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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46권, 숙종 34년 11월 20일 임진 1번째기사 1708년 청 강희(康熙) 47년

강화도에 축성하는 문제가 논의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최석정(崔錫鼎)이 저 나라[淸國]에서 태자(太子)를 폐출(廢黜)한 이유로써 먼저 진위사(陳慰使)를 차견(差遣)하여 칙사(勅使)가 오기를 기다리게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각각 진달(陳達)하게 하니,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인엽(李寅燁)이 말하기를,

"자문(咨文) 가운데에 다만 ‘폐출(廢黜)’이란 두 글자만 있을 뿐이고 포고(布告)한 일이 없으니, 객사(客使)가 온 뒤에 사신(使臣)을 겸하여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이인엽이 말하기를,

"근래에 선재(船材)468) 로 쓸 산에 나무가 없으니, 만약 개조(改造)하는 기한(期限)을 조금 물린다면 양목(養木)하는 데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기한을 20개월[朔]을 물리쳐 수사(水使)에게 자주 적간(摘奸)하도록 하고, 비록 기한 전이라도 이미 썩었다면 고치게 하라."

하였다. 이인엽조령(鳥嶺) 등지는 내년 봄에 다달아 비로소 축성(築城)하고 추풍령(秋風嶺)·팔량치(八良峙)·운봉(雲峰) 등지는 차례로 설축(設築)하자는 뜻으로써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이인엽이 이어서 말하기를,

"저들 청나라에 사변(事變)이 있으면 우리 나라는 마땅히 자강(自强)하는 방책을 생각해야만 하니, 강도(江都)는 반드시 속히 내성(內城)을 쌓아서 의귀(依歸)하는 곳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고, 최석정(崔錫鼎)은 말하기를,

"강도(江都)에 축성(築城)하는 것은 이인엽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수(留守)로 하여금 올라오게 하고 묘당(廟堂)에서 지휘(指揮)하여 이를 결정하라."

하였다. 이인엽이 말하기를,

"서변(西邊)의 성지(城池)도 또한 한결같이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 마땅히 일체(一體)로 수습(收拾)하는 뜻으로써 감사(監司)에게 은밀히 유시(諭示)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응교(應敎)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송(宋)나라 가정 년간(嘉靖年間)에 금인(金人)이 몽고(蒙古)와 틈이 있었는데, 진덕수(眞德秀)는 밤중에도 방황(彷徨)하면서 ‘국가에 다사(多事)함이 이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하고는 이내 자강(自强)하는 계책으로써 누누(縷縷)이 진백(陳白)하였습니다. 금(金)나라에 위망(危亡)의 징조가 있으면 송(宋)나라에 있어서는 다행스럽게 여길 만한데도, 진덕수(眞德秀)는 도리어 걱정스럽게 여겼으니, 대개 그 사세(事勢)가 강북(江北)에 난리(亂離)가 있으면 병화(兵禍)가 반드시 남조(南朝)에 미치게 되는 까닭이었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대부분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염려하는 것이 있으니, 사리(事理)를 미루어 생각한다면 또한 지나친 염려는 아닙니다. 지금 안에서는 기강(紀綱)이 퇴폐(頹廢)하고 밖에서는 백성[生民]이 도탄(塗炭)에 빠지었으니, 혹은 경급(警急)한 일이 있으면 토붕 와해(土崩瓦解)되는 근심은 형세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실덕(實德)을 닦고 혜정(惠政)을 베풀어 인심(人心)을 공고(鞏固)하게 결합하며 당의(黨議)를 화평(和平)시키고 충실(忠實)을 숭상하여 인재(人才)를 수습(收拾)하고, 검약(儉約)을 숭상하며 낭비[浮費]를 줄여서 민력(民力)을 완양(完養)하는 것이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는 계책이 되는데, 그 근본은 모두 인주(人主)의 한 마음에 있습니다. 번문(繁文)의 말절(末節)을 모두 소제(掃除)한다면 그것이 자강(自强)하는 방법에 있어서 생각이 절반(折半)을 넘게 될 것입니다. 성지(城池)의 역사는 아마 오늘날에 마땅히 힘써야 할 급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이인엽이 말하기를,

"강변(江邊)에서 과거(科擧)를 설치하는 것은 진실로 위열(慰悅)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시고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인엽의 말로써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명하여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강변(江邊)에 보내어 명년 봄을 기한하여 과거를 설행하게 하였다. 장령(掌令) 양성규(梁聖揆)가 아뢰기를,

"근래에 여항(閭巷)의 무식(無識)한 무리가 초상 장사[送終]를 치르는 즈음에 시신(屍身)을 즐겁게 한다고 일컫고는 풍악(風樂)을 성대하게 베풀어 연집(燕集)469) 한 것과 거의 동일합니다. 가창(歌唱)과 곡성(哭聲)을 다 같이 행하므로, 보고 듣는 사람이 모두 몹시 놀라고 있으니, 일의 한심스러움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 풍속(風俗)을 바로잡는 방법에 있어서 폐단을 교정(矯正)하는 거조(擧措)가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경조(京兆)470) 로 하여금 오부(五部)에 신칙(申飭)하여 드러나는 대로 엄중히 추구(推究)하여 일체로 금단(禁斷)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07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기(軍器) /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풍속-예속(禮俗)

  • [註 468]
    선재(船材) : 배를 만들 재목.
  • [註 469]
    연집(燕集) : 잔치의 모임.
  • [註 470]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壬辰/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崔錫鼎以彼國廢太子, 請先差陳慰使, 以俟勑使之來。 上令諸臣各陳, 禮曹判書李寅燁曰: "咨文中, 止有廢黜二字, 而無布告之事, 客使來後, 兼送使臣似好。" 上從其言。 寅燁言: "近來船材濯濯。 若差退改造之限, 則養木似勝。" 上曰: "退限二十朔, 水使數數摘奸, 雖限前, 已朽則改之。" 寅燁鳥嶺等處, 趁明春始築, 秋風嶺八良峙雲峰等, 次第設築之意, 陳達, 上可之。 寅燁仍言: "彼中有事變, 我國宜思自强之策。 江都必速築內城, 可作依歸之所。" 錫鼎曰: "江都築城, 寅燁言得之矣。" 上曰: "留守使之上來, 而廟堂指揮爲之。" 寅燁曰: "西邊城池, 亦不可一任頹圮。 宜以一體收拾之意, 密諭於監司。" 上可之。 應敎李台佐曰: " 嘉靖年間, 金人蒙古有釁, 眞德秀中夜彷徨以爲: ‘國家多事, 自此始矣’, 仍以自强之策, 縷縷陳白。 有危亡之兆, 在爲可幸, 而德秀反以爲憂, 蓋其事勢, 江北有亂, 禍必及於南朝故也。 今日廷臣, 擧有先事之慮, 推之事理, 亦非過慮。 目今內而紀綱頹廢, 外而生民塗炭, 脫有警急, 土崩之患, 勢所必至。 惟當修實德孚惠政, 而固結人心, 平黨議尙忠實, 而收拾人才, 崇儉約省浮費, 而完養民力, 爲固國之計, 其本都在人主之一心。 繁文末節, 竝皆掃除, 則其於自强之道, 思過半矣。 城池之役, 恐非今日當務之急也。" 上曰: "儒臣言甚好。" 寅燁曰: "江邊設科, 實爲慰悅之一道。 問于大臣、諸臣而爲之似好。" 諸臣皆以寅燁言爲宜, 上命遣試才御史於江邊, 趁明春設科。 掌令梁聖揆啓曰: "近來閭巷無識之輩, 送終之際, 稱以娛屍, 盛張風樂, 殆同燕集。 歌哭竝行, 瞻聆俱駭, 事之寒心, 莫此爲甚。 其在正風俗之道, 不可無矯弊之擧。 請令京兆, 申飭五部, 隨現重究, 一切禁斷。" 上曰: "依啓。"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07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기(軍器) /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