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이여가 진연 후에 추은하는 일을 품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이여(李畬)가 진연(進宴) 후에 추은(推恩)158) 하는 일을 품주(稟奏)하기를,
"병술년159) 에는 30년으로써 경사(慶事)를 치렀기 때문에, 사부(士夫)·평민(平民)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는 은전(恩典)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상의 환후(患候)가 평복(平復)되신 것으로써 경사를 치렀으므로, 의의(意義)가 조금 다르니, 가자하는 한 가지 조항은 거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병술년에는 2품으로서 70세 이상된 사람에게는 특별히 의자(衣資)와 쌀·고기를 내려 주었고, 당상관의 문신(文臣)으로서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이와 무신으로서 일찍이 부사(府使) 이상을 지낸 사람 및 음관(蔭官)으로서 일찍이 4품 이상을 지낸 사람에게는 쌀과 고기를 내려 주었는데, 이는 가자하는 것과는 다르니 거행하여도 무방합니다. 방민(坊民)과 각사(各司)의 공물인(貢物人)은 장빙미(藏氷米)160) 를 3년을 한정으로 견감(蠲減)하여 주는 것이 혜택을 미치게 하는 도리가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역(坊役)의 괴로운 폐단을 내가 평소 신칙(申飭)하였는데, 오히려 더욱 심해지니, 거듭 신명(申明)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없게 함이 마땅하겠다."
하니, 이여가 말하기를,
"방역(坊役)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것은 부지군(負持軍)161) 으로서, 응당 10명을 세우면 으레 20명이 나가고, 20명을 세우면 으레 3, 40명이 나간다고 합니다. 만약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역(役)을 피하는 길을 엄중히 막고, 또 병조(兵曹)에 신칙(申飭)해서 무릇 부지군으로 응당 들어와야 할 인원수를 차비(差備)와 여러 상사(上司)들에게 물어 참작하여 규식(規式)을 정하고, 함부로 정하지 못하게 하면 거의 폐단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김창집(金昌集)·판돈녕(判敦寧) 민진후(閔鎭厚)가 함께 아뢰기를,
"이는 방민(坊民)의 명색(名色)이 많고 역사(役事)에 응하는 자들이 적은 까닭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만약 본역(本役)이 조금 가벼운 자를 덜어내어 방역(坊役)에 응하게 하면 조금 균등(均等)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병조(兵曹)와 한성부(漢城府)에 변통(變通)하도록 명하였다. 이여가 말하기를,
"의주(義州)의 죄인(罪人) 하막룡(河莫龍)은 사신(使臣) 행차를 따라 들어갔다가 뒤로 떨어져서 저들 가운데에 머물러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 죄가 이미 무거운데, 붙잡아 보낼 즈음에 또 도망하여 숨었으니, 해당되는 율(律)로 단죄(斷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김창집 또한 이를 말하니, 임금이 변상(邊上)에서 효수(梟首)하도록 명하였다. 이여가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권이진(權以鎭)이 왜관(倭館)의 공봉(供奉)을 철폐하는 일로써 논열(論列)하여 장문(狀聞)하였습니다. 대개 조정에서는 애초에 관수왜(館守倭)가 이미 그 죄를 자복(自服)한 것을 알지 못하고, 책유(責諭)한 후에 공봉을 철폐토록 하였습니다. 지금 이 장계(狀啓)를 보건대, 관수왜가 대관왜(代館倭)의 간청을 듣고 함부로 나가게 된 것을 저들이 점차 후회한다고 하니, 이는 문득 죄를 자복한 것입니다. 비록 어채(魚菜)를 핑계하여 말하였다 하더라도 거듭 힐책(詰責)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정축년162) 에 이미 공봉을 철폐했던 전례가 있으니, 장계에 의거하여 공봉을 철폐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지평(持平) 이정억(李禎億)이 논핵하기를,
"호군(護軍) 한배하(韓配夏)는 성품이 본래 몹시 사납고 고약하여 명교(名敎)에 죄를 지었으므로, 온 세상에서 침을 뱉아 비루하게 여기고 동렬(同列)에 참여하기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곤수(閫帥)에 부임하고부터 탐욕을 자행하고, 국옥(鞫獄)의 사수(死囚)와 부동(符同)하여 송사(訟事)를 일으켜 사부(士夫)의 족산(族山)을 구차히 차지하였는데, 그 본관(本官)이 풍지(風旨)163) 를 받들지 않는데에 노하여, 폄목(貶目)에 두고 마침내 이송(移訟)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찍이 내포(內浦)에 있을 때에는 한 생원(生員)·진사(進士)와 정호(情好)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방백(方伯)이 되자 그 선산(先山)에 빼앗으려고 묘를 파서 한 달 안에 이장(移葬)하도록 금을 그어 기한을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우속(牛贖)164) 의 돈은 고을의 쇠잔하고 번성한 데에 따라 각각 정해진 액수가 있는데, 매월 독촉해서 받아들여 죄다 뒤로 돌렸습니다. 자신이 도주(道主)가 되어 감히 노비(奴婢)를 추쇄(推刷)165) 하려고 감영(監營)의 하례(下隷)를 나누어 보내어 마을에 들이닥치니, 온 도(道)에 원망이 자자하고 무고(無辜)한 사람들이 하늘에 하소연하였습니다. 청컨대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교리(校理) 이만견(李晩堅)이 계청(啓請)하기를,
"능히 허문(虛文)을 떨쳐 버리고 힘써 실덕(實德)을 닦으셔서 재해(災害)를 그치게 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이만견이 또 최석정(崔錫鼎)을 멀리 귀양보내자는 계달(啓達)에 빨리 윤허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48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5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재정-역(役)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 [註 158]추은(推恩) : 시종(侍從) 또는 곤수(閫帥) 등의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아버지로서 나이가 70세 이상인 사람에게 가자(加資)하던 일.
- [註 159]
병술년 : 1706 숙종 32년.- [註 160]
장빙미(藏氷米) :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氷庫)에 저장하는 역군에게 주는 쌀.- [註 161]
부지군(負持軍) : 짐꾼.- [註 162]
정축년 : 1697 숙종 23년.- [註 163]
○引見大臣、備局諸宰。 領議政李畬, 以進宴後推恩事, 稟奏曰: "丙戌年以三十年稱慶, 故士夫、平民, 皆有加資之典, 而今則以聖候平復稱慶, 義意稍異, 加資一款, 不必擧行。 丙戌年二品年七十以上, 特賜衣資、米肉, 堂上文臣曾經實職者, 武臣曾經府使以上者, 蔭官曾經四品以上者, 賜以米肉。 此則與加資有異, 行之無妨。 坊民及各司貢物人, 藏氷米, 限三年蠲減, 似爲推惠之道。" 上曰: "坊役苦重之弊,予當申飭, 而猶且滋甚, 更宜申明, 俾無民怨也。" 畬曰: "坊役中最苦者, 負持軍也。 應立十名, 則例出二十名, 應立二十名, 則例出三四十名云。 若令京兆, 嚴防避役之路, 又飭兵曹, 凡負持軍應入之數, 問於差備及諸上司, 參酌定式, 俾勿濫定, 則庶可省弊。" 右議政金昌集、判敦寧閔鎭厚, 皆言: "此由於坊民, 名色夥然, 應役者少故也。 若除出本役稍歇者, 使應坊役, 則可以稍均。" 上命兵曹、漢城府變通。 畬曰: "義州罪人河莫龍, 隨使行入去, 落留彼中, 其罪已重, 而捉送之際, 又爲逃躱, 不可不斷以當律。" 昌集亦言之, 上命梟示境上。 畬曰: "東萊府使權以鎭, 以倭館撤供事, 論列狀聞。 蓋朝家初不知館守倭, 已服其罪, 使之責諭後撤供矣, 今見狀啓, 則館守倭聽代館倭所懇, 以致闌出, 渠自慙悔云。 此便是服罪也。 雖以魚菜托辭, 更無可詰之端。 丁丑年, 旣有撤供前例, 依狀啓撤供似當。" 上可之。 持平李禎億論: "護軍韓配夏, 性本狠愎, 得罪名敎, 擧世唾鄙, 恥與同列。 自叨藩臬, 恣行胸臆, 鞫獄死囚, 符同起訟, 偸占士夫之族山, 而怒其本官之不承風旨, 則置諸貶目, 而終至移訟。 曾居內浦, 與一生、進人, 情好甚篤, 而及爲方伯, 欲奪其先山, 刻期掘移於一朔之內。 牛贖之錢, 隨邑殘盛, 各有定數, 逐朔督捧, 盡歸尾閭。 身爲道主, 敢自推奴, 分遣營隷, (墮)〔隳〕 突閭里, 一道嗷嗷, 無辜籲天。 請削去仕版。" 上不從。 校理李晩堅請克祛虛文, 務修實德, 以爲弭災之本, 上嘉納之。 晩堅又請亟允崔錫鼎遠竄之啓, 上不許。
- 【태백산사고본】 55책 48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5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재정-역(役)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 [註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