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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41권, 숙종 31년 1월 26일 신유 1번째기사 1705년 청 강희(康熙) 44년

사신으로 다녀온 임창군 이혼·이세재·이하원 등을 인견하다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온 임창군(臨昌君) 이혼(李焜)이세재(李世載)·이하원(李夏源)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보다 먼저 사신 등이 별단(別單)으로 치계(馳啓)하였는데 이르기를,

"장비호(張飛虎)란 자가 삼선도(三仙島)를 점거하여 출몰(出沒)이 무상(無常)하며, 또 백씨(白氏) 성(姓)을 가진 여자 장수가 있는데 날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청(淸)나라 사람들이 제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세재가 말하기를,

"이른바 장비호(張飛虎)란 자에 대하여 어떤 이는 ‘삼산도(三山島)에 있다.’고 하는데, 삼산도는 산동성(山東省)의 바다 가운데 있으며 우리 나라와는 서로 가깝습니다. 혹 어떤 이는 ‘삼선도(三仙島)에 있다.’고 하는데, 이 섬은 절강성(浙江省)과 복건성(福建省) 근처에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른바 제본(題本)069) 을 얻어 왔더라도 의거하여 믿을 것은 못되는데, 만약 삼선도에 있다면 우리 나라의 근심은 조금 덜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청주(淸主)가 사냥하기를 좋아하며 뇌물이 멋대로 행해지고 인재의 등용이 고르지 않으므로 인심(人心)이 좋아하지 않으나 다만 재물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황태길(黃台吉)인데, 황태길이 만약 움직이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전생기(田生琦)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에게 물으니 ‘계씨(季氏)의 근심은 소장(蕭檣)에 있고 전유(顓臾)에 있지 않다.070) ’고 하였는데, 비록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국내의 근심거리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세재가 또 두 통의 문서(文書)를 올리며 말하기를,

"명나라의 자손으로 주안세(朱安世)란 사람이 수양(睢陽)을 습격하였는데, 장비호(張飛虎)에 비하여 조금 강대하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저들이 영고탑(寧古塔)으로 굴혈(掘穴)을 삼았는데도 견고하다고 여기지 않고서 심양(瀋陽)에 힘을 다 기울여 제택(第宅)과 인력(人力)이 북경(北京)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관장(串傷)은 심양(瀋陽)과의 거리가 12일 노정(路程)인데도 심양보다 웅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汗)의 묘(墓)를 보았는데, 웅장하기가 견줄 데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양은 바로 그들의 근본 지역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세재가 말하기를,

"저들이 비록 패배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심양(瀋陽)에 웅거할 것이며, 만약 심양을 잃은 뒤에는 틀림없이 영고탑(寧古塔) 등지로 갈 것이니, 서쪽의 근심은 북변(北邊)보다 줄어든 듯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36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069]
    제본(題本) : 왕이나 상급 관청에 올리는 문서의 초본.
  • [註 070]
    계씨(季氏)의 근심은 소장(蕭檣)에 있고 전유(顓臾)에 있지 않다. : 노(魯)나라 계씨(季氏)가 전유(顓臾)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제자인 염유(冉有)와 계로(季路)에게 듣고 공자(孔子)가 한 말로, 계씨의 근심은 전유를 공격하여 차지하는 데 있지 않고 문교(文敎)와 도덕(道德)이 닦아지지 않음으로 인심이 이반된 국내(國內)에 있다고 한 고사를 인용한 말.

○辛酉/引見回還使臣臨昌君 李世載李夏源等。 先是, 使臣等, 先以別單馳啓云: "有張飛虎者, 據三仙島, 出沒無常, 又有白姓女將, 驍勇無比, 淸人不能制之云。" 至是, 世載曰: "所謂張飛虎者, 或云在三山島, 島在山東海中, 與我國相近。 或云在三仙島, 此島則在於浙江福建近處。 雖得來所謂題本, 亦不足憑信, 而若在三仙, 則我國之憂稍緩矣。 且主好畋獵, 賄賂肆行, 用人不均, 人心不悅, 而但能惜財云。 且彼之最所畏者, 黃台吉, 台吉若動則不可爲也云。 且遇田生琦者, 問之則以爲: ‘季氏之憂, 在於蕭墻, 而不在顓臾’ 云。 雖未知何事, 而似有內憂矣。" 世載又進二文書曰: "大明子孫朱安世者, 掩襲睢陽, 而比張飛虎稍大。" 又曰: "彼以寧古塔爲窟穴, 而不以爲固, 只致力於瀋陽第宅, 人力一如北京。 且串場距瀋陽十二日程, 而壯於瀋陽。 且見汗墓, 雄壯無比矣。" 上曰: "瀋陽, 乃其根本地故也。" 世載曰: "彼雖敗, 猶據瀋陽, 若失瀋陽之後, 則必往寧古塔等處, 西憂則似減於北邊矣。"


  • 【태백산사고본】 48책 4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36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