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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7권, 숙종 35년 8월 14일 임자 1번째기사 1709년 청 강희(康熙) 48년

성곽 밖의 이사까지 모조리 헐어내지는 말라고 명하다

지난 밤에 임금이 이사(尼舍) 일의 거행에 관한 조목을 도로 들여오도록 명하여 임금의 분부 내용에다 ‘성곽(城郭) 밖의 이사까지 모조리 헐어내는 것은 필요치 않다.[不必一倂撤毁郭外尼舍中]’ 11글자를 첨가해 넣어 고쳐서 내리고, 이어 분부하기를,

"앞서의 임상덕(林象德)의 소본(疏本)을 보건대, ‘갑신년146) 에 대간이 논계(論啓)하여 정지하게 된 뒤에도 새로 지은 이사가 있다.’고 했으니, 단지 이 한 군데의 것만 철거하고, 이제부터는 거듭 신칙하여 더 짓지 못하도록 하라."

하니, 승정원에서 도로 거둘 것을 청하기를,

"전일에 대관(臺官)이 아뢴 말에 있어 윤허하시는 분부가 마침 성상께서 시학(視學)하시는 날에 내렸으므로, 온 조정의 신료(臣僚)들과 교문(橋門)147) 의 다사(多士)들이 우리 전하께서 성학(聖學)을 존숭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시는 훌륭하신 뜻을 흠송(欽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일찍이 며칠이 되지 않아서 곧 이처럼 분부를 고쳐서 내리시게 되어, 아침에 내린 영을 이미 거행하다가 도로 번복하게 되고, 성상의 덕이 이미 빛나다가 도로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알기는 해도 인(仁)하게 지켜가지 못하는 수가 있다.’고 했으니, 이는 오늘날 전하께서 마땅히 맹성(猛省)하셔야 할 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들어주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어제 간신(諫臣)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했을 적에 ‘아뢴 대로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장 가까운 곳의 것만 철거하라는 것으로 말을 하여 비답하였던 것이다. 나의 본래의 뜻이 일체 모두 철거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만일 대관(臺官)이 아뢴 말을 윤허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잘못 안 것이다. 대저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방도가 모두 다 철거하느냐 않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전에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답(答)하신 비답 내용에 ‘어찌 꼭 태무(太武)가 사문(沙門)들을 베이고 불사(佛寺)를 무너버리듯이 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신 분부는 지극히 합당하게 하신 것이었다. 성조(聖祖)께서 비답하신 것이 과연 미안스러운 것이었다면, 사신(詞臣)이 어찌하여 깊은 궁중(宮中)의 기록에 실어 놓았겠는가? 이번에 참작해서 처분을 내린 것도 대개는 이런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그것을 존숭하여 받드느라 그런 것이겠느냐?"

하니, 헌납 오명항(吳命恒)이 마침 대각(臺閣)에 나갔다가 즉시 도로 거둘 것을 아뢰는 글을 띄웠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또 차자를 쟁집(爭執)하기를,

"전하께서 인용(引用)하신 성조(聖祖)의 비답하신 뜻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만일 이번에 전하께 온 나라의 사문들을 베이고 팔로(八路)의 불사(佛寺)를 부수어 버리기를 권하였다면 마땅히 전하께서 이를 들어 비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마는, 이번에 대신(臺臣)이 철거하기를 청한 것은 서울에 가까운 4, 5이사(尼舍)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도리어 일체를 모두 헐어버리기가 무엇이 어려워서 구태여 태무(太武)의 일을 끌어다가 굳이 거절하는 말거리를 삼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태무의 일은 곧 성조께서 비답하신 말씀에 있는 일인데, 집어내어 말을 하였음은 자못 미안스럽게 된 일이다."

하였다. 정언 이정제(李廷濟)가 또 상소하기를,

"신(臣)이 그날 진주(陳奏)를 겨우 마치자 천어(天語)148) 가 진동하듯 하며 즉시 철거하도록 하시고 조금도 유난(留難)하심이 없으셨기에 진실로 성상께서 마음이다만 선대(先代)의 뜻에 따라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 계신 줄 알았었는데, 오늘은 이처럼 분부를 내리시게 되니 어찌 개탄(慨歎)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후사(喉司)에 비답한 말에 나의 뜻을 다 말했다."

하였다. 오명항이 또 논계(論啓)하기를,

"관직을 제수할 사람에 있어서 해유(解由)를 고찰해 보는 것은 곧 변경할 수 없는 법입니다. 무변(武弁)들 중에는 해유를 내지 않고도 외람되이 경직(京職)과 외직(外職)에 제수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병조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다시 차임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3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

  • [註 146]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 [註 147]
    교문(橋門) : 반궁(泮宮) 주위를 물로 둘러 싸고서 사문(四門)을 내고, 그 문 밖에 다리를 놓은 것. 여기서는 곧 성균관을 뜻함.
  • [註 148]
    천어(天語) : 임금의 말.

○壬子/去夜, 上命還入尼舍事擧行條, 上敎中添入不必一倂撤毁, 郭外尼舍中, 十一字改下, 仍敎曰: "頃觀林象德疏本, 甲申臺論停止後, 有新結尼舍云, 只撤此一處, 從今申飭, 毋得加構。" 政院請還收曰: "頃日臺啓頷可之敎, 適下於聖上視學之日, 滿廷臣僚, 橋門多士, 莫不欽頌我殿下尊聖學闢異端之盛意, 而曾未數日, 乃有此改下之敎, 致令朝令, 旣行而復反, 聖德旣光而復晦。 傳曰: ‘知及之仁, 不能守之’, 此今日殿下之所當猛省處也。" 上不聽曰: "日昨諫臣之以所懷陳達也, 不曰依啓, 以只撤最近處, 措辭批下, 予之本意, 不在於一倂撤去也。 若以臺啓爲頷可, 則是錯認也。 夫闢異端之道, 不在於盡撤與否。 昔我宣祖大王答館儒批旨中, 何必如太武之誅沙門, 毁佛寺之爲哉之敎, 至爲允當。 聖批若果未安, 則詞臣何以載之於幽宮之誌也? 今玆參酌處分, 蓋出此意。 是豈一毫崇奉而然哉?" 獻納吳命恒適詣臺, 卽發還收之啓, 上不從。 玉堂又上箚爭之曰:

殿下所引聖祖批旨, 尤有所不然者。 今若勸殿下, 以誅一國之沙門, 毁八路之佛寺, 則宜殿下以此爲喩, 而今臺臣所請毁者, 不過逼近京城之四五尼舍, 則顧何難於一倂毁去, 而强取太武事, 以爲固拒之資乎?

上答以太武事, 卽聖祖批辭, 而拈出爲言, 殊涉未安。 正言李廷濟又上疏曰:

臣於伊日, 陳奏纔了, 天語如響, 卽令撤去, 無少留難, 固知聖意, 只在於遵先志斥異端, 而今日下敎, 至於如此, 豈不慨然乎?

上答以喉司之批, 備悉予意。 命恒又論: "除職者, 攷解由, 乃是不易之典。 武弁中未出解由, 冒授京外職者有之云。 請令兵曹, 詳査改差。" 從之。


  • 【태백산사고본】 54책 4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3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