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수비의 일과 홍복산·북한산의 축성 일에 대해 논의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이 말하기를,
"좌의정(左議政) 서종태(徐宗泰)가 올린 차자(箚子)의 대의(大意)는 도성(都城)이 허술하므로 결단코 지키자고 청하기가 어렵지만, 근래에 민정(民情)이 모두 도성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며, 성상께서 지금의 변우(邊憂)를 두려워하여 반드시 옮겨 피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나, 인정(人情)이 이로 말미암아 소요(騷擾)하므로 진안(鎭安)시키고자 하는 뜻입니다. 그 비답(批答)이 차자(箚子)의 뜻과 다름이 있으니, 혹 자세히 알지 못하셔서 그러하신 것입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나 또한 자세히 보았다. 내가 북보(北報)의 형체도 없는 구적(寇賊) 때문에 갑자기 도성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경급(警急)이 있으면 결단코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답한 것이다."
하자, 이이명이 말하기를,
"서종태는 성의(聖意)가 이로 인하여 갑자기 버리고자 하시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알 것이나, 대신(大臣)의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이와 같으니, 차비(箚批)를 도로 거두시고, 이로 인하여 도성을 버리려는 뜻이 아님을 첨입(添入)해서 내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도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비답(批答)을 내리면, 마침내 도성을 지키고자 하는 듯하니, 진실로 방애(妨碍)되는 바가 있다. 성(城)을 지키는 기구는 반드시 곡성(曲城)·돈대(墩臺)·해자(垓子)가 있은 후에야 적(敵)을 방어(防禦)할 수 있는 것인데, 지금 국초(國初)에 처음 쌓았을 때와 비교해 보면 물력(物力)을 갑절 들여도 오히려 성공(成功)하기 어렵다. 만약 해마다 수축(修築)하고자 하면, 바로 속담에 이른바, ‘소나무를 심어 그늘을 찾는다.’는 것과 같다. 또 도성은 바로 정정(定鼎)394) 한 곳이지 적(敵)을 방어하는 곳이 아니므로, 당초에 쌓은 모양이 과일을 포개놓은 것과 같아서, 적이 만약 대포(大砲)를 쏜다면 곧 훼파(毁破)될 것이니, 백성이 비록 많고 군량(軍粮)이 비록 축적(蓄積)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보수(保守)하겠는가?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써 말하건대, 근왕(勤王)의 군사가 많이 집결(集結)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끝내 강화(講和)의 치욕(恥辱)을 면하지 못하였었다. 이 성은 외원(外援)이 미처 이르기 전에 이미 패배하여 흩어질 것이니, 결단코 지킬 수가 없다."
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도 또한 수성(守城)해야 한다는 뜻으로써 진소(陳疏)하였었으니, 도성을 지키자는 의논은 오늘날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개축(改築)한 후에야 지킬 수 있을 것이니, 지금은 지킬 수가 없다."
하였다. 이이명이 민진후(閔鎭厚)·남치훈(南致熏)과 잇달아 진달(陳達)하여 모두 도성은 견고해서 지킬 수 있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은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지키기 어려우며, 강도(江都)는 해구(海寇)를 방비하기 어렵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옳지 않게 여겼다.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이 먼저 홍복산(洪福山)을 보았더니, 형세가 비록 좋으나 온통 험조(險阻)함이 부족하여 안팎이 모두 토산(土山)이고, 또 수맥(水脈)이 많지 아니하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기지(基址)를 척량(尺量)해 보았는데, 넓게 쌓으면 25리에 지나지 않고, 줄여서 쌓으면 겨우 20리가 되어 대가(大駕)가 용접(容接)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삼면(三面)이 들이어서 적이 만약 들에 진(陣)을 치면, 성(城) 안에서 밖으로 통할 길이 없으며, 비록 엿보는 봉우리는 없었으나, 압림(壓臨)하는 곳이 많이 있으니, 이것이 제일 어려운 점입니다. 북한(北漢)은 과연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험한 것이 이와 같은데, 서울의 지척(咫尺)에 있는 데도 오히려 지금까지 버려두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지세가 절험(絶險)하여 사방에 평평한 땅이 없어서 사람이 들어가 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전일에 척량한 것으로써 말하건대, 35리는 되지마는 과연 용접(容接)할 만한 평지가 없었습니다. 바위에 가설(架設)하고 골짜기를 뚫는다면, 또한 집을 만들 수는 있겠으나, 단지 성상께서 옮겨 들어가신 후에 멀고 가까운 곳의 백성들이 와서 모인다면, 진실로 용접(容接)할 형세가 없었습니다. 신이 돌아오는 길에 문수봉(文殊峯)을 두루 살펴보니, 그 봉우리가 북한산(北漢山)의 남쪽에 있는데, 봉우리 아래 골짜기의 길이가 10리이고, 좌우(左右)가 깎아지른 듯하여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석봉(石峰)이 구불구불 아래로 내려오다가 두 끝이 합해져서 끝나는데, 이 곳에 문(門)을 설치하고 기민(畿民)으로 하여금 골짜기 안에 들어가 살게 하면 아울러 용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대개 북한산에 성을 쌓는 계책(計策)은 드는 비용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행궁(行宮)395) 과 창고(倉庫)를 반드시 아울러 설치한 후, 한결같이 분사(分司)396) 의 예(例)에 의거하여 눈앞의 수용(需用) 외에 각 관사(官司)의 쓰고 남은 물품을 나누어 적치(積置)한다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이명은 말하기를,
"이유(李濡)·서종태(徐宗泰)는 모두 이미 가서 보았는데, 신 또한 가서 보고자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가서 본 후에 다시 의논함이 옳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6책 49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72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왕실-국왕(國王)
- [註 394]정정(定鼎) : 도읍(都邑)을 정함.
- [註 395]
행궁(行宮) : 임금이 거둥할 때에 머무는 별궁.- [註 396]
분사(分司) : 관아(官衙)를 나누어 설치하던 제도. 임금이 도성(都城)을 떠나 다른 곳에 장기간을 머물 때 각사(各司)는 관아를 나누어 두 곳에서 일을 보았음.○藥房入診。 都提調李頣命曰: "左議政徐宗泰, 陳箚大意以爲, 都城踈虞, 決難請守, 而近來民情, 皆以爲宜守都城。 自上非畏卽今邊憂, 必欲移避, 而人情緣此騷擾, 故意欲鎭安之耳。 其批乃與箚意有異, 或未詳悉而然歟?" 上曰: "予亦詳見矣。 予非以北報無形之寇, 遽欲棄都城, 脫有警急, 決知其難守, 故所答如是矣。" 頣命曰: "宗泰則必知聖意, 非欲因此遽棄, 而大臣憂國之言如此, 箚批還入, 以非因此言, 棄都城之意, 添入以降似宜。" 上曰: "今以勿棄都城爲批, 則似欲終守都城, 實有所妨礙矣。 守城之具, 必有曲城、墩臺、垓子, 然後可以禦敵, 而今則視國初初築時, 物力倍之, 猶難成功。 若欲逐年修築, 則政如諺所謂: ‘植松求蔭。’ 且都城乃定鼎之所, 非禦敵之處, 故當初所築狀如累果。 敵若放大砲, 則立見毁破, 民衆雖多, 兵糧雖積, 何以保守乎? 以南漢言之, 勤王之師, 可謂多集, 而終未免下城之辱。 此城則外援未至, 先已破潰, 決不可守也。" 頣命曰: "故相臣李廷龜, 亦以守都之意陳疏。 守都之議, 非今所創。" 上曰: "改築後可守, 今則不可守矣。" 頣命與閔鎭厚、南致熏, 迭相陳達, 皆以爲都城堅固可守, 南漢則孤危難守, 江都則難備海寇, 上終以爲不然。 鎭厚曰: "臣先見洪福, 則形勢雖好, 而全欠險阻, 內外皆是肉山, 且水脈不多, 此爲可慮。 尺量基址, 廣築則不過二十五里, 縮築則僅爲二十里, 大駕決難容接。 且三面皆野, 敵若作陣於野, 則城中無以外通, 雖無窺峰, 多有壓臨處, 此爲最難。 北漢則果是天作之地。 險阻如此, 而在京都咫尺, 尙今棄置者, 無他, 以其地勢絶險, 四無坦地, 人難入居故也。 以前日尺量言之, 可爲三十五里, 而平地則果無容接處。 架巖鑿谷, 亦足以作室, 第自上移入後, 遠近之民來聚, 則實無相容之勢。 臣來路, 歷見文殊, 其峰在北漢之南, 峰下長谷十里, 左右削立, 無着足處。 兩石峰逶迤下來, 兩端合而止之。 置門於此, 令畿民入居谷內, 則可以竝容。 蓋北漢之計, 靡費雖多, 行宮、倉庫, 必竝爲設置, 然後一依分司例, 目前所需外, 分置各司, 用餘則可以得力。" 頣命曰: "李濡、徐宗泰, 皆已見之, 臣亦欲往見而未果矣。" 上曰: "大臣往見後, 更議可也。"
- 【태백산사고본】 56책 49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72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왕실-국왕(國王)
- [註 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