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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6권, 숙종 34년 10월 30일 임신 1번째기사 1708년 청 강희(康熙) 47년

부제학 조태구가 연령군의 제택에 대한 일로 아뢰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니, 부제학(副提學)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신이 마침 호조(戶曹)의 문서(文書)를 보니, 왕자군(王子君)의 집을 매매(賣買)하는 데 값을 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은(銀) 3천 3백여 냥으로써 계달(啓達)하였는데, 값을 줄여서 정하라는 교시(敎示)가 있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성상(聖上)의 비용(費用)을 줄이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비록 참작(參酌)하여 감정(減定)하더라도 그 액수가 거의 3천 냥에 가까우니 돈[錢]으로써 계산한다면 만 냥(萬兩)을 넘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이것은 진실로 시세(時勢)가 아니며 또한 일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지난날 신이 승정원(承政院)에 있을 때에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돈 2만 냥을 청하여 기민(饑民)을 진구(賑救)한다 하였으나, 국고의 저축이 고갈되어 유사(有司)가 응낙(應諾)하지 못했으므로, 신은 가만히 상심(傷心)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한 궁가(宮家)의 비용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으니, 굶주린 백성들이 들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국가에서 구렁에 빠져죽는 백성은 구휼(救恤)하지 않으면서도 한 채의 큰 집[巨第]을 건축하는 데에 비용은 만 냥이 넘는다.’고 할 것이니, 나라의 체면(體面)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적에 한 문제(漢文帝)는 백금(百金)을 아끼어 노대(露臺)451) 를 건축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것은 중인(中人) 열 집의 재산(財産)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지극한 말입니다. 지금 만약 이것을 연출(損出)하여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한다면 활인(活人)하는 것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또 이 구가(具家)는 바로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외가(外家)이며, 인헌 왕후(仁獻王后)452) 의 부모[考妣]의 사당(祠堂)이 있습니다. 훈척(勳戚)이 여러 세대(世代)를 전수(傳守)하는 집이 하루아침에 국가(國家)에 들어오고, 끝내는 그 사당(祠堂)을 헐어서 옮기게 될 것이니 첫 번째 불가한 것이며, 왕자(王子)의 제택(第宅)이 시문(市門)에 가까운 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이며, 그 집이 시장(市場)에 가까와서 본 값은 매우 비싼데 값을 감하여 준다면 원통하다고 일컬을 것이며, 값을 시가(時價)에 따라서 준다면 3천 냥도 오히려 적을 것입니다. 국가에서 집을 사려고 한다면 어느 곳인들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드시 이 난편(難便)한 집을 사서 사람들의 몰래 비평하는 것을 초래(招來)하는 것입니까? 이는 세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이제 만약 변두리에 궁벽(窮僻)하면서 대궐(大闕)에 가까운 곳에다 구한다면 비용이 이와 같이 많은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사람의 보고 듣는 이에게 놀라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왕자(王子)가 살림을 나는[出閤] 시기가 아직 멀었으며, 명빈(榠嬪)453) 은 다른 자제(子弟)가 없으니, 그 궁(宮)도 또한 마땅히 왕자의 본제(本第)가 될 수 있는데, 어찌 반드시 다른 데에서 구하는 것입니까? 설혹 마지못해서 별도로 제택(第宅)을 건축하더라도 이러한 재이(災異)가 거듭 겹쳐서 팔도(八道)가 같이 굶주리는 날을 당하여 제택을 건축하는 것은 몹시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뜻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마음에 두시고 채택해 받아들이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중지하시고, 유사(有司)를 신칙하여 한결같이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것으로써 급무(急務)를 삼으시는 것이 진실로 변변치 못한 신의 소망(所望)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根本)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습니다. 민생(民生)이 자기 직업을 즐거워하여 국가가 편안하게 되면, 어찌 왕자(王子)의 제택(第宅)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궁가(宮家)를 지어 주는 것을 만약 내가 창시(創始)하였다면, 부제학(副提學)의 주달(奏達)이 옳겠지마는, 이것은 조종조(祖宗朝)에 이미 시행된 규례(規例)이다. 또 집은 그 크고 작음에 따라서 값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니, 어찌 한 가지 예(例)만으로 이를 정하겠는가? 이로써 방색(防塞)하는 것은 진실로 뜻밖의 일이다."

하였다.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신은 청컨대 그 말을 끝내겠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일로써 말한다면 신의 선조(先祖)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彊)은 곧 성종조(成宗朝)의 부마(駙馬)입니다. 관아(官衙)에서 제택(第宅)을 건축하였으나, 그 터가 4, 5백 칸을 지나지 않았으며, 간가(間架)의 수도 또한 매우 협소(狹少)했는데, 옛집이 있는 것을 신도 오히려 보게 되었습니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집은 앞에 눌러 굽어보는 인가(人家)가 있으므로, 옹주(翁主)가 매우 민망하게 여겨 수가옥(數架屋)을 세워 막아 주기를 청하였으나, 선조(宣祖)께서 집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특별히 완렴(薍簾) 수부(數浮)를 내려 주어 막아 가리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익히 들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 검소(儉素)함을 숭상(崇尙)한 덕은 이와 같은 것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殿下)께서 마땅히 본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주달(奏達)한 것은 진실로 간절하고 지극한 의논(議論)입니다. 근년에 연달아 흉년을 만나 국고의 저축한 것이 죄다 없어져서 충청도(忠淸道)에 전후(前後)로 보내었던 진자(賑資)만도 거의 만여 냥(兩)에 이릅니다마는, 앞으로는 잇댈 수가 없으니, 왕자(王子)의 출합(出閤)은 마땅히 수년(數年) 뒤에 있어야겠습니다. 비록 내간(內間)의 형세가 어떠한지를 알 수 없지마는, 제택(第宅)을 영조(營造)하는 것은 우선 정지시키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유신(儒臣)이 주달(奏達)한 것을 마땅히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집을 건축[成造]하는 것은 반드시 길년(吉年)을 사용해야만 하는데, 명년에 역사를 시작한 뒤에도 자칫하면 수삼 년을 경과(經過)하고, 혹은 5, 6년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형세가 쉽지 않은 것이 자연히 이와 같을 것이므로, 집을 비록 사서 둔다 하더라도 본시 금년 안에 반드시 영조(營造)하려는 의도(意圖)는 아니다. 유신(儒臣)이 진달(陳達)한 것은 곡절(曲折)을 알지 못한다고 이를 만하다."

하니, 대사헌(大司憲) 이정겸(李廷謙)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비록 성심(聖心)에 감동시키지는 못하여 성상께서 불울(拂鬱)한 기색(氣色)이 현저히 있으셨지마는, 신은 성덕(聖德)에 겸연(慊然)454) 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집은 마땅히 연잉군(延礽君)의 집[家舍]과 다름이 없는데도 그 집과 비교하여 누백 금(累百金)을 더 주었으니, 일후(日後)에 점차로 값을 더 보태는 폐단(弊端)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태구(趙泰耉)는 말하기를,

"만약 3천 냥으로써 터를 사면 집을 지을 때에는 또 장차 누천 금(累千金)을 소비하여야 하니, 어찌 과중(過重)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잉군(延礽君)의 집 값은 바로 2천 냥이었다. 집의 터[基垈]와 간가(間架)가 다름이 있는 까닭으로 값의 많고 적은 것이 같지 않았는데, 이제 만약 한결같이 준 값에 의하면 그 주인이 반드시 장차 원통함을 일컬을 것이니, 어찌 강제로 결정하겠는가? 이 말은 전연 묘리(妙理)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0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재정-상공(上供) / 구휼(救恤) / 역사-전사(前史)

  • [註 451]
    노대(露臺) : 지붕 없는 정자.
  • [註 452]
    인헌 왕후(仁獻王后) : 원종(元宗)의 비(妃).
  • [註 453]
    명빈(榠嬪) : 연령군(延齡君)의 생모(生母).
  • [註 454]
    겸연(慊然) : 마음에 차지 않은 모양.

○壬申/引見大臣、備局諸臣。 副提學趙泰耉曰: "臣適見戶曹文書, 有王子君家舍買賣定價之事。 初以銀三千三百餘兩啓達, 而有減價之敎。 此固出於聖上省費之意, 而雖參酌減定, 厥數殆近三千, 以錢計之, 則過萬也。 臣以爲此實非時, 亦非事宜也。 向日臣在政院時, 忠淸監司請錢二萬, 以賑饑民, 而國儲罄竭, 有司無以應之, 臣竊傷之。 今一宮家之費, 至於如此, 飢民聞之, 必曰: ‘國家不恤塡壑之民, 而營一巨第, 所費過萬’ 云爾, 則其於國體, 何如也? 昔 文帝惜百金, 而不營露臺曰: ‘此中人十家之産。’ 誠至言也。 今若捐此賑民, 則所活豈不多乎? 且此家, 乃我仁祖大王之外家也, 仁獻王后考妣祠堂在焉。 勳戚累世傳守之家, 一朝入於國家, 終至於撤移其祠堂, 一不可也, 王子第宅近市門, 二不可也, 厥家近市, 本直甚高, 減給則稱冤, 准給則三千猶少也。 國家如欲買家, 則何處不可, 而必買此難便之家, 以招人之竊議乎? 三不可也。 今若求之於巷僻近闕之處, 所費不至若是之多, 而必不致駭人之瞻聆。 且王子出閤之期尙遠, 而䄙嬪無他子弟, 其宮亦當爲王子之本第, 何必他求? 設或不得已別爲營第, 當此災異沓臻, 八路同飢之日, 求營第宅, 甚非恐懼修省之意。 伏願聖明, 留神採納, 亟寢成命, 申飭有司, 一以救民爲急, 實區區之望也。 民惟邦本, 本固邦寧。 民生樂業, 國家乂安, 則豈憂王子之無第宅乎?" 上曰: "宮家造給, 若是予創開, 則副學所達可矣, 而此乃祖宗朝已行之規。 且家舍隨其大小, 而價以之低昻, 何可一例爲之? 以此防塞, 誠是意外也。" 泰耉曰: "臣請畢其說。 以我祖宗朝事言之, 臣之先祖漢川尉 趙無彊, 卽成宗朝駙馬也。 官營第宅, 其垈不過四五百間, 間架之數, 亦甚狹少, 故舍之存, 臣猶及見之。 東陽尉 申翊聖家, 前有壓臨之人家, 翁主深以爲悶, 請建數架屋以障之, 宣廟不許建屋, 特下薍簾數浮遮蔽。 此則臣聞之熟矣。 祖宗朝崇儉之德, 有如是者, 此豈非殿下之所當法者乎?" 錫鼎曰: "儒臣所達, 誠是切至之論也。 近年連値凶歉, 國儲蕩然, 忠淸道前後所送賑資, 殆至萬餘兩, 前頭無以繼之。 王子出閤, 當在數年之後, 雖未知內間形勢之如何, 而第宅營造, 姑停無妨。 儒臣所達, 宜加體念矣。" 上曰: "成造須用吉年, 明年始役之後, 動經數三歲, 或至五六年, 形勢之未易, 自然如此。 家舍雖爲買置, 本非今年內必欲營造之意也。 儒臣所達, 可謂不知曲折矣。" 大司憲李廷謙曰: "儒臣之言, 雖不槪於聖心, 自上顯有拂鬱之色, 臣以爲有慊於聖德也。 但此家, 宜與延礽君家舍無異, 而比其家過累百金, 日後次次添價之弊, 亦不可不念矣。" 泰耉曰: "若以三千兩買基, 造家時, 又將費累千金, 豈不過重耶?" 上曰: "延礽君家價, 乃二千兩也。 家之基垈、間架有異, 故價之多少不齊。 今若一依給價, 則其主必將稱冤, 何可勒定? 此言全不知妙理矣。"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30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재정-상공(上供) / 구휼(救恤)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