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돈녕부사 김창협의 졸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 김창협(金昌協)이 졸(卒)하였다. 김창협의 자(字)는 중화(仲和)로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온수(溫粹)하고 청결하여 한 점(點)의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고, 문장(文章)은 농욱(醲郁)174) 을 모방하여 육일거사(六一居士)175) 의 정수(精髓)를 깊이 얻었다. 국조(國朝) 이래로 작자(作者)는 1, 2분[公]에 불과(不過)했는데, 김창협이 정립(鼎立)176)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시(詩)도 역시 한(漢)·위(魏)를 출입하면서 소릉(少陵)177) 으로 보익(補翼)하였다. 고고(高古)178) 하고 아건(雅健)179) 하여, 천박한 문장을 일삼지 않았는데, 조금 후에 이것은 우리 선비[吾儒]가 끝까지 할 사업은 되지 못한다고 여겨 마침내 육경(六經)180) 에만 오로지 정진하여 염락 관민(濂洛關閩)의 학(學)181) 에 미쳐서 침함(浸涵)182) 하고 연이(演迤)183) 하여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니, 견해(見解)가 정확(精確)하고 공부(工夫)가 독실(篤實)하여 요즘의 변통성이 없는 선비에 비길 수 없었다. 주자서(朱子書)에 공력(功力)을 씀이 더욱 깊어, 송시열(宋時烈)이 《주문차의(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다. 만년(晩年)에 의리(義理)가 꽉 막히고 사문(斯文)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때를 당하매, 명의(名義)를 표정(表正)하고 사피(邪詖)함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세도(世道)가 힘입어서 유지(維持)되어 울연(蔚然)히 유림(儒林)의 으뜸[宗]이 되었다. 종학(從學)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훈회(訓誨)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후생(後生) 가운데 문사(文詞)를 바로잡을 자가 있으면 문득 이끌어서 학문(學問)에 나아가게 하였다. 젊어서 괴과(魁科)184) 에 올라, 명망이 한 시대를 굽어보았다. 법연(法筵)에 진강(進講)하니, 순부(淳夫)185) 처럼 삼매(三昧)186) 의 경지에 있다는 성예(聲譽)가 있었다. 더욱 군덕(君德)의 궐유(闕遺)에 권권(眷眷)187) 하고, 일을 만나면 규절(規切)188) 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피(避)하지 않았다. 기사년189) 의 화(禍)를 만나자, 다시는 당세(當世)에 뜻을 두지 않았고, 경화(更化)190) 한 뒤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궁산(窮山)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지취(志趣)가 다른 자라도 또한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그의 자품(資稟)의 순수함과 문장(文章)의 높음과 학술(學術)의 심오함을 논(論)하면, 모두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홍유(鴻儒)191) 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8세이었다. 태학생(太學生)192) 들이 관(館)을 비우고 와서 전(奠)을 올렸고, 학자(學者)들이 그를 ‘농암 선생(農巖先生)’이라고 일컬었다. 문집(文集) 34권(卷)이 있어 세상에 행하여졌으며,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294면
- 【분류】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註 174]농욱(醲郁) : 맛이 진함.
- [註 175]
육일거사(六一居士) : 송(宋)나라 문호(文豪) 구양수(歐陽修)의 호(號).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문장이 농욱(醲郁)하다고 함.- [註 176]
정립(鼎立) : 솥발과 같이 셋이 나누어 섬.- [註 177]
소릉(少陵) : 당(唐)의 시인(詩人) 두보(杜甫)의 호.- [註 178]
고고(高古) : 고상하고 옛 풍취가 있음.- [註 179]
아건(雅健) : 필력(筆力)이 고상(高尙)하고 기운참.- [註 180]
육경(六經) : 여섯 가지 경서(經書). 곧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춘추(春秋)》·《예기(禮記)》·《악기(樂記)》. 《악기》 대신 《주례(周禮)》를 넣기도 함.- [註 181]
염락 관민(濂洛關閩)의 학(學) : 송(宋)나라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그 아우 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유학(儒學).- [註 182]
침함(浸涵) : 학문에 젖어듦.- [註 183]
연이(演迤) : 널리 행함.- [註 184]
괴과(魁科) : 과거(科擧)에서 문과(文科)의 갑과(甲科)를 이르는 말.- [註 185]
순부(淳夫) : 송(宋)나라 유학자 범조우(范祖禹)의 자(字). 평상시에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지마는, 일을 만나면 시비(是非)를 분변하여 밝혔음.- [註 186]
삼매(三昧) : 마음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일심 불란(一心不亂)함.- [註 187]
권권(眷眷) : 잊지 않고 돌봄.- [註 188]
규절(規切) : 경계하여 바로잡음.- [註 189]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190]
○知敦寧府事金昌協卒。 昌協字仲和, 領議政壽恒第二子也。 天資溫粹潔淸, 無一點塵俗氣, 爲文章典則醲郁, 深得六一精髓。 國朝以來作者, 不過一二公, 昌協可以鼎峙云。 詩亦出入漢、魏, 翼以少陵。 高古雅健, 不事膚草, 己而謂此不足爲吾儒究竟事業, 遂專精六經, 以及濂 洛、關 閩, 浸涵演迤, 至忘寢食, 見解精確, 工夫篤實, 非挽近拘儒可倫也。 於朱子書, 用功尤深, 宋時烈著《朱文箚疑》, 多用其說。 晩歲當義理晦塞, 斯文磔裂之會, 以表正名義, 攘斥邪詖, 爲己任, 世道賴以維持, 蔚然爲儒林之宗。 從學者甚衆, 訓誨不少倦, 後生有以文詞取正者, 輒引以進之於學問。 少登魁科, 望臨一時。 進講法筵, 有淳夫三昧之譽。 尤眷眷於君德闕遺, 遇事規切, 不避觸忤。 及遭己巳之禍, 不復有意於當世, 更化之後, 屢召不起, 忍飢窮山, 固守而終身, 雖異趣者, 亦高仰之, 以爲難及。 蓋論其資稟之純, 文章之高, 學術之深, 俱詣絶於人, 允可爲間世之鴻儒云。 至是卒, 年五十八。 太學生捲堂來奠, 學者稱之爲農巖先生。 有文集三十四卷, 行于世。 後贈諡文簡。
- 【태백산사고본】 53책 46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294면
- 【분류】인물(人物) / 사상-유학(儒學)
- [註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