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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40권, 숙종 30년 11월 12일 무신 2번째기사 1704년 청 강희(康熙) 43년

홍영의 단 쌓는 일을 논한 상소에 대한 호조 참판 김진규의 상소문

호조 참판 김진규(金鎭圭)가 정언 홍영(洪泳)이 상소하여 논한 단(壇)을 쌓는 일로써 상소하기를,

"홍영이 신(臣)의 품정(稟定)한 바를 잘못 의논한 것이 매우 많은데, 이에 대하여 모두 변설(辨說)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무릇 제단에 호칭이 있음은 대개 이를 표지(表識)하려는 까닭이니, 역대의 사전(祀典)을 상고해 보아도 일찍이 단(壇)이 있으면서 호칭이 없는 것은 있지 않았는데, 지금 단의 호칭을 내걸지 말고자 하는 것은 그 어디에서 증거를 인용한 것입니까? 비록 홍영이 제천(祭天)을 인용하여 이를 말하였으나, 예로부터 혹 태단(泰壇)이라 이름하거나 혹 원구(圜丘)라 이름하였는데, 이 제단만은 호칭을 게시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층계(層階)를 9급(級)으로 정한 것은 이 단에 천자의 제도를 쓰고자 하는 바이니, 이것은 본디 불가(不可)할 것이 없으며, 더군다나 원구의 계단이 9급인데, 홍영이 어찌 제천(祭天)을 이끌어 비유하여 9급으로 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제후로써 천자를 제향하는 것은 그 예가 지극히 중대한데, 어찌 의물(儀物)을 갖추지 않을 수 있으며, 이미 의물을 갖춘다면 또 어찌 실(室)을 쌓아서 이를 보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금중(禁中)에 있다고 하여 관리가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영소전(永昭殿)580)경녕전(敬寧殿)581) 에는 모두 수직하는 관리가 있으며, 만약 그것이 빈 단이어서 관리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경복궁(景福宮) 또한 단지 공지여서 전각이하나도 없으나 안에는 중관(中官)이 있고 밖에는 위장(衛將)을 두어 이를 지키고 있으며, 또 그가 인용한 바 교천(郊天)의 제단은 당(唐)·송(宋) 이래 모두 교사령(郊社令)을 두었고, 조종조(祖宗朝)에서 성신(星辰)을 초제(醮祭)582) 하는 곳에는 소격서(昭格署)를 설치(設置)하여 제조(提調)와 낭속(郞屬)들을 두었으니, 지금 예관(禮官)을 보내어 천자의 제단을 수직함이 어찌 하지 못할 일이겠습니까? 옛날에 문소전(文昭殿)583) 이 진실로 궁성 안에 있었으나, 압존(壓尊)한다 하여 조하(朝賀)와 경필(警蹕)을 폐한 일은 일찍이 없었으니, 아버지는 임금에 대해서 존귀함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주(周)나라 왕실의 명당(明堂)은 상제(上帝)와 문왕(文王)을 함께 제사하는 곳인데, 천자가 또 병풍(屛風)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제후들의 조하를 받았으나 일찍이 압존으로 폐한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예법은 멀리는 주나라 황실을 모방하고, 가까이는 조종을 본받는 것이 옳은데, 홍영이 고거(考據)한 바가 이보다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비록 이 단에 한 자의 칭호와 여러 급의 층계(層階)가 없고, 또 의물과 수직관(守直官)을 갖추지 않는다 하더라도 천자를 향사(享祀)하는 곳임은 진실로 다를 것이 없는데, 과연 압굴(壓屈)될 만한 것이 있다면 또한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수치를 끼친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많은 의리가 있으나, 어찌 홍영의 단사(單辭)로써 굳혀 정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아! 천지가 번복된 지 지금 60여 년이 되었으니, 이는 충의지사(忠義之士)가 침통해 하고 영원히 상심(傷心)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천도(天道)는 음기(陰氣)가 성만(盛滿)하다 하여 양기(陽氣)가 생기지 않은 것이 아니고, 군자는 형세(形勢)가 곤궁하다 하여 그 뜻을 세우지 않는 것이 아니니, 《시경(詩經)》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이 변풍(變風)의 끝에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 개연(愾然)히 흥감(興感)하셔서 이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만백성의 민이(民彝)를 부식(扶植)하는 성대한 거조는 공부자(孔夫子)584)《시경》을 산삭(刪削)한 유지(遺志)를 터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비록 피폐(皮弊)를 갖추어 청나라를 두려워하는 시기라 하더라도 또한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의리585) 를 펼 수 있다면, 순종(順從)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홍영은 이를 이끌어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말은 비록 수치를 끼치는 일이라 하지만, 그 뜻은 대체로 칙사(勅使)를 영접하는 데 구애받아 의물(儀物)과 제도(制度)를 덜고자 하는 것일 뿐이니, 대의(大義)에 비추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중국이 망하여 한 칸의 의탁할 모옥(茅屋)도 없으므로, 한 그릇의 맥반(麥飯)도 천신(薦新)하지 못하였는데, 성상께서 하시는 이 거사는 황령(皇靈)의 돌아보심[格顧]을 바라는 것이니, 어찌 때로 제전을 올리는 데에 그칠 따름이겠습니까? 우러러 생각하건대, 대월(對越)586) 하는 마음은 은미(隱微)하거나 밝게 드러내는 차이가 없는데, 오직 유사(有司)의 신하가 신(神)을 섬기는 의례(儀禮)를 다하여 성상의 마음에 부응하지 못했으므로, 모든 단제(壇制)에 관계되는 것을 반드시 융숭하게 하고자 함은 이 때문인데, 홍영은 신과 의견의 차이가 이와 같으니, 또한 괴이한 일입니다. 자사자(子思子)《시경》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신께서 강림(降臨)하시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하물며 게을리하겠는가?’ 하였는데, 홍영의 이 뜻은 싫어하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성대한 거사가 있고 신은 성상의 뜻이 보통의 만배나 뛰어남을 우러러 감복하면서 조정의 의논이 성의(聖意)를 받들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근래 이언(異言)이 점차 많아지고 속견(俗見)에 얽매여 대각(臺閣)에 있는 자들이 말하여, 위로는 조의(朝儀)의 압존(壓尊)을 빙자(憑藉)하여 막았고, 중으로는 북사(北使)의 영접을 핑계하여 저지(沮止)하였으며, 끝으로는 공역(工役)의 경비를 비유하여 절손(節損)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는데, 무릇 그 말하는 바가 본래 어긋남이 많으니,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뜨려질 것이나, 그들이 강론(强論)하여 구책(咎責)한 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아! 상하(上下)가 전도(顚倒)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우로(雨露)의 은택이 점점 멀어졌으므로, 습속에 익숙해지고 의리에 어두워져서 상도(常道)를 지키려는 마음이 점차 없어지는데, 차마 이러한 의논을 하게 되었으니, 그 세도(世道)에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이 의논을 분별하지 않으면 의리(義理)가 장차 더욱 어두워지고, 세도가 장차 무너질 것이니, 이 성대한 거사를 구차히 완료하는 데에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데 그칠 뿐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이 거사를 하심은 참으로 성조(聖祖)의 유지(遺旨)를 계승하시는 것인데, 조신(朝臣) 가운데 선정신(先正臣) 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같이 좌우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는 까닭에 저 속된 견해와 이의(異義)를 제기(提起)하는 자들이 대의(大義)의 소재를 모르고 저지하며 흔들어 대는 논의가 존경(尊敬)하는 곳까지 미쳤으니, 이는 대개 불초한 신이 세상으로 더불어 서로 어긋나고 외람되게 직책을 이어받아 이 일을 담당하게 된 소치(所致)입니다. 진실로 그 원인을 추구(追究)한다면 허물은 신에게 있으니, 바라건대 신의 죄를 다스려 이 거룩한 일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신(諫臣)의 소어(疏語)를 옳지 않다고 하여 버려두고 채택하지 않았는데, 경의 인혐(引嫌)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1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풍속-예속(禮俗)

  • [註 580]
    영소전(永昭殿) : 숙종의 비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혼전(魂殿).
  • [註 581]
    경녕전(敬寧殿) : 숙종의 비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혼전.
  • [註 582]
    초제(醮祭) : 별에 지내던 제사.
  • [註 583]
    문소전(文昭殿) :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 처음에는 태조와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혼전(魂殿)이었던 것을 세종 15년(1433)에 태조의 혼전의 이름을 따라 문소전이라 하여 경복궁 안에 원묘(原廟)를 세웠음.
  • [註 584]
    공부자(孔夫子) : 공자(孔子).
  • [註 585]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의리 : 《서경(書經)》 하서(夏書)에 보면, "강수(江水)와 한수(漢水)를 모아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한다.[江漢朝宗于海]"는 말이 보이는데, 제후들이 봄에 천자(天子)를 조현(朝見)하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조현하는 것을 종(宗)이라 하니, 곧 조종(朝宗)은 강물이 바다로 ‘제후들이 천자를 조현하듯’ 흘러 들어간다는 뜻임. 강수와 한수는 형주(荊州)에서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감.
  • [註 586]
    대월(對越) : 신명(神明)에게 대함.

○戶曹參判金鎭圭, 以正言洪泳疏論築壇事, 上疏曰:

之訾議, 臣所稟定者甚多, 而此皆有可辨者。 夫壇之有號, 蓋所以表識之也。 歷稽祀典, 未嘗有壇而無號, 則今之欲勿揭壇號, 其何所援據也? 雖以所引祭天而言之, 自古或號泰壇, 或號圜丘, 而此壇則謂不必揭號, 此果成說乎? 九其陛級者, 欲用天子之制於此壇也。 此固未見其不可, 而況圜丘之陛九級, 則何以援比祭天, 而謂不必九級也? 以諸侯享天子, 其禮至大, 何可不備儀物, 而旣備儀物, 則又何可不築室而藏之耶? 若以其在禁中, 而謂不必官守, 則永昭敬寧殿, 皆有守直之官矣, 若以其空壇而謂不必官守, 則景福宮, 亦只空地, 無一殿閣, 而內有中官, 外置衛將而守之矣。 且其所引郊天之壇, 唐宋以來, 皆置郊社令, 祖宗朝星辰醮祭之所, 則爲設昭格署, 有提調、郞屬焉。 今之遣禮官而守天子之壇, 豈是不可爲者耶? 昔者文昭殿, 寔在宮城之內, 而未嘗以其壓尊而廢朝賀、警蹕。 父之於君, 其尊同焉。 室之明堂, 乃所以祀上帝與文王者, 而天子又負扆南面於此而朝諸侯, 未嘗以壓尊而廢焉。 今日之禮, 遠倣室, 近法祖宗可矣。 未知所考據, 有愈於此耶? 且雖使此壇, 無一字之號, 數等之級, 又不備儀物置守官, 其爲享天子之所, 則固無異也。 果有可以壓屈者, 則亦何間哉? 若乃貽羞云者, 儘有許多義理, 此豈單辭之所可硬定也? 噫! 天地之飜覆, 今餘六十年矣。 此忠義之士所以沈痛永傷而然, 天道不以陰盛而不生其陽; 君子不以勢窮而不立其志。 《匪風》《下泉》, 居變風之終者, 卽此義也。 惟我聖上, 愾然興感, 爲此存天理植民彝之盛擧, 可謂得夫子刪詩之遺旨矣。 況雖在皮幣畏天之時, 亦可伸江、漢朝海之義, 則是宜將順之不暇, 而乃引此爲難。 其言雖曰貽羞, 其意蓋是拘於迎接, 欲損儀制耳, 此於大義, 果如何耶? 臣愚以爲, 中華淪喪, 一間之茅屋靡托, 一盂之麥飯莫薦, 則聖上之爲此擧, 其欲望皇靈之格顧, 豈止奠獻之時而已哉? 仰惟對越之心, 罔間微顯之際, 而惟有司之臣, 不能自盡於事神之禮, 以副聖心, 故凡係壇制, 必欲致隆者此也, 而之與臣不同如此, 其亦異矣。 子思子之引《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之此意, 不幾於厭斁耶?

又曰:

自有此盛擧, 臣仰感聖意之出尋常萬萬, 而俯歎朝議之不能奉承矣。 比來異言漸滋, 俗見拘攣, 居臺省者, 至以爲言, 上藉朝儀之壓尊以撓之, 中托北使之迎接而沮之, 末則計較功役之費, 欲以節損之。 凡其所言, 固多紕繆, 不攻自破, 而若其所以强論而深咎, 則蓋非偶然而發也。 噫! 冠履之倒置已久, 雨露之遺澤寢遠, 故狃於習俗, 昧於義理, 馴致牿亡其秉彝之心, 而忍爲如此之議, 其所以害世道, 不可勝言。 今若不辨此議, 則義理將益晦矣, 世道將益壞矣, 恐不止於盛擧之苟然完了, 有始無終而已也。 仍念殿下之爲此擧, 誠足以適繼聖祖之遺志, 而朝臣無有如先正臣金尙憲宋時烈者, 以左右贊襄之故, 彼俗見與異言, 不知大義之所在, 沮撓之論, 及於尊敬之地, 此蓋以臣不肖, 與世枘鑿, 而承乏相其事之致也。 苟究其由, 罪實在臣, 乞治臣罪, 以重盛擧。

答曰: "諫臣疏語, 不以爲是, 置而不用, 則卿之引嫌, 無已太過?"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1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