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대영에 신종 황제의 단을 설치하는 것을 의논하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서종태(徐宗泰)와 예조 참판(禮曹參判) 김진규(金鎭圭)가 청대(請對)하여 단(壇)을 설치하는 처소(處所)를 품정(稟定)하였다. 처음에 신종 황제(新宗皇帝)의 사단(祀壇)에 대한 의논을 이미 정하고, 금원(禁苑)에 설축(設築)하려 하였으나, 설치할 만한 곳이 없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혹은 광지영(廣智營)에 설치하자고 하고 혹은 별대영(別隊營)에 설치하자고 했는데, 광지영은 지세(地勢)가 협착하고 별대영은 연로(輦路)가 불편하였으므로,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내빙고(內氷庫)로 정하고, 빙고(氷庫)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청하였다. 그 후 민진후가 명령을 받들어 외방(外方)에 나갔으므로, 김진규(金鎭圭)가 대신 그 일을 관장(管掌)하게 되어 장차 터를 닦아 역사를 시작하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두 신하가 청대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 등이 자문감(紫門監)의 관원을 시켜 빙고(氷庫)를 옮길 만한 곳을 간심(看審)하여 지보(地步)를 척량(尺量)하게 하였는데, 모두 부족하였습니다. 빙고 또한 중대하니, 사세(事勢)가 염려스럽습니다. 별대영(別隊營)의 형세가 가장 편리하고 좋으나, 군영(軍營)의 옥사(屋舍)를 많이 허물어야 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처음에는 감히 곧바로 청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일의 형편이 이를 버리고는 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김진규가 또 말하기를,
"신이 가서 영상(領相)과 좌상(左相)을 보고 이러한 곡절(曲折)을 말하였더니, 대신도 또한 옳게 여겼으며, 훈련 대장(訓鍊大將)을 청하여 물었더니 역시 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이보다 더 존중(尊重)할 것이 없는 일을 하는데, 어찌 감히 본영(本營)을 허무는 것에 대하여 지난(持難)할 것인가? 다만 본영의 고사(庫舍)에 쌓아둔 군향곡(軍餉穀)이 있으니, 이는 마땅히 뒷날 연중(筵中)에서 옮겨 둘 곳을 품정(稟定)하고, 조용히 허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신과 장신(將臣)의 뜻이 이미 귀일(歸一)되었으니, 초기(草記)로써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면진(面陳)하여 자세히 아뢰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이에 감히 청대(請對)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내빙고로써 터를 정한 것은 그 금중(禁中)의 땅을 취한 것이다. 이제 빙고를 옮겨 설치하는 것은 불편(不偏)하니, 별대영을 단(壇)의 터전으로 정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김진규가 말하기를,
"단소(壇所)를 이미 이곳에 정하였으니, 후원(後苑)의 서쪽 담과 본영(本營)의 동쪽 담 사이를 마땅히 연결시켜 쌓고, 후원의 담을 뚫어 문으로 만들어서 친제(親祭) 때 거둥하는 길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마땅히 자문감(紫門監)에 분부하시어 거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명하여 문제(門制)는 집춘문(集春門)의 제도에 의하여 조성(造成)하되, 보연(步輦)이 드나드는 곳으로 하였다. 인하여 ‘조종(朝宗)’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그 뒤에 김진규에게 명하여 팔분체(八分體)로 편액(扁額)을 써서 올리게 하고, 판(板)에 새겨 걸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113면
- 【분류】외교-명(明) / 풍속-예속(禮俗) / 왕실-종사(宗社)
○工曹判書徐宗泰、禮曹參判金鎭圭請對。 以設壇處所稟定。 初神宗皇帝祀壇, 議旣定, 將設築於禁苑, 而無可處。 諸議或在廣智營, 或在別隊營, 而廣智營則地勢狹窄, 別隊營則輦路不便。 禮曹判書閔鎭厚請以內氷庫爲定, 而移氷庫於他所。 其後因鎭厚奉命出外, 鎭圭替管其事, 將開基始役, 至是兩臣請對白上曰: "臣等令紫門監官員, 看審氷庫可移之處, 尺量地步, 而皆不足。 氷庫亦重大, 事勢可慮。 別隊營形勢最便好, 而以軍營屋舍, 多撤毁爲難, 初不敢直請, 到今事勢, 恐捨此則莫可。" 鎭圭又曰: "臣往見領、左相, 言此曲折, 則大臣亦以爲然, 邀訓鍊大將問之, 亦謂朝家爲此莫尊莫重之擧, 何敢持難於撤毁本營乎? 但本營庫舍, 有藏置餉穀, 此則當於後日筵中, 稟定其移置處, 從容毁之云。 大臣與將臣之意, 旣已歸一, 欲以草記陳達, 而不如面陳之詳悉, 故玆敢請對矣。" 上曰: "當初以內氷庫定基者, 取其禁中地也。 卽今氷庫移設難便, 以別隊營, 定爲壇基可也。" 鎭圭曰: "壇所旣定於此, 則後苑西墻, 與本營東墻之間, 當連接築之, 鑿苑墻爲門, 以爲親祭時擧動之路。 此則宜分付紫門監擧行矣。" 上可之。 且命門制, 依集春門制造成, 以爲步輦出入之地。 仍命名曰, 朝宗。 其後, 命金鎭圭, 以八分書進扁額, 刻板而揭之。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1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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