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포(純褒)를 초계하라고 명하다
대신과 비국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했다.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엄집(嚴緝)은 청백(淸白)하고 빈궁(貧窮)한데다가 나이가 늙고 병이 침중하니, 상당한 약물(藥物)을 내리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순포(純褒)·순폄(純貶)을 초계(抄啓)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조(吏曹)에서 오래도록 거행하지 않았었다. 이에 이르러 판서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순포(純褒)의 초계(抄啓)는 진실로 마땅히 십분(十分) 살펴서 신중하게 해야 할 것인데 대강대강 뽑아서 올렸으니, 순폄(純貶)의 초계도 합당하게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수의(繡衣)177) 가 탐문할 적에 빠짐없이 자세하게 않는 것이 아니지만, 비판과 명예의 허실(虛實)이 더러는 사실과 다른 것이 많았습니다. 종전부터 탐문할 때 죄를 입었던 사람이 뒷날에는 더러 볼 만한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설령 참으로 죄를 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한 번 초계(抄啓)에 들어가버리면 곧 금고(禁錮)하는 것이니, 이름을 써 놓고 그 사람을 금고하는 것은 아마도 성세(聖世)에 마땅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탄핵받은 어사(御史) 중에 대관(臺官)이 논계(論啓)하여 지탄(指彈)하게 된 사람은 전조(銓曹)에서 경중을 참작하여 다시는 검거(檢擧)하는 일을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고, 단지 순포(純褒)만 써서 입계(入啓)하도록 하였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상우(趙相愚)가 아뢰기를,
"사람은 청렴한 자와 탐오한 자가 있는가 하면 국가에는 상과 벌이 있는 법인데, 만일 이번에 순포(純褒)만 서계(書啓)하고 순폄(純貶)은 덮어 둔다면, 돌아보건대 어떻게 권면하고 징계하는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교리 이진검(李眞儉)이 또한 아뢰기를,
"탐오(貪汚)한 무리는 이름을 써서 입계(入啓)하여 영구히 앞길을 폐기(廢棄)해 버리더라도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또한 상벌이 분명한 다음에야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는 것이기에, 포장(褒奬)만 하고 폄척(貶斥)이 없음은 아마도 권면하고 징계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고, 최석항은 아뢰기를,
"탐오하여 법에 어긋난 짓을 하는 사람은 대관(臺官)이 규핵(糾劾)하게 되고 조가(朝家)에서도 또한 엄중하게 구핵(究覈)하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권면하고 징계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최석항의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앞서 조정 의논이 도성(都城)을 수축(修築)하고자 하여 돌을 캐서 수레로 운반하느라 군자(軍資)의 저축이 고갈되니, 조정 의논에 모순(矛盾)이 생겨 마침내 또한 중지하게 되었다. 이에 병조 판서 김우항(金宇杭)이 단지 여장(女墻)178) 만 수축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바로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나누어 맡기며 힘을 합쳐 수축하게 했다. 대사간 이야(李壄)가 논계하기를,
"금중(禁中)에 있어서는 근수(跟隨)179) 가 본시 일정한 한도가 있는 법인데, 요사이는 재상(宰相)과 명관(名官)이 드나들 때에 추종(騶從)이 지나치게 많으니, 청컨대 거듭 기조(騎曹)에 신칙하여 한결같이 정식(定式)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도성 안에서 대낮에 행상(行喪)을 함은 분명한 금령(禁令)이 있는데, 요사이는 상한배(常漢輩)들이 백주에 시체를 싸가지고 멋대로 도성 문으로 나가니, 청컨대 경조(京兆)로 하여금 거듭 오부(五部)를 신칙하여 엄중하게 금단(禁斷)을 가하게 하소서."
하고, 장령 양성규(梁聖揆)가 논계하기를,
"송금(松禁)180) 은 거듭 엄하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무뢰(無賴)한 무리들이 산직(山直)들과 결탁하여 계방(契房)을 만들어 놓고 멋대로 몰래 베고 있으니, 청컨대 경조(京兆)로 하여금 일체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34면
- 【분류】농업-임업(林業)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 / 풍속-예속(禮俗)
- [註 177]수의(繡衣) : 암행 어사(暗行御史).
- [註 178]
○壬寅/引見大臣、備局諸臣。 左議政徐宗泰, 陳嚴緝淸白貧窮, 年老病重, 宜給相當藥物, 上可之。 先是, 有純褒純貶抄啓之命, 而吏曹久不擧行。 至是, 判書崔錫恒言: "純褒抄啓, 固宜十分審愼, 從略抄進, 而純貶抄啓, 未知其得當。 蓋繡衣廉問, 非不詳悉, 而毁譽虛實, 或多爽實。 從前廉問時被罪人, 日後或不無可觀之事。 設令眞有負犯, 一入抄啓, 便是禁錮, 書名錮人, 恐非聖世所宜。 臣意被劾御史, 見彈臺啓者, 自銓曹, 參酌輕重, 勿復檢擧宜當。" 上可之, 只令書入純褒。 判敦寧趙相愚曰: "人有廉貪, 國有賞罰。 今若書入純褒, 而掩置純貶, 則顧安有勸懲之意哉?" 校理李眞儉亦言: "貪汚之類, 書名入啓, 永廢前程, 少無所惜, 且賞罰分明, 然後人知畏法, 有褒無貶, 恐非勸懲之道。" 錫恒曰: "貪汚不法之人, 則臺官可以糾劾, 朝家亦可重究, 豈可謂無勸懲乎?" 上是錫恒言。 先是, 朝議欲修築都城, 斲石車運, 軍儲匱竭, 而朝論矛盾, 竟又中寢。 於是, 兵曹判書金宇杭請只修女墻, 乃分授禁衛營、御營廳、訓鍊都監, 同力修築。 大司諫李壄論: "禁中跟隨, 自有定限, 而近來宰相、名官出入時, 騶從過多, 請申飭騎曹, 一依定式施行。 都城內白晝行喪, 明有禁令, 而近來常漢輩, 白日裹尸, 恣出都門。 請令京兆, 申飭五部, 嚴加禁斷。" 掌令梁聖揆論: "松禁非不申嚴, 而無賴之徒, 與山直輩, 結爲契房, 任自偸斫, 請令京兆, 一切禁斷。" 竝從之。
-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34면
- 【분류】농업-임업(林業)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 / 풍속-예속(禮俗)
- [註 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