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단이 준공되니 제사 지낼 때와 악의 사용·단상의 장전 등에 대해 의논하다
대보단(大報壇)이 준공(竣工)되었는데, 단(壇)은 창덕궁 금원(禁苑)의 서쪽 요금문(曜金門) 밖 옛날 별대영(別隊營)의 터에 있었다. 단의 제도는 좌의정 이여(李畬)의 말에 따라 우리 나라 사직의 제도를 모방하여 유(壝)640) 가 있고 장(墻)이 있는데, 담장 높이는 4척(尺)으로서 사직단에 비하여 1척이 높고 사방 넓이가 25척이며 네 면에 모두 9급의 층계(層階)가 있었다. 유(壝)와 장(墻)의 네 면은 모두 37척이요, 단소(壇所)로부터 외장(外牆)을 쌓아 행인(行人)이 내려다보지 못하게 하였다. 10월 초3일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는데,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공조 판서(工曹判書) 서종태(徐宗泰)·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채(趙泰采) 등이 시종 감독했다. 그 사이 민진후(閔鎭厚)는 수어사(守禦使) 직임의 일로 남한 산성에 나가 있었고 김진규(金鎭圭)가 차관(次官)으로 명을 받들고 공역을 감독한 지 매우 오래 되었다.
제사 지낼 때를 정한 의논은 아래에 덧붙여 보이는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가 1년에 한 번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며, 제사를 행하는 기일에 있어서는 혹은 정월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3월이 마땅하다 하였으며, 혹은 2월이 마땅하다 하고 혹은 4월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마침내 3월로 결정되었다. 단호(壇號)는 처음에 민진후의 말로 태단(泰壇)으로 정하고자 했으나, 또 2품 이상의 관원을 패초(牌招)하여 의논해서 정하게 했는데, 우의정 이유(李濡)의 말로 인해 대제학 송상기(宋相琦)에게 명하여 찬정(撰定)하게 했으니, 곧 지금의 이름이다. 악(樂)은 팔일(八佾)을 쓰고 악장(樂章)은 또한 송상기가 지어 올린 것이다. 이여(李畬)는 문묘(文廟)641) 의 석채(釋菜)642) 때의 악장을 모방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여러 대신이 사직제(社稷祭)의 악장에 의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단상의 장전(帳殿)은 황색 명주를 써서 내장(內帳)을 만들었으니, 우리 나라의 장전(帳殿)과 같았고, 만정골(滿頂骨)643) 의 규격은 일편(一片)의 목판(木板)에 옻칠을 했는데 길이와 넓이는 우리 나라의 궐자판(闕字版)644) 과 외방에 있는 전패(殿牌)645) 의 제도와 같이 하고 부방(跗方)646) 을 더하여 탁상에 받들어 두었다가 여기에 황지방(黃紙牓)을 붙여서 서사관(書寫官)을 시켜 그 면(面)마다 제호(題號)하기를 ‘대명 신종 황제 신위(大明神宗皇帝神位)’라 썼으며, 제사를 지낸 뒤에는 지방(紙牓)을 불태우고 나무조각647) 은 궤 속에 간직했다가 제사 때마다 꺼내어 쓰기로 했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니 임금이 이를 따랐다.
등가(登歌)와 헌가(軒架)648) 는 사직단(社稷壇)의 제도에 의하여 배치(排置)하였고 제물(祭物)의 품수(品數)는 황조(皇朝)의 의식(儀式)에 의거했으며, 제기(祭器) 역시 《대명집례(大明集禮)》의 도식(圖式)에 의거했는데, 제기는 고례(古禮)의 죽변(竹籩)649) 등의 제도에 따라 만들었다. 신실(神室)과 황장방(黃帳房)은 명나라 《회전(會典)》의 도설(圖說)에 의해서 조성했고 제문(祭文) 중에는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도록 분부했으며, 단소(壇所)의 수직관(守直官)은 차정(差定)하지 않고 단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그리고 등가(登歌) 이하의 절목은 모두 김진규가 대신과 의논하여 면전에서 품의하여 정한 것이다.
이여(李畬)가 《대명집례》의 글에 의거하여 삼작(三酌)을 잇따라 올리기를 청하였고 천조(薦俎)650) 의 한 조항에 있어서 이여는 시행함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여러 대신들이 모두 시행함이 옳다고 주장했으므로 시행하라고 분부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성생(省牲)651) 과 천조(薦俎)는 몸소 시행할 필요가 없고 지방(紙牓)을 불사라 묻는 것을 바라보는 등의 절차는 사체가 더욱 중대하니, 친행(親行)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혹자의 말에 ‘황조(皇朝)에서는 화덕(火德)을 숭상하므로 희생(犧牲)도 붉은 빛깔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오니, 청컨대 붉은 소[騂牛]를 쓰소서."
하니, 또한 그대로 따랐다. 사리를 자세히 아는 수인을 가리어 정하고 제사를 행할 때 임무를 맡겨 수행토록 했다. 절목을 강정(講定)할 때에 예관(禮官)이 청대(請對)하여 신품(申稟)함이 전후에 매우 빈번했는데, 대저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여 한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24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외교-명(明)
- [註 640]유(壝) : 제단(祭壇) 둘레에 낮게 쌓은 담.
- [註 641]
문묘(文廟) : 성균관에 공자(孔子)를 모신 사당.- [註 642]
석채(釋菜) : 소나 양(羊)의 희생(犧牲)을 생략하고 채소 등으로 간소하게 공자(孔子)를 제사 지내는 일. 석전(釋奠).- [註 643]
만정골(滿頂骨) : 지방(紙牓)을 세우는 판.- [註 644]
궐자판(闕字版) : 중국의 황제를 향하여 망배례(望拜禮)를 행할 때에 모셔 놓는 ‘궐(闕)’자를 새긴 목패(木牌).- [註 645]
전패(殿牌) : 각 고을 관아(官衙)의 객사(客舍)에 모셔 놓은 ‘궐(闕)’자를 새긴 위패(位牌) 모양의 목패로, 그 앞에서 국왕을 향하여 망궐례(望闕禮)를 행했음. 궐패(闕牌), 궐자패(闕字牌).- [註 646]
부방(跗方) : 신주(神主) 밑에 까는 네모진 받침.- [註 647]
나무조각 : 목패.- [註 648]
등가(登歌)와 헌가(軒架) : 궁중 음악(宮中音樂)의 주악 편성(奏樂編成) 법으로, 등가는 대제(大祭) 때 당상(堂上)에서 노래를 주로 부르고 현악기(絃樂器)를 많이 사용하였음. 헌가는 당하악(堂下樂)으로, 종(鍾)·경(磬)·북[鼓]을 가(架)에 달고 연주함.- [註 649]
○大報壇成。 壇在昌德宮禁苑之西曜金門外, 舊別隊營之地。 壇制用左議政李畬言, 倣我國社稷之制, 有壝有墻, 墻高四尺, 比社壇加高一尺, 方廣二十五尺, 四面皆爲九級。 壝、墻四面, 皆三十七尺, 自壇所築外墻, 以防行人俯視。 自十月初三日始役, 至是訖工, 禮曹判書閔鎭厚、工曹判書徐宗泰、戶曹判書趙泰采, 終始監董。 其間鎭厚以守禦使職事, 出往南漢, 金鎭圭以次官, 承命董役者, 頗久。 祭祀時定議, 附見于左, 諸大臣, 皆以一年一祭爲宜, 行祭日期, 或謂宜用孟春, 或謂宜用三月, 或謂宜用二月, 或謂宜用四月, 終以三月爲定。 壇號, 初以閔鎭厚言, 欲稱泰壇, 又命牌招二品以上, 議定之, 因右相李濡言, 今大提學宋相琦, 撰定卽今號也。 樂用八佾而樂章亦相琦所撰進也。 畬以爲宜倣文廟釋菜時樂章, 諸大臣請依社稷祭樂章, 上從其言。 壇上帳殿, 用黃色紬段, 爲內帳, 如我國帳殿, 滿頂骨之規, 以一片木, 加漆, 長廣如我國闕字版及外方殿牌之制, 加以跗方, 奉置卓上, 付以黃紙牓, 而使書寫官, 題其面曰大明 神宗皇帝神位, 祭後燎其紙牓, 木片則藏之樻中, 每於祭時出用。 諸議皆以爲然, 從之。 登歌、軒架, 依社壇制排置, 祭物品數, 依皇朝儀式, 祭器亦依《大明集禮》圖式, 而祭器, 依古禮竹籩等制爲之。 神室、黃帳房, 依《會典》圖說造成, 祭文中, 命勿書淸國年號, 命勿差壇所守直官, 只使禮官主管焉。 登歌以下節目, 皆金鎭圭議大臣, 面陳稟定者也。 畬請依《集禮》之文, 連奠三酌, 而薦俎一款, 畬以爲不可行, 諸大臣皆以爲可行, 命行之。 鎭厚以爲。 "省牲、薦俎, 不必親行, 而望瘞燎、紙牓等節, 事體尤重, 似當親行。" 從之。 鎭厚又以爲: "或云: ‘皇朝尙火德, 犠牲當用赤色。’ 請用騂牛。" 亦從之。 擇定解事者數人, 行祭時任使焉。 節目講定時, 禮官請對申稟, 前後甚數, 大抵收議大臣而爲之。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24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외교-명(明)
- [註 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