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서종태가 정제두와 김진규를 서용하기를 청하다
대신과 비국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했다. 좌의정 서종태(徐宗泰)가 수령(守令)들이 교자(轎子)를 타고 가족을 외람되게 거느리는 것과, 각사(各司)의 관원들이 평상복(平常服)으로 본아(本衙)에 드나드는 것을 거듭 금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 또 아뢰기를,
"외방(外方)의 인재는 거개 침체(沈滯)되는 수가 많아, 영남(嶺南) 같은 데는 땅이 넓고 문풍(文風)이 왕성하여 과거한 사람은 매우 많아도 벼슬하게 되는 사람은 언제나 적은데, 전조(銓曹)에서는 매양 자리가 없어서 서용(敍用)하지 못하는 것만 근심하고 있습니다. 국가 초기에는 첨정(僉正)·판관(判官)에 있어서 문관(文官)을 많이 채용하였는데, 근자에는 음관(蔭官)의 길이 매우 번성하여 우족(右族)들이 앞서 차지하기 때문에 이 법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중론(衆論)을 채집(採集)하게 하여, 그 중에 표저(表著)한 사람을 첨정 이하의 모든 자리에 의망(擬望)하여 차임(差任)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前)의 집의(執義) 정제두(鄭齊斗)는 명문가(名門家) 출신으로 천품이 도학자(道學者)에 가까운데, 고요하게 있으며 뜻하는 바를 찾느라 매우 청렴하게 몸을 닦는 지조가 있으니, 우선 번유(藩維)160) 의 소임에 써 보더라도 안될 것이 없을 듯 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렇게 하도록 했다. 또 아뢰기를,
"김진규(金鎭圭)는 사람됨이 고체(固滯)161) 하여 의논을 할 적에 너무 지나친 주장을 하니, 진실로 병통(病痛)이기는 합니다마는 장점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임금의 과실은 일에 따라 솔직하게 아뢰었고, 문학(文學)에 뛰어난 점은 시험을 주관하는 데에 자못 공정하게 하여 청고(淸苦)한 한 대목이 또한 족히 숭상할 만합니다. 그의 병통은 놓아두고 그의 장점만 취하는 것이 진실로 사람을 쓰는 도리에 방해로울 것 없을 것입니다. 당초에 죄명(罪名)이 이미 뚜렷하게 드러나지도 않았고, 이제는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견복(牽復)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역시 영구히 버리려는 것은 아니다. 척리(戚里)162) 인 신하로서 주장하는 의논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억제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임진년163) 의 난리 때 평양(平壤)을 수복(收復)한 뒤에, 선조(宣祖)께서 이여송(李如松)에게 친히 사례하시고, 전후에 승패(勝敗)가 다르게 된 까닭을 물으시니, 이여송이 ‘먼저 온 북방(北方)의 장수는 항시 오랑캐 방어(防禦)만 익혔기 때문에 실패를 가져오게 된 것이고, 뒤에 온 장수는 척 장군(戚將軍)의 어왜법(禦倭法)을 잘 사용했기 때문에 전승(全勝)하게 된 것입니다.’ 했다. 이어 선조께서 척 장군이 써놓은 것을 보여주기 청하셨으나 이여송이 비밀로 하고 내놓지 않았다. 이에 역관(譯官)을 시켜 몰래 구해 내도록 하여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내리어 각 군문(軍門)에서 연습하게 하도록 하셨으니, 바로 지금 준용(遵用)하고 있는 것이 곧 척 장군의 방법인데, 다만 활용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신하로 하여금 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하는 뜻으로 조상우(趙相愚)가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 분부를 내렸었지만, 조상우가 얼마 되지 않아 체직되고 그대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다시 병조로 하여금 그 전에 내린 하교대로 장신(將臣)들에게 분부하여 조용히 강구(講究)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33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법(兵法)
- [註 160]번유(藩維) : 지방 장관을 뜻함.
- [註 161]
○己卯/引見大臣、備局諸臣。 左議政徐宗泰, 請申禁守令之乘轎濫率, 各司官之平服出入本衙者, 上可之。 又言: "外方人才, 率多沈翳, 至如嶺南, 地大而文風盛, 科目甚夥, 而仕宦者常尠, 銓曹每患窠窄, 不得調敍。 國初如僉正、判官, 多用文官, 而近世蔭路太盛, 右族居先, 故此法不得行。 今令該曹, 特採衆論, 其中表著者, 擬差於僉正以下諸窠, 似好也。" 又言: "前執義鄭齊斗, 出於名家, 天資近道, 處靜求志, 深有淸脩之節。 姑先試用於藩維之任, 恐無不可。" 上竝可之。 又曰: "金鎭圭爲人固滯, 論議之間, 主張太過。 此固病痛, 而長處亦多。 君上闕失, 隨事直陳, 長於文學, 主試頗公, 淸苦一節, 亦足可尙。 略其病而取其長, 固不害用人之道, 而當初罪名, 旣不至顯著。 今已年久, 似當牽復。" 上曰: "予亦非欲永棄也。 戚里之臣, 主論太過, 故欲裁抑之也。" 上曰: "壬辰之亂, 平壤收復後, 宣廟親謝於李如松, 問前後勝敗之異, 如松曰: "見來北方之將, 恒習防胡, 故取敗, 後來之將, 能用戚將軍禦倭法, 故全勝。" 宣廟仍請見戚書, 如松秘之不出。 乃令譯官, 潛購出來, 下于都監, 使之鍊習各軍門。 卽今遵用者, 乃戚法, 而但無活法, 故曾令將兵之臣, 講究活法之意, 下敎於趙相愚爲兵判時, 而相愚未幾遞職, 因循至今。 更令兵曹, 依前下敎, 分付將臣, 從容講究可也。"
-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33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병법(兵法)
- [註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