爲緩急避走之計, 則北漢內險且窄, 反不如以江都、南漢, 爲依歸之所也, 上答曰: "縷縷條陳, 亶出憂時之忱, 宜令廟堂, 商確稟處。" 後, 竟寢不行。
- 【태백산사고본】 56책 49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7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