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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5권, 숙종 33년 12월 18일 병신 2번째기사 1707년 청 강희(康熙) 46년

헌부에서 칙사의 행차가 있어도 전날 받은 것으로 변통해서 쓰도록 건의하다

헌부(憲府)에서 아뢰기를,

"양서(兩西)의 인민들이 조잔(凋殘)하고 시든 것은 실로 칙수(勅需)를 책납(責納)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비록 민역(民役)이 번거롭고 무겁다 하더라도 그 전역(田役)이 조금 가벼우니 오히려 보존(保存)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에서 혹은 칙수청(勅需廳)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고(大同庫)라 하기도 하는 것은 대개 본전은 그냥 두고 이자를 취하여 백성의 힘을 펴고자 하는 데서 나왔으니, 당초에 설치한 〈본래의 뜻이〉 편리하고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설치한 지가 오래되자 폐단이 불어나서 빚을 주고 징수하여 받아들일 즈음에 이미 침요(侵擾)하는 환난이 많아졌습니다. 또 민역(民役)을 내고 내지 않는 것은 오로지 칙사의 행차가 오고 오지 않는 데 관계되는데, 해마다 으레 거두는 것이 전일과 다름이 없으나 창고에 있는 물종(物種)은 더 많아지지 않습니다. 비록 고을마다 모두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간혹 탐욕스런 무리들이 인하여 사복(私復)을 채우는 밑천으로 삼아 죄다 개인의 주머니로 돌아가게 되니, 한갓 빈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 칙사(勅使)의 행차가 오지 않은 지 거의 4, 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 그 거두어 들여 이식(利殖)을 불린 바는, 그 잉여분(剩餘分)이 마땅히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인데, 혹은 한 번의 칙사 행차도 지탱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서로(西路)가 거듭 기근이 든 날을 당하여 비록 그 응당 부과(賦課)해 거두는 물건도 여전히 견감(蠲減)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욱이 이 잘못된 예에 따라 받는 것은 더욱 인순(因循)하도록 내맡겨 두어 바로잡고 혁파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양서의 방백(方伯)에게 신칙(申飭)해서 그 창고의 허실(虛實)을 염찰(廉察)하여 출척(黜陟)하고 징계·격려의 바탕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지금부터 이후로는 비록 칙사의 행차가 있다 하더라도 전날 받은 것으로서 변통하여 쓰도록 할 것이며, 다시는 민간에서 거두어 들이지 말도록 하여 양도(兩道) 민폐(民弊)의 한 부분이라도 제거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45권 6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27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재정-잡세(雜稅)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憲府啓曰: "兩西人民之凋瘵, 實由於勑需之責納。 雖有民役之煩重, 而以其田役之稍輕, 猶爲保存。 各邑之或稱勑需廳, 或稱大同庫, 蓋出於存本取利, 以紓民力, 則當初創置, 非不便好, 而設久弊滋, 給債(懲捧)〔徵捧〕 之際, 已多侵擾之患。 且民役之出不出, 惟係於勑行之來不來, 逐歲之例捧, 猶夫前日, 在庫物種, 不加多。 雖非邑邑皆然, 間或貪饕之輩, 仍作(深)〔染〕 指之資, 盡歸私橐, 徒存空殼。 目今勑行之不到, 幾至四五年之久。 其所收斂生殖, 宜其餘剩之有裕, 而或有一勑難支之處云, 事之可駭, 莫此爲甚。 當此西路荐饑之日, 雖其應賦之物, 猶未可蠲, 況此謬例之捧, 尤不可任其因循, 不思所以矯革之方。 請申飭兩西方伯, 廉察其庫在之虛實, 以爲黜陟懲勵之地, 仍令自今以後, 雖有勑行, 以其前日所捧, 拮据支用, 更勿收斂於民間, 以除兩道一分之民弊。" 答曰: "令該曹稟處。"


  • 【태백산사고본】 52책 45권 6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27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재정-잡세(雜稅)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