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 민진후가 남한 산성의 남격대에 돈대를 쌓아 지키기를 청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남격대(南格臺)를 살펴보았더니, 남격대가 남장대(南將臺)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세 산봉우리가 성중(城中)을 내리누르기 때문에 전부터 성을 쌓고 돈대(墩臺)를 쌓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지금 윤취상(尹就商)과 이기하(李基夏)의 논한 바가 대개 서로 같으나, 단지 윤취상은 저 사람들의 위협을 초래하게 될 것과 군병(軍兵)을 많이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데, 이는 참으로 의견(意見)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전도(三田渡)의 비(碑)가 있는 곳에서는 거리가 약간 멀어 눈에 띄지는 않을 듯합니다. 더욱이 돈대를 쌓고 나무를 심으면, 결코 염려할 만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군병(軍兵)에 이르러서는 혹 주필(駐蹕)110) 하실 것 같으면 저절로 추이(推移)할 방도가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반드시 적(賊)의 모든 군사가 가서 침공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또 민심[人情]이 모두들 남쪽이 허술한 것을 의심하는데, 만약 이곳에 돈대를 쌓는다면 민심을 진정(鎭定)시키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세 봉우리에 모두 쌓을 필요는 없고, 단지 가운데 봉우리의 최요해처(最要害處)에 하나의 돈대를 설치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이른바 가운데 봉우리의 아래는 산기슭이 퍼져 있어 적병의 왕래를 넉넉히 살펴볼 수 있는데, 옛사람들이 기치(旗幟)를 많이 설치하여 적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한다고 하였으니, 하물며 돈대를 쌓아 이를 지키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신(臣) 한 사람의 말로써 단정할 수는 없으니, 이기하·윤취상 등의 서계(書啓)를 가져다 살펴보시고, 널리 묘당(廟堂)의 여러 의논을 물으셔서 장점을 따라 품처(稟處)케 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진후가 또 아뢰기를,
"별파진(別破陣)은 성(城)을 지키기에 가장 긴요하므로, 이정청(釐正廳)에서 군인의 수효를 변통(變通)할 때 현재 있는 2천 명으로써 계하(啓下)111) 하였으나, 묘당의 의논을 얻는 데 따라 첨정(簽丁)을 더하도록 허가하였기 때문에, 신이 전후에 임무를 맡아 잇따라 차례로 수득(搜得)하였으나 이 또한 한정(限定)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찍이 2천 명으로써 4국(局)을 만들었고, 국마다 한 초관(哨官)을 두었으니, 지금 만약 5백 명을 한정해서 첨정을 더하여 5국을 만들되, 한 초관(哨官)을 더 설치하고 이후에는 다시 인원수를 더 늘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로써 정제(定制)하되, 초관(哨官)을 더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5책 48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4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군사-관방(關防)
○丙戌/藥房入診。 提調閔鎭厚曰: "臣看審南漢 南格臺。 蓋南格臺, 與南將臺相對, 而三峰俯壓城中, 故自前有築城築墩之議。 今番尹就商、李基夏所論, 大抵相同, 而但就商, 以或致彼人所嚇及軍兵未易多得爲慮。 此誠有意見矣。 然三田渡碑所稍遠, 似不至礙眼。 況築墩之後, 植以樹木, 則決無可慮。 至於軍兵, 如或駐蹕, 則自有推移之道, 不然, 賊必無全軍往侵之理。 且人情皆以南邊虛踈爲疑。 若築墩於此, 則亦可爲鎭定之一助。 臣意, 不必竝築於三峰, 只就中峰最要害處, 設一墩臺, 似不可已矣。 所謂中峰之下, 山足散漫, 足以占察賊兵之往來。 古人有多設旗幟, 以疑賊心者, 況築墩而守之乎? 然以臣一人之言, 不可斷定, 取考基夏、就商等書啓, 博詢廟堂諸議, 從長稟處, 恐得宜。" 上許之。 鎭厚又言: "別波陣最緊於守城, 故釐正廳軍額變通時, 以見在二千名啓下, 而廟議許令隨得加簽, 故臣前後忝任, 連次搜得, 而此亦宜有定限。 曾以二千名爲四局, 每局各置一哨官矣。 今若限五百名加簽, 俾作五局, 而加設一哨官, 此後勿復增數則好矣。" 上命以此定制, 加出哨官。
- 【태백산사고본】 55책 48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47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