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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6권, 숙종 34년 4월 21일 정묘 1번째기사 1708년 청 강희(康熙) 47년

부사용 민치대가 영종도보다 인천에서 방어하면 득책이 될 것이라는 상소를 올리다

부사용(副司勇) 민치대(閔致岱)가 상소(上疏)하기를,

"대저 인천(仁川)영종(永宗)210) 은 해방(海防)의 요로(要路)입니다. 왕성(王城)211) 과의 상거(相距)가 1백 리도 안되는 곳이며, 삼남(三南)212) 에 문호(門戶)가 되어 강도(江都)213) 와 더불어 서로 성원(聲援)하게 되니, 강도(江都)에 중점(重點)을 돌리는 계책으로는 영종(永宗)을 버리고는 그 형세를 의지할 데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故) 상신(相臣) 홍명하(洪命夏)행궁(行宮)214)인천(仁川)월미도(月尾島)에 설치하기를 건백(建白)하였습니다. 이른바 월미(月尾)라는 곳은 곧 인천(仁川)과 영종도(永宗島) 사이의 소치(小峙)215) 이니, 그의 의도(意圖)는 대개 일의 위급하기가 병자년216) ·정축년217) 과 같이 되는데도, 유시(流澌)218) 가 끊어지고 갑곶진(甲串津)을 통할 수 없게 된다면, 인천(仁川)으로부터 영종(永宗)에 이르고, 영종(永宗)으로부터 강도(江都)에 이르게 될 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영종(永宗)을 승격하여 방어사(防禦使)로 삼는 것은 계책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마는, 지방이 수십 리(數十里)에 지나지 않고 백성이 수백 호(數百戶)에 차지 않으면서 바다속에 외롭게 있는데, 인천(仁川)은 3면(面)이 바다에 닿아 있고 한 면(面)만이 육지에 연(連)하여 양서(兩西)219) 와 삼남(三南)을 호령(號令)하는 것이 함진(函秦)220)백이(百二)221) 와 같은데, 이것을 하지 않고 인천(仁川)을 버리고서 영종(永宗)에서 방어(防禦)한다면 또한 소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만약 영종(永宗)을 옮겨서 인천(仁川)에서 방어하기를, 마치 광량(廣梁)의 방어(防禦)를 삼화(三和)에 옮기는 것과 같이 한다면 득책(得策)이 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사(疏辭)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29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註 210]
    영종(永宗) : 영종도(永宗島).
  • [註 211]
    왕성(王城) : 서울.
  • [註 212]
    삼남(三南) : 충청도·경상도·전라도.
  • [註 213]
    강도(江都) : 강화도.
  • [註 214]
    행궁(行宮) : 임금이 거둥할 때에 임시로 머무는 별궁.
  • [註 215]
    소치(小峙) : 조금 우뚝 솟은 산.
  • [註 216]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217]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218]
    유시(流澌) : 얼음이 녹아서 흘러 내려감.
  • [註 219]
    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
  • [註 220]
    함진(函秦) : 진(秦)나라 함곡관(函谷關).
  • [註 221]
    백이(百二) : 지세(地勢)가 험준하여 타국보다 백배의 힘이 있다는 말임. 곧 군사 2만 명이 상대의 군사 백만 명을 막아낼 수 있다는 뜻.

○丁卯/副司勇閔致垈上疏曰:

仁川永宗, 海防之要路也。 距王城不百里之地, 而門戶於三南, 與江都相爲聲援, 歸重江都之計, 捨永宗, 無以憑其勢矣。 故相臣洪命夏建白, 設行宮於仁川月尾島。 所謂月尾, 卽仁川 永宗間一小峙也。 其意蓋爲事急如丙、丁, 而流澌又斷, 甲串不可通, 則自仁川永宗, 自永宗至江都也。 朝家陞永宗爲防禦使, 計非不良, 而地不過數十里, 民不滿數百戶, 孤居海中, 仁川, 三面際海, 一面連陸, 號令兩西、三南, 如函秦之百二。 不此之爲, 棄仁川而防禦於永宗, 不亦踈乎? 今若移永宗, 防禦於仁川, 如廣梁防禦, 使之移於三和, 則似乎得矣。

答曰: "疏辭令廟堂稟處。"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29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