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 46권, 숙종 34년 12월 14일 병진 2번째기사 1708년 청 강희(康熙) 47년

이윤문이 자신의 진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원하다

이윤문(李允文)이 대각(臺閣)에 나가 인피(引避)하기를,

"신이 정팔익(鄭八翼)을 도로 가두자는 일과 송정규(宋廷奎)를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않는 일로써 논열(論列)한 것이 있었는데, 오직 윤허[允兪]를 내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엄지(嚴旨)를 내리시어, 신은 해혹(駭惑)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대저 정팔익이 뇌물(賂物)을 써서 살기를 도모했다는 말은 입을 가진 사람은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형관(刑官)이 출사(出仕)하는 날에 미쳐서는 병이 위중하므로 형추(刑推)를 정지하자고 청한 것은 매우 수상(殊常)한 일인데도, 연기(延期)하여 석 달[三朔]이 지나도록 다시 형추를 가하지 않다가 바로 전석(前席)에서 억지로 끌어당기어 실정(實情)을 알고 작처(酌處)하였으니, 일찍이 전파(傳播)된 말이 이에 이르러서 오묘하게 증험(證驗)되었습니다. 신의 이른바 ‘밀지(密地)에서 살기를 도모하였다.’는 것이 과연 여기에서 나온 것인데도, 법령(法令)을 봉행(奉行)하는 신하가 방자한 마음으로 내렸다 올렸다 한다면 방자(放恣)하다는 공척(攻斥)을 어찌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송정규(宋廷奎)의 경우는 젊었을 때에도 궁하여 절약하는 데다 집에는 병모(病母)가 있었으며, 살아서는 봉양(奉養)하고 죽어서는 장사(葬事)지내는 것을 오로지 그 아내[妻]에게 내맡기었습니다. 그가 사환(仕宦)하여 출세(出世)하고 첩(妾)을 정하게 되자, 아내와는 원수가 되어 박축(迫蹙)495) 하고 조절(操切)496) 함이 끝이 없었습니다. 모아두었던 은화(銀貨)를 처음에는 그 아내에게 맡기다가, 아내가 사용(私用)할까 의심하고는 갑자기 사납게 화를 내며 손으로 구타(毆打)하고 머래채를 휘어잡아 목뼈[頸骨]를 중상(重傷)시키고, 두 손을 뒤로 합쳐 묶고 거꾸로 매달고서 도적(盜賊)을 다스리는 형벌을 시행하니, 원통(寃痛)하게 부르짖는 소리가 골목까지 들렸습니다. 신의 이른바 ‘패란(悖亂)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전임(前任)한 주군(州郡)에서는 대단히 많은 은화를 가지고 돌아가서 거둘어 들였다 흩어 놓았다 하며 온갖 방법으로 모리(牟利)를 했습니다. 한 명의 통역관(通譯官)이 있었는데, 그에게 대출(貸出)한 것이 백화(百貨)가 넘게 되자, 즉시 상환(償還)하지 못했습니다. 금년 중춘(仲春)에 그의 패자(悖子)와 악첩(惡妾)으로 하여금 관동(關東) 열읍(列邑)의 하인[邸人]과 집 안의 사나운 노복(奴僕)을 거느리고 그 집을 짓밟고 들어가 표탈(剽奪)497) 을 자행(恣行)하여 크고 작은 가자(家資)를 모두 움켜쥐고 가서 마침내 빚을 진 사람으로 하여금 목을 매어 죽게 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나, 이웃에 우거(寓居)하는 사대부(士大夫)의 구해(救解)가 있음을 힘입어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신의 이른바 ‘성품이 사납고 한팍[狠愎]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제주(濟州)에 있을 적에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진기(珍奇)한 물건을 모두 찾아 모으고, 백성의 재물(財物)을 약탈(掠奪)하여 자기(自己)를 살찌운 것은 우선 두고서 논하지 않더라도 요로[要津]에 아첨하는 일은 무부(武夫)보다도 심하였습니다. 종모(騣帽)·종립(騣笠)과 패기(貝器)·패영(貝纓)을 달마다 증유(贈遺)하였으니, 신의 이른바 ‘교묘히 뇌물을 쓴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본직(本職)에 임명하게 되자, 더욱 간험(姦險)하고 탐람(貪婪)한 행위를 거리낌없이 행하였습니다. 인삼(人蔘)을 봉진(封進)할 즈음에는 점퇴(點退)498) 하는 방법이 많아 무법(無法)하게 징수(徵收)하는 것이 한도가 없습니다. 어공(御供)은 비록 줄더라도 사사롭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갑절에서 다섯 갑절이나 됩니다. 심약(審藥)499) 과 삼상(蔘商)이 모두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의자(衣資)를 억지로 사고 초피(貂皮)를 사들여 기녀(妓女)를 기쁘게 한 것은 서울이나 지방에 모두 물주(物主)가 있고 감영(監營) 아래의 이목(耳目)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 간특(奸慝)한 일을 숨기어 드러내지 않고 교활(巧猾)한 말로 사람을 미혹(迷惑)시켜 한 방면(方面)의 중임(重任)에 참여하여 엽등(躐等)하여 오르는 욕망을 견동(牽動)하여 양전(量田)하는 행정(行政)을 담당(擔當)하여서는 마침내 혹독한 해독(害毒)을 초치(招致)하였습니다. 만약 송정규의 재능(才能)이 넉넉히 이 일을 처리한다면 신은 홀로 무슨 마음으로 감히 저패(沮敗)시키는 의논을 내겠습니까? 정성이 임금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성교(聖敎)가 엄준(嚴峻)하였으니, 장차 무슨 안면(顔面)으로 다시 대각(臺閣)의 끝자리를 모독(冒瀆)하겠습니까?"

하자, 답하기를,

"사직(辭職)하지 말라."

하니, 이윤문이 물러나 기다렸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0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註 495]
    박축(迫蹙) : 찡그림.
  • [註 496]
    조절(操切) : 억누름.
  • [註 497]
    표탈(剽奪) : 협박하여 빼앗음.
  • [註 498]
    점퇴(點退) : 공물(貢物)의 규격 검사에서 불합격되어 수납(收納)하지 아니하는 일.
  • [註 499]
    심약(審藥) : 궁중(宮中)에 바치는 약재(藥材)를 조사하기 위하여 각도(各道)에 파견하던 종9품의 벼슬.

李允文詣臺引避曰: "臣以鄭八翼還囚事, 及宋廷奎罷職不敍事, 有所論列矣, 不惟不賜允兪, 反下嚴旨, 臣不勝駭惑焉。 夫八翼行賂圖生之說, 有口皆傳。 及刑官出仕之日, 病重停刑之請, 極涉殊常, 而延過三朔, 不復加刑, 乃於前席, 强引知情酌處, 則曾所傳播之言, 到此沕驗。 臣所謂密地圖生者, 果出於此, 而奉法之臣, 恣意低昻, 則放恣之斥, 烏得免乎? 至於宋廷奎, 少時窮約, 家有病母, 生養死葬, 專靠其妻。 及其宦成卜妾, 與妻爲仇, 迫蹙操切, 靡有紀極。 所聚銀貨, 初付其妻, 疑妻私用, 遽發暴怒, 手自歐捽, 重傷頸骨, 反接倒懸, 施以治盜之刑, 冤呼之聲, 徹於街巷。 臣所謂悖亂者此也。 前任州郡, 鳩聚許多銀貨, 携歸斂散, 牟利百端。 有一象胥, 貸出過百貨而未卽償。 今年仲春, 使其悖子、惡妾, 領率關東列邑邸人及家內悍僕, 躪入其家, 肆行剽奪, 大小家資, 竝被攫去, 卒使負債之人, 至有雉經之擧, 賴有隣寓士夫之救解, 得以回甦。 臣所謂狠愎者此也。 其在濟州則土産珍奇, 竝行搜括, 剝割肥己, 姑捨勿論, 諂事要津, 甚於武夫。 駿帽、駿笠、貝器、貝纓, 逐月贈遺, 臣所謂巧行包饋者此也。 及授本職, 益肆姦婪, 人蔘封進之際, 點退多方, 橫斂無藝, 御供雖減, 私捧倍蓰。 審藥、蔘商, 俱在, 焉可誣也? 衣資勒買, 貿貂悅妓, 於京於外, 皆有物主, 營下耳目, 有不可掩。 噫! 隱慝未著, 巧舌惑人, 挈與方面之重, 牽動躐躋之慾, 擔當量田之政, 竟致毒痛之害。 若夫廷奎之才, 足了此事, 則臣獨何心, 敢生沮敗之論? 誠未上格, 聖敎嚴峻, 將何顔面, 復冒臺端乎?" 答曰: "勿辭。" 允文退待。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0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