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 이덕영이 기묘년의 증광 문과를 추복하기를 상소하다
사간(司諫) 이덕영(李德英)이 상소하여 기묘년174) 의 증광 문과(增廣文科)를 추복(追復)할 것을 청하기를,
"신(臣)이 일찍이 여러 신하들의 연주(筵奏)를 살펴보건대, 추복(追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간혹 해가 오래 되어 도로 회복시키는 데 의심을 갖는 단서(端緖)로 삼는데,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일로써 말하건대 기묘 현량과(己卯賢良科)175) 는 수삼십 년 후에 추복(追復)하도록 윤허하였으며, 근래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박천영(朴千榮)을 복과(復科)한 것은 4년 후에 있었고, 지난날 심준(沈埈)·최수경(崔守慶) 등은 또한 13년 후에 추복하였습니다. 연수(年數)의 오래 되었거나 가깝거나 거리끼지 않음이 이와 같은데, 유독 이 방(榜)만은 연수가 오래 되었다는 것으로써 버티는 것도 또한 어그러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혹자는 시권(試券)을 훔친 변고(變故)는 옛날에 없던 바이므로 일체 삭파(削罷)해서 과거(科擧)의 일을 엄격히 함은 불가(不可)하지 않다 하나, 이는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과옥(科獄)176) 이 비록 지극히 요악(妖惡)하다 하나, 돌아보건대 동방(同榜)의 무고(無故)한 사람이야 무슨 관계가 있기에 또 혼동하여 파방(罷榜)하려 하는 것입니까? 더구나 동방의 여러 사람들은 이미 의심할 것이 없으므로, 각별히 수용(收用)하라는 명을 여러 번 연석(筵席)에서 내리셨습니다. 무릇 이미 무죄로 인하여 수용하셨으면 혼동하여 파방한 억울함을 조정[朝家]에서도 이미 알 것인데, 오히려 복과(復科)하는 데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혹자는 그 가운데의 거자(擧子)177) 로 또한 다른 죄를 범한 자가 있어서 구별하는 즈음에 방애되어 처리하기 어려운 단서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잡범이라는 것은 역서(易書)178) ·고군(雇軍)179) 인데, 이 두 사람은 이미 모두 다른 과방(科榜)을 따로 차지하였으니, 지금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혹자는 한 방(榜)에서도 혹은 보존되고 혹은 삭파(削罷)하는 것이 자못 구차스러운 데에 관계된다고 말하나, 이는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력(萬曆)180) 병술년181) 의 알성시(謁聖試)에서 처음에는 9인을 뽑았다가, 여계선(呂繼先)·한용(韓獻)·허징(許徵) 등은 곧 죄로써 삭파(削罷)되고, 단지 서성(徐渻)·정경세(鄭經世) 등 6인만 보존되었습니다. 9인 가운데 3인을 삭파했어도 오히려 불가(不可)한 바가 없었는데, 더구나 33인 가운데 마땅히 삭파할 자가 10인 미만인 것이겠습니까?
지금 반드시 추복할 만하다고 논의하는 것도 또한 여러 가지의 논설(論說)이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단종(端宗)의 복위가 얼마나 성대한 일이었겠습니까? 그 경사(慶事)를 일컬어 기쁨을 표현함에 있어 갖추지 못한 것이 없어야 마땅한데, 오직 이 과거(科擧)는 흠결(欠缺)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추복해야 함이 첫째입니다. 조정에서 3백 년 이래로 일찍이 문과(文科)가 없는 무과(武科)나 대과(大科)가 없는 소과(小科)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단지 문과의 방(榜)만 삭파하고, 무과와 소과는 그대로 보존한다면 과거의 체제에 모양을 이루지 못하니, 마땅히 추복해야 함이 둘째입니다. 죄가 거자에게 있으면 거자를 죄주고, 죄가 시관(試官)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주되, 영구히 파방(罷榜)하지 말도록 한 일은 선왕(先王)께서 영갑(令甲)182) 을 정하여 성헌(成憲)으로 후세에 전하게 하였으니, 마땅히 뒤흔들어 고치지 못함이 셋째입니다. 심준(沈埈)·최수경(崔守慶)은 참으로 격식(格式)에 어긋나는 일이 있었으나, 오직 또 곡진하게 용서하고 특별히 추복하도록 명하셨으니, 지금은 털끝만큼도 연좌(連坐)시킬 만한 일이 없는데도 그대로 파방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두 사람에게 견주어 추복해야 마땅한 것이 더욱 명백한 것이 넷째입니다. 전에 비록 파과(罷科)하였을 때가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이름을 부르기 전에 있었고, 이름을 부른 후에 파방한 것에 이르러서는 단지 현량과 한 가지 방뿐이었는데, 또한 오늘날에 끌어대어 원용(援用)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니, 마땅히 추복해야 하는 다섯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 일은 일찍이 전석(前席)에서 여러 번 하문(下問)한 것이다. 죄인을 이미 알아내었는데, 온 방(榜)을 전체 삭파(削罷)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전(令典)을 가볍게 고치게 되는 것이니, 실로 매우 미안(未安)하다. 이는 내가 너무 경솔히 처분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한 번 다시 하문하려 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그대의 소사(疏辭)가 또 이러하니, 의조(儀曹)183) 로 하여금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여 품처(稟處)케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48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5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註 174]기묘년 : 1699 숙종 25년.
- [註 175]
기묘 현량과(己卯賢良科) : 중종 14년(1519)에 보였던 현량과를 이름.- [註 176]
과옥(科獄) : 과거 때 부정으로 일어나는 옥사.- [註 177]
거자(擧子) : 과거를 보는 선비.- [註 178]
역서(易書) : 시관(試官)이과 거 답안(科擧答案)의 필체(筆體)를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서리(胥吏)들로 하여금 붉은 글씨로 바꿔 쓰게 하던 것. 곧 역서 서리(易書胥吏)를 가리킴.- [註 179]
고군(雇軍) : 임시로 고용한 군병(軍兵).- [註 180]
만력(萬曆) :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註 181]
○司諫李德英, 上疏請追復己卯增廣文科曰:
臣嘗觀諸臣筵奏, 其以爲不可復者, 或以年久還復, 爲持疑之端, 而此則不然。 以祖宗朝事言之, 己卯賢良科, 許復於數三十年之後, 以近事言之, 朴千榮之復科, 在於四年之後, 頃日沈埈、崔守慶等, 亦追復於十三年之後, 則不拘年數之久近, 有如是者, 而獨於此榜, 以年久持之者, 不亦逕庭乎? 或以竊卷之變, 前古所無, 一切削罷, 以嚴科事, 未爲不可云, 而此又不然。 今其科獄, 雖極妖惡, 顧何與於同榜無故之人, 而又欲混罷乎? 況同榜諸人, 旣無疑故, 各別收用之命, 屢下於筵席。 夫旣因無罪而收用, 則混罷之冤, 朝家亦已知之, 而猶於復科而疑之者, 抑獨何哉? 或以爲其中擧子, 亦有雜犯他罪者, 區別之際, 不無窒礙難處之端, 此又不然。 其所謂雜犯者, 易書、雇軍, 而此兩人, 皆已別占他科, 則今無可論者矣。 或謂一榜之或存或削, 殊涉苟且云, 此又不然。 萬曆丙戌謁聖, 初取九人, 而呂繼先、韓獻、許徵等, 旋以罪見削, 只存徐渻、鄭經世等六人。 在九削三, 尙無不可。 況三十三人之中, 當削者一滿十人乎? 今之爲必可復之論者, 亦有數說焉。 以爲端宗復位, 何等盛擧? 其所稱慶飾喜, 宜無所不備, 惟此科擧, 未免欠缺, 當復一也。 朝家三百年來, 未嘗有無文科之武科, 無大科之小科, 而今者只削文搒, 仍存武、小科, 其於科體, 不成貌樣, 當復二也。 罪在擧子則罪擧子, 罪在試官則罪試官, 永勿罷榜事, 先王定爲令甲, 以垂成憲, 則今不當撓改三也。 沈埈、崔守慶, 眞有違格之事, 而惟且曲恕, 特命牽復, 則今也毫無所坐, 而仍罷其榜可乎? 比諸兩人, 其所當復, 尤甚明白, 四也。 在前雖或有罷科之時, 而只在未唱名之前, 至於唱名後罷榜, 只有賢良一榜, 而亦不宜引援於今日, 當復五也。
上答曰: "玆事嘗屢詢於前席矣。 罪人已得, 而一榜全罷, 不但有乖於區別枉直之道, 輕改令典, 實甚未安。 此予所以覺處分之率爾, 而欲一更詢者久矣。 爾之疏辭又如此, 令儀曹, 問議于諸大臣稟處。"
- 【태백산사고본】 55책 48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52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註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