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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41권, 숙종 31년 3월 9일 계묘 1번째기사 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임금이 대보단에 나아가 명나라 신종 황제를 제사하다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친히 명(明)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였다. 자시(子時)에 임금이 의춘문(宜春門)으로부터 금원(禁苑) 북쪽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조종문(朝宗門)을 나가 단(壇)이 있는 곳에 이르러 제사를 거행하였다.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밝게 천명(天命)을 받으시고, 크게 사이(四夷)를 어루만지셨습니다. 황제(皇帝)께서 재위(在位)하신 것은 우리 나라의 소경(昭敬)176) 의 시기였으니, 크게 덮어 주신 덕화(德化)는 하늘처럼 컸습니다. 요복(要服) 보기를 수복(綬服) 보듯이 하여 문교(文敎)를 펴고 무력(武力)을 떨쳤습니다. 그때에 만이(蠻夷)177) 가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 하기에 의리(義理)로 대항하여 물리치니, 흉악한 칼날이 우리를 먼저 찔렀습니다. 우리의 칠실(七室)178) 을 불태우고 우리의 팔도(八道)를 도륙하였으므로, 한구석으로 파천(播遷)가서 계시던 선왕(先王)께서 부모(父母)179) 에게 사정을 하소연하였습니다. 황제께서 이에 노련하신 무력으로 장수(將帥)에게 명하여 와서 구원하게 하셨으니, 10만의 군사와 억만의 군량(軍糧)이었습니다. 황제의 위엄이 떨치는 바는 마치 번개가 치는 것 같아서 요망한 기운이 곧바로 사그라지고 문득 강토[疆場]를 회복하였습니다. 조정의 논의가 처음에 두 갈래로 갈리었는데 오직 황제께서 이에 결단을 하셨으며, 참소하는 말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또한 오직 황제께서 분변하셨습니다. 이미 우리의 멸망할 것을 보존시켜 주시고 또 우리의 정성을 어여삐 여기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제함이 있으신 것은 우리 황제의 현명함에 연유한 것이니, 무릇 이처럼 재생(再生)시켜 주신 것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이에 우리 제후(諸侯)의 지켜야 할 법도(法度)에 있어 더욱 공경을 바치었으며, 맹세코 자자손손(子子孫孫) 길이 조종(朝宗)180) 을 바치려고 기약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통(大統)이 3백 년으로 그치고 말았습니까? 종거(鍾簴)181) 는 이미 옮겨 가고, 관구(冠屨)182) 는 드디어 전도(顚倒)되었으니, 중간에 일어난 변고(變故)들은 차마 무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힘이 미약한 것만 가슴아플 뿐, 은혜야 어찌 감히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중하(中夏)가 풍미(風靡)하기를 희망하였는데 뜻이 이룩되지 않았으나, 그 뒤로 삼세(三世)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해이(懈弛)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 신(臣)은 불초(不肖)하고, 성대(聖代)는 점차 멀어졌습니다. 돌아보건대, 우리 속국(屬國)은 지금까지 오히려 존재해 있는데도 그 큰 덕(德)은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서쪽을 돌아보면 비감(悲感)만 일어나니 어느 곳에 술직(述職)183) 하겠으며, 황량(荒涼)한 침원(寢園)184) 에는 누가 제사를 올리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천향(薦享)하여야 제 마음을 펼 수 있겠습니까?

이에 영단(靈壇)을 쌓았으니 의리는 교전(郊典)185) 에서 취한 것이며, 변궤(籩簋)의 의식(儀式)과 전헌(奠獻)의 예(禮)는 황제(皇制)를 모방하였으니, 여기에는 의미가 또한 담겨 있습니다. 아! 이 계춘(季春)에 영운(靈運)이 다해 갑니다. 인정(人情)이 이미 감동(感動)되었으니, 신리(神理)를 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 신(神)이 하늘에 계시는 것은 물이 땅에 있는 것에 비유되니, 정성이 있으면 감통(感通)하는 것은 어찌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겠습니까? 고국(故國)이 오랑캐의 땅이 되었으니, 혼령이 어디로 오르고 내리시겠습니까? 예전에 은택을 입었으니, 이제 마땅히 진기(振起)시켜야 합니다. 용기(龍旗)와 봉정(鳳旌)이 흡사 동쪽을 가리키는 듯한데, 누가 시위(侍衛)하는가 하면 신하 양(揚)186) ·이(李)187) 가 있습니다. 머나먼 해역(海域)에서도 오히려 황제의 인덕(仁德)을 떠받들고 있으니, 아마도 영령(英靈)께서는 웃으면서 찡그리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정결한 제사는 서직(黍稷)188) 의 향기로움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존주(尊周)189) 의 의리는 소경(昭敬)이 그 길을 열으셨고, 옛 은혜를 생각하여 그 뒤에도 폐기(廢棄)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조그마한 정성을 살피시어, 돌보아주고 도와주소서."

하였는데,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진규(金鎭圭)가 지어 올렸다.】 단상(壇上)에 황색 장막을 둘러쳐서 방을 마련하여 거기에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는데, 지방(紙牓)을 사용하였으며, 무(舞)는 팔일무(八佾舞)190) 를 쓰고, 악장(樂章)을 지어서 연주하였다. 임금이 삼헌례(三獻禮)를 행하고, 음복(飮福)을 하였으며, 예(禮)가 끝나자 지방(紙牓)을 받들어 불살랐다. 임금이 친히 지방을 불사르는 장소에 나아갔고, 왕세자(王世子)는 백관(百官)을 인솔하고서 임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었다. 임금이 제사를 마치고 환궁(還宮)하여 어제(御製)·어필(御筆)을 승정원(承政院)에 알리고 말하기를,

"오늘 새벽에 공경히 황단(皇壇)에 나아가 이미 성대한 제례를 거행하였다. 몇년을 경영한 나머지 끝내 지극한 소원을 이루었으니, 일의 형세에 구애되어 비록 예(禮)에 준거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단(祭壇)에 올라서 제사를 지내려 할 때 황연(怳然)히 옥로(玉輅)191) 가 동으로 순수(巡狩)하여 경광(耿光)192) 을 보게 되는 듯하였으니, 나의 감회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감회가 마음에 가득하여 저절로 음영(吟詠)에 나타났으니, 잊지 않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아! 그대들 은대(銀臺)193)옥당(玉堂)194)병필(秉筆)195) 의 신하들은 각각 화답하는 시(時)를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시(時)는 다음과 같다.

"대보단(大報壇) 이룩되어 비로소 친히 제사하니,

시절은 잠월(蠶月)196) 이라 화창한 봄날이네.

관리들은 많고 성대하여 반열(班列)로 나아가고,

주악(奏樂)을 연주하며 예폐(醴幣)를 진설(陳設)하네.

예전에 융숭한 은혜 입어 가슴에 새기었는데,

오늘 신좌(神座)를 쳐다보니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찌 다만 작은 정성을 기울일 뿐이랴.

영릉(寧陵)197) 의 성스러운 뜻 따르기를 간절히 원하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사알(司謁)이 주상의 전교로써 어제(御製)·어필(御筆)로 된 ‘대보단(大報壇)에 친히 제사한 뒤 감회를 적은 시’ 칠언률(七言律) 한 편(篇)과 병서(幷序)를 알리기에 신 등이 바삐 봉함(封緘)을 열어 머리를 맞대고 펼쳐 보았습니다. 한 자(字) 한 구(句)가 모두 명(明)나라를 높이는 혈성(血誠) 가운데에서 흘러나와, 대성인(大聖人)께서 지으신 바가 보통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릇 보고 듣는 사람이 누군들 공경하고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은 일창 삼탄(一唱三歎)198) 하여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흐르는 바이며, 무어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신하들에게 화답해 올리라는 분부에 있어서는 갱재(賡載)199) 의 훌륭한 일에 함께 다같이 아름다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 등이 문사(文辭)가 거칠고 서툴러서 성상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어 그 뜻을 널리 드높일 수가 없겠지마는,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감히 공경하여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御製)는 그대로 승정원 안에 보관하여 길이 보장(寶藏)으로 삼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겠다."

하였다. 그 다음날 도승지(都承旨) 황흠(黃欽), 좌승지(左承旨) 남치훈(南致薰), 우승지(右承旨) 조태동(趙泰東), 좌부승지(左副承旨) 임윤원(任胤元), 우부승지(右副承旨) 김치룡(金致龍), 동부승지(同副承旨) 민진원(閔鎭遠), 교리(校理) 이조(李肇), 부교리(副校理) 남취명(南就明), 수찬(修撰) 유봉휘(柳鳳輝), 봉교(奉敎) 이재(李縡), 대교(待敎) 홍우서(洪禹瑞), 가주서(假注書) 심수현(沈壽賢)·김동필(金東弼)·이진검(李眞儉)·신택(申) 등 15인이 전교를 받들어 시(詩)를 화답해서 올렸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41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45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76]
    소경(昭敬) : 선조(宣祖)의 시호.
  • [註 177]
    만이(蠻夷) : 왜이(倭夷).
  • [註 178]
    칠실(七室) : 종묘(宗廟).
  • [註 179]
    부모(父母) :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가리킴.
  • [註 180]
    조종(朝宗) : 제후(諸侯)가 천자께 조하하는 일.
  • [註 181]
    종거(鍾簴) : 악기(樂器)를 다는 틀.
  • [註 182]
    관구(冠屨) : 갓과 신. 예의(禮義)·문물(文物)의 비유.
  • [註 183]
    술직(述職) : 제후(諸侯)가 조회(朝會)하여 자기가 맡은 직무에 관하여 천자(天子)에게 아뢰는 일.
  • [註 184]
    침원(寢園) : 황제의 산소.
  • [註 185]
    교전(郊典) : 천지(天地)에 대한 제사의 전례.
  • [註 186]
    양(揚) : 양호(揚鎬).
  • [註 187]
    이(李) : 이여송(李如松).
  • [註 188]
    서직(黍稷) : 제수(祭需)를 말함.
  • [註 189]
    존주(尊周) : 명(明)나라를 높임.
  • [註 190]
    팔일무(八佾舞) : 원래 주대(周代) 천자(天子)의 무악(舞樂)으로, 악생(樂生) 64인을 8열로 정렬시켜서 추게 하는, 규모가 큰 문무(文舞)나 무무(武舞).
  • [註 191]
    옥로(玉輅) : 옥으로 만든 임금이 타는 수레.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가리킴.
  • [註 192]
    경광(耿光) : 성덕(聖德).
  • [註 193]
    은대(銀臺) : 승정원(承政院).
  • [註 194]
    옥당(玉堂) : 홍문관(弘文館).
  • [註 195]
    병필(秉筆) :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 [註 196]
    잠월(蠶月) : 양잠하는 달, 음력 3월임.
  • [註 197]
    영릉(寧陵) : 효종(孝宗)의 능(陵).
  • [註 198]
    일창 삼탄(一唱三歎) : 한 사람이 노래 부르면 세 사람이 화답하는 것. 시(詩) 등이 잘 되었음을 칭찬하는데 쓰는 말임.
  • [註 199]
    갱재(賡載) : 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시를 지음.

○癸卯/上詣大報壇, 親祭大明 神宗皇帝。 子時, 上自宜春門, 循禁苑北而西, 出朝宗門, 詣壇所行祭。 祭文曰:

明承天命, 誕撫四夷, 惟帝御字, 我昭敬時。 丕冒之化, 覆幬同大, 視要如綏, 揆敎奮衛。 時有卉服, 于我假道, 抗義以斥, 凶鋒先刳。 燬我七室, 劉我八路, 越在一隅, 父母是愬。 帝乃耆武, 命將來援, 十萬其師, 億秭其運。 皇威所振, 若霆之擊, 妖祲旋豁, 奄復壃場。 廷議初貳, 惟帝是斷, 讒說繼騰, 亦惟帝辨。 旣存我亡, 又憐我誠, 始終有濟, 由我帝明。 凡此再造, 伊誰之力? 肆我侯度, 益致其恪。 誓期子孫, 永效朝宗, 云胡大曆, 三百而終? 鍾簴旣移, 冠屨遂倒, 中間變故, 蓋不忍道。 自傷力弱, 恩豈敢忘? 尙希夏靡, 而志未成。 爾來三世, 一念靡懈, 嗟臣不肖, 寢遠聖代。 顧我屬國, 至今猶活, 而其大德, 未報萬一。 眷言西悲, 述職何所, 荒涼寢園, 芬苾誰擧? 曷以薦享, 我心斯展? 爰築靈壇, 義取郊典。 籩簋之式, 奠獻之禮, 倣于皇制, 意亦有在。 噫玆春季, 靈運攸窮, 人情旣感, 神理可通。 繄神於天, 譬水在地, 惟誠之格, 奚間遠邇? 故國腥膻, 于何陟降? 昔所漸被, 今宜肸蠁。 龍旗鳳旌, 彷彿東指, 誰其衛侍, 有臣 。 芒芒海域, 猶戴皇仁, 庶幾揚靈, 載笑不顰。 矧伊明禋, 非爲稷馨, 尊之義, 昭敬是程。 想惟舊恩, 不棄其後, 冀鑑寸悃, 以顧以祐。

【藝文提學金鎭圭製進。】 設黃帳房於壇上, 奉安神位, 用紙牓, 舞用八佾, 撰樂章以奏。 上行三獻禮, 飮福禮畢, 奉紙牓以燎。 上親詣燎所, 王世子率百官陪祭。 上祭罷還宮, 宣示御製、御筆于政院曰:

今曉祗詣皇壇, 已擧殷禮。 幾年經營, 竟遂至願。 事勢所拘, 雖未准禮, 此固可幸也。 壇墠將事之際, 怳若玉輅東巡, 獲覩耿光, 予懷當復如何? 感極于中, 自發於吟詠, 所以示不忘也。 嗟! 爾銀臺、玉堂、秉筆之臣, 其各和進。 詩曰: "大報壇成肇祀親, 時惟蠶月屬和春。 衣冠濟濟班行造, 磬筦將將醴幣陳。 昔被隆恩銘在肺, 今瞻神座涕沾巾。 追思豈但微誠寓。 切願寧陵聖志遵。

政院啓曰: "卽者司謁, 以上敎宣示。 御製御筆, 大報壇親祭後志感詩七言律一篇, 竝序, 臣等忙手開緘, 聚首展玩, 一字一句, 皆從尊血誠中流出, 有以見大聖人所作出尋常萬萬。 凡在瞻聆, 孰不聳動? 臣等一唱三歎, 感涕自零, 不知所以爲喩也。 至於諸臣和進之命, 可以匹休於賡載盛事。 臣等文辭陋拙, 恐不足以對揚休命, 而聖敎至此, 敢不祗若? 御製則請仍留院中, 永作寶藏。" 答曰: "知道。" 翌日, 都承旨黃欽、左承旨南致熏、右承旨趙泰東、左副承旨任胤元、右副承旨金致龍、同副承旨閔鎭遠、校理李肇、副校理南就明、修撰柳鳳輝、奉敎李縡、待敎洪禹瑞、假注書沈壽賢金東弼李眞儉 等十五人, 奉敎和進。


  • 【태백산사고본】 48책 41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45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