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45권, 숙종 33년 4월 1일 계미 3번째기사
1707년 청 강희(康熙) 46년
나라에 반진이 일어나고, 유생들의 상소가 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고함
이때 절후(節候)에 따라 유행(流行)하는 반진(斑疹)이 크게 일어났다. 우의정(右議政) 이이명(李頤命)과 내국 제조(內局提調) 조상우(趙相愚)와 박필명(朴弼明)이 청대(請對)하여, 태묘(太廟)에 친향(親享)하는 것을 잠시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극구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팔도(八道)의 유생(儒生)들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여 거듭 상소를 올렸으나, 정원(政院)에서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팔도의 장보(章甫)들이 유현(儒賢)을 위하여 올린 소장(疏章)을 어찌 까닭없이 저지하고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고 몹시도 심히 근거할 데가 없습니다. 그날 입직(入直)한 승지(承旨)를 아울러 체차(遞差)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승지는 이징귀(李徵龜)·홍만기(洪萬紀)이다.】
- 【태백산사고본】 52책 45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259면
- 【분류】보건(保健) / 사상-유학(儒學) / 교육(敎育)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