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 최계옹이 성상의 비답이 엄준하다는 것으로 인피하다
사간 최계옹(崔啓翁)이 성상의 비답이 엄준하다는 것으로 인피(引避)하기를,
"옛날 대신은 나라를 위하여 덕을 심었는데 지금의 대신은 나라를 위하여 원망을 모아들이고 있으며, 옛적 대신은 임금을 정도(正道)로 인도하였는데 지금의 대신은 임금을 그른 데로 개도(開導)하고 있으니, 이에 신이 거리낌없이 바른 말을 한 것은 감히 대신을 침척(侵斥)함이 아니요, 국사를 바로잡으려고 함입니다.
근래 사대부의 집에 관기를 축첩한 자가 대략 많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수상의 집에는 폐첩이 더욱 성해서 줄지어 집을 지어 한가로이 살면서 사랑을 시새우고 고움을 다투어 사치를 극도로 하여 세상에 비교할 데가 없습니다. 뇌물로 청탁하는 무리가 그 문에 폭주(輻湊)하여 이서(吏胥)의 승강(升降)과 둔감(屯監)의 차출이 모두 그 손아귀에서 나오고, 부유(富裕)한 창고와 넉넉한 관사(官司)의 고직(庫直)과 서원(書員)은 그의 노예가 아니면 비부(婢夫)이며, 여러 첩의 형제가 연줄을 타서 이익을 노려 태복시(太僕寺)의 둔전곡(屯田穀)은 그 대부분이 첩(帖)596) 을 받아 발매(發賣)하는 데로 돌아가 태복시가 텅비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장교(將校)의 차출에 있어서도 주장(主將)된 자가 손을 쓸 수가 없으며, 그 밖의 비루(卑陋)한 일들이 말할 수 없이 많아 마침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치는 곳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니, 이 모두가 그 무리들의 농간으로 말미암은 것을 어찌 대신이 다 알겠습니까? 이는 실로 어리석은 신이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여 반드시 그들을 자수시켜 그 뿌리를 통절(痛絶)하려 한 것입니다."
하니, 장계가 들어간 지 오래 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다가, 해가 져서 어두워서야 명하여 인견(引見)하고 책망하기를,
"어제 올린 상소는 대신을 침척(侵斥)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오늘은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방자하게 무함을 얽어 체국(體國)의 대신인 영상(領相)을 만길 구덩이로 밀칠려고 하니, 내가 그 마음씀을 알고자 한다."
하였다. 최계옹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대신을 무함할 뜻이 있겠습니까? 신이 처음에는 지방(地方)에서 올라와 물의(物議)를 전해 들었으니,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지난번 우상(右相)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전하께서 대간이 부탁을 받고 목장민에게 사(私)를 두는가 의심하니, 지극히 민망하고 탄식할 일이다.’ 하였으며, 민진후(閔鎭厚)와 김진귀(金鎭龜)도 또한 말하기를, ‘영상이 이 일을 끝내 들어주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은 단지 목장을 수습하려고 하는데 무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마음씀이 매우 아름답지 않다."
하였다. 최계옹이 말하기를,
"지금 이 논계는 신이 홀로 주장한 일이 아니라, 권상유(權尙游)가 먼저 이 상소를 발론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논계의 말 속에 사복시(司僕寺)의 저축이 텅비었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영상(領相)이 사사로이 가져다 썼기 때문에 그러한가?"
하였다. 최계옹이 말하기를,
"그 첩의 족속들이 아주 싼값으로 발매하는 둔전(屯田)의 곡식을 사들여 둔소(屯所)에서 남징(濫徵)하니, 둔전 백성들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였고 인하여 사복시의 저축이 텅 비게 되었으므로, 신이 감히 바른 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이 이른바, ‘목장을 비록 사복시에 소속시켜도 조세를 호조(戶曹)에 바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백성이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괴이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건명(李建命) 역시 말하기를, ‘영상의 이런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불러서 물었으면 자신의 의견(意見)을 진달함이 마땅하거늘, 이제 이르기를, ‘김진귀의 말은 이러이러하고 민진후·이건명의 말은 이러이러합니다.’ 하니, 임금에게 아뢰는 체모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대신이 죄가 있으면 죄를 주는 것이 마땅하나, 이는 곧 공사(公事)인데 이를 빙자해 모함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비록 대간(臺諫)이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체국(體國)의 대신을 무함함이 이에 이를 수 있는가?"
하였다. 최계옹이 체례(體例)를 알지 못했음을 사죄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신의 논한 바는 종일토록 바른 말을 한 데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감히 거짓말로써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바른 말을 했다고 자찬하니, 가히 어리석다 할 것이다."
하였다. 최계옹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는 영상이 여름 동안에 원주(原州)와 북도(北道)의 두 기생을 돌려 보냈고, 돌아오는 말편에 또 성천(成川) 기생을 데려다가 축첩하여 두었는데, 그 첩이 요사하여 거듭 누명을 끼쳤다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대신을 추고(推考)하여 경책(警責)함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오활(迂闊)하구나. 대신을 추고(推考)한 일이 자고로 있었던가?"
하였다. 최계옹이 또 사체(事體)를 모른 것을 사죄하고, 또 말하기를,
"목장 백성이 도로에서 울부짖으니, 지금 만약 환급(還給)하여 준다면 비록 망언(妄言)의 죄로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지하에서 눈을 감겠으며, 대신이 비록 이 일로써 신을 질시한다 하여도 신은 또한 두렵지 않습니다. 대신 역시 신과는 평소에 서로 친애(親愛)하는 사이이나, 이 일에 이르러서는 성덕에 누를 끼치니, 실로 아낄 마음이 없습니다. 또 탁주한(卓柱漢)의 일에 있어서도 전하께서 추핵(推覈)하여 죄를 바로잡으라는 계청을 윤허하지 않으시니, 대소 신료들은 전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몰라서 답답해 하고 번민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묵묵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탁주한의 일은 이 일에 관련되지 않는다."
하였다. 최계옹이 말하기를,
"간관(諫官)이 되어 대신을 바로잡지 못하면, 장차 그런 간관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청컨대 간관의 직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상소문을 보니, 그 속에 대신의 말을 내가 차용(借用)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슨 말인가? 내가 가장 미워하는 바는 토호(土豪)이다. 이 무리들은 응당 바쳐야 할 조세도 관명하면서 바치지 않다가 행여나 탕감해 주기를 바라니, 그 습성이 매우 밉기 때문에 늘 이를 통렬히 다스리고자 하였으며, 지금 백성들에게 환급을 아니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하였다. 최계옹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늘 대신의 말을 소중히 여기기 때무에 신의 말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좌·우상(左右相) 역시 태복시에 환속(還屬)시키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토호들이 밉기 때문에 끝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대신이 이를 말한다 해도 나의 뜻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어찌 감히 좌·우상을 빙자해서 말하는가? 대간(臺諫)의 체모로서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네가 나를 만만하게 보느냐? 어찌 이토록 경시하는가?"
하였다. 임금의 말씀과 안색이 엄하여지자 최계옹이 일어서서 사죄하고 말하기를,
"신이 일찍 부모를 잃고 오직 전하만을 의지했는데 전하께서 신을 이처럼 꾸짖으시니, 신이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다소 풀어지면서 말하기를,
"시종 이기려고만 힘쓰니 일이 심히 해괴하다. 사간 최계옹을 체차(遞差)하라."
하였다. 최계옹이 물러나가자, 승지 이징귀(李徵龜)가 환수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른바 당진(唐津)·태안(泰安)의 목장은 백성의 세전지업(世傳之業)으로 내려온 지 백년이 지났는데 하루아침에 빼앗겼으니, 그들이 억울하다고 일컫는 것은 마땅하다. 더군다나 이미 주었다가 도로 빼앗아 끝내 믿음을 잃는 데로 돌아가 이로써 백성의 원망이 더욱 불어나므로, 최계옹이 입이 쓰도록 힘써 다툰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며 실신(失信)을 위한 것이니, 그의 말은 경솔히 여길 일이 아니다. 옛날 상림원(上林苑)597) 의 공지에 백성을 들여보내 농사짓게 하라는 주청(奏請)이 있었으니, 재상들이 백성의 편의를 도모한 것이 이와 같았다. 설사 목장의 적기(籍記)가 거짓이 아니요 마정(馬政)이 긴급할지라도 그 전지(田地)를 백성들에게 주어 생업(生業)의 길을 찾게 한다면 태복시(太僕寺)에 무슨 손실이 있기에 대신들의 굳게 버팀이 이와 같으니,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 역시 백성을 위하여 상림원(上林苑)의 공지를 청한 것과 너무 현격(懸隔)한 차이가 있다. 임금이 바야흐로 〈대신이〉 마음에 들어 임용하여 은총(恩寵)을 베풀어 먼저 그 말을 받아들였으므로 대신(臺臣)의 말이 비록 절실하였으나, 마침내 임금의 뜻을 돌이키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최계옹이 성품은 비록 경솔하나 또한 소박하고 정직하여 남구만(南九萬)이 장희재(張希載)를 옹호(雍護)하던 날에 글을 보내 힘써 변론했으니, 옛사람의 주기(奏記)598) 하고 간쟁(諫諍)하는 풍도(風度)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인대(引對)하겠다는 명을 급히 내리니, 비록 두려우나 임금 앞에서도 대답하는 바가 굽힘이 없어 가끔 거칠고 예의를 모르는 듯한 태도가 있었는데, 임금이 또한 노여움을 거두고 특별히 대신을 위안시키기 위하여 체직(遞職)시켰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120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농업-전제(田制)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註 596]첩(帖) : 상관(上官)이 7품 이하 관원에게 내는 공문서.
- [註 597]
상림원(上林苑) : 진(秦)나라 시대의 어원(御苑).- [註 598]
주기(奏記) : 서판(書板)에 기록하여 상주(上奏)하는 것.○司諫崔啓翁以聖批嚴峻, 引避曰: "古之大臣, 爲國種德; 今之大臣, 爲國斂怨。 古之大臣, 引君當道; 今之大臣, 迪上非典。 此臣所以正言不諱, 非敢侵斥大臣, 欲以正國事耳。 近來士夫家率畜官妓者, 率多人言, 而首相之家, 嬖妾尤盛, 列屋閑居, 妬寵爭姸, 窮奢極侈, 世無其比。 賄賂干請, 輻湊其門, 吏胥之升降, 屯監之差出, 皆出其手, 富倉饒司, 庫直書員, 非其奴則婢夫, 衆妾兄弟, 夤緣射利, 太僕屯穀, 多歸於受帖發賣, 以致本寺之空虛。 甚至於將校之差也, 爲主將者, 不得下手, 其他鄙瑣之事, 不一而足, 終至於病國害民之歸, 是皆由於厥輩之幻弄, 豈大臣之盡知哉? 此實愚臣之咄咄衋傷, 必欲其自首而痛絶其根也。" 啓入, 久不下答, 至曛黑, 命引見責之曰: "昨疏, 侵斥大臣, 不遺餘力, 今托以公事, 恣意構誣。 領相, 體國之大臣, 而欲擠之萬仞坑塹, 予欲知其用意矣。" 啓翁曰: "臣豈有構誣大臣之意乎? 臣新從下土來, 得聞物議, 非臣一人之言也。 向見右相以爲: ‘自上疑臺諫受囑, 而有私於場民, 極可悶歎。’ 閔鎭厚、金鎭龜, 亦以爲: ‘領相於此事, 終不回聽, 無可奈何?’ 云矣。" 上曰: "領相只欲收拾牧場, 而擠陷至此, 用意極不美也。" 啓翁曰: "今此論啓, 非臣獨爲也, 權尙游首發此論。" 上曰: "啓辭中乃曰, 以致本寺之空虛云, 然則領相私用而然耶?。" 啓翁曰: "其妾之族屬, 以賤價, 售得發賣之屯穀, 濫徵於屯所, 屯民不勝其苦, 仍致本寺虛耗, 故臣不敢不以正對矣。 大臣所謂: ‘牧場, 雖屬司僕, 與納稅戶曹無異, 民不冤之’ 云者, 極爲可怪。 李健命亦云: ‘領相此言, 不成說矣。’" 上曰: "予旣召問, 則宜以已見陳白, 而今乃云金鎭龜曰如此, 閔鎭厚、李健命曰如此, 告君之體, 豈容如是? 大臣有罪則固可罪之, 此則自是公事, 而憑藉構誣, 少無顧忌, 雖曰臺諫, 何敢構誣體國之大臣至此乎?" 啓翁謝不識體例, 仍曰: "臣之所論, 不過終日正言也。 豈敢以虛言罔上乎?" 上微笑曰: "以正言自贊, 可謂愚矣。" 啓翁曰: "臣聞領相, 於夏間, 還送原州、北道兩妓, 回馬卽又率來, 成川妓, 則仍爲留畜, 其妾妖邪, 重貽累名。 臣意以爲大臣, 推考警責可矣。" 上曰: "迂闊哉! 大臣推考, 自古有之乎?" 啓翁, 又謝不識事體, 且曰: "牧場百姓, 呼泣道路。 今若還給, 則雖被妄言之誅, 瞑目於地下。 大臣雖以此嫉臣, 臣亦不畏之矣。 大臣, 亦臣平日相愛之間, 至於此事, 貽累聖德, 實無可惜之心。 且於卓柱漢事, 殿下不允其推覈正罪之請, 大小臣憭, 未曉聖意所在, 莫不悶鬱矣。" 上默然良久曰: "柱漢事, 不干於此事矣。" 啓翁曰: "爲諫官而不能規大臣, 則將焉用彼諫官哉? 請去諫官之職。" 上曰: "昨見疏辭, 有曰借用大臣之言, 此何謂也? 予最所憎者, 土豪也。 此輩應納之物, 亦觀望不納, 冀或蕩減, 其習極可惡, 故每欲痛治之。 今之不欲還給者, 以此也。" 啓翁曰: "殿下每以大臣之言爲重, 故臣言如此, 而左右相, 亦以還屬太僕, 爲不可矣。" 上曰: "土豪可惡, 故終始不許。 雖大臣言之, 不能奪予之志矣。 何敢藉重於左右相而爲言乎? 臺體豈容如是? 爾視予爲柔軟乎? 何得輕視乃爾?" 上聲色俱厲, 啓翁起謝曰: "臣早喪父母, 惟殿下是恃, 而殿下責臣至此, 臣何所歸乎?" 上意少解曰: "終始務勝, 事甚駭然。 司諫崔啓翁遞差。" 啓翁趨出, 承旨李徵龜請還收, 不納。
【史臣曰: "所謂唐、泰牧場, 爲民人世傳之業者, 殆過百年, 一朝見奪, 其所稱冤, 固也。 況旣予還奪, 終爲失信之歸, 以此民怨益滋。 啓翁之苦口力爭, 爲民也, 爲失信也, 其言未可忽也。 古有上林空地, 令民入田之請, 宰相之欲便民有如此者。 藉令籍記不虛, 馬政是急, 因以與之, 以業民生, 顧何損於太僕, 而大臣之堅執如此, 不亦謬乎? 其亦異乎爲民請苑者矣。 上方嚮用眷注, 先納其言, 故臺臣之言雖切, 而竟不能回天, 惜也! 啓翁性雖輕率, 而亦頗樸直, 當南九萬容護希載之日, 抵書力辨, 有古人奏記規爭之風。 至是, 引對之命遽下, 始雖震怖, 而及至上前, 所對無屈撓, 間有踈野之態, 上亦爲之霽威, 特以慰安大臣, 命遞其職。】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1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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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5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