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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0권, 숙종 30년 9월 10일 정미 1번째기사 1704년 청 강희(康熙) 43년

각 고을에 진청을 설치해 시행할 것을 이유가 아뢰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공사(公私)가 적립(赤立)428) 하였으나 수습할 수 없으니, 이는 상시(常時)에 축적(蓄積)에 유의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이 천한 때에는 일찍이 거두어 저장하는 일이 없다가, 한 번 흉년을 만나면 벼슬을 팔아 곡식을 모으는 것 같은 일체의 구차한 정사(政事)를 행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수령(守令)이 사사롭게 진자(賑資)에 대비(對備)하는 경우 급한 시기에 임하여 취해서 마련하는 것 또한 해를 끼치는 단서(端緖)가 없지 않으니, 신은 일찍이 이를 개연(慨然)하게 여겼습니다.

올해에 삼남(三南)이 비록 흉년이 들었다 하나, 다른 도(道)는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각 고을에 진청(賑廳)을 설치해서 일을 아는 향소(鄕所)로 하여금 주관(主管)하여 먼저 본고을에 비치한 진휼곡(賑恤穀) 약간 석(石)을 획급(劃給)하되, 고을의 크고 작음에 따라 곡식의 수량을 작정(酌定)하여 근본(根本)을 삼은 뒤 수령(守令)이 그 소득(所得)에 따라 벼슬이 갈려 돌아갈 때마다 그 가운데에 덧붙여 성책(成冊)429) 해서 감영(監營) 및 진휼청(賑恤廳)에 보고하여 알릴 것이며, 그 곡식은 일체 조적(糶糴)430) 하지 말고, 3년에 이르러 그 고을의 본래의 조곡(糶穀)과 서로 바꾸어 개색(改色)431) 해서 매번 이로써 규례를 삼고, 흉년을 만난 뒤에 비로소 나누어 진휼(賑恤)한다면, 그 급한 시기에 임하여 벼슬을 파는 일에 견주어 난이(難易)와 득실(得失)을 같이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것으로써 남중(南中)의 어느 수령(守令)에게 말하였는데, 근래에 들으니, 그대로 행하여서 곡물을 많이 모았다고 합니다. 마땅히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제도(諸道)의 각 고을에 분부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106면
  • 【분류】
    재정-국용(國用) / 재정-창고(倉庫) / 구휼(救恤)

  • [註 428]
    적립(赤立) : 텅비어서 아무 것도 없음.
  • [註 429]
    성책(成冊) : 문서를 만듦.
  • [註 430]
    조적(糶糴) : 봄에 나라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꾸어 주는 것을 조(糶)라 하고, 가을에 백성들에게 꾸어 주었던 곡식에 10분의 1 이자를 붙여서 거두어 들이는 것을 적(糴)이라 함. 곧 곡식을 꾸어주거나 거두어 들이는 것.
  • [註 431]
    개색(改色) : 다른 곡식으로 바꿈.

○丁未/引見大臣、備局諸臣。 右議政李濡曰: "連歲饑荒, 公私赤立, 莫可收拾, 此蓋由於常時不能留意於蓄儲故也。 年豐穀賤之時, 曾無收藏之事, 一遇凶荒, 如賣爵聚穀一切苟且之政, 靡不爲之。 守令之私備賑資者, 臨急取辨, 亦不無貽害之端, 臣嘗慨然於此。 今年三南, 雖失稔, 而他道稍稔。 自今爲始, 竝令各邑設賑廳, 以解事鄕所主管, 先以本邑所置賑恤穀若干石劃給, 而隨邑大小, 酌定穀數, 作爲根本之後, 守令隨其所得, 每於遞歸之時, 添入於其中, 成冊報知于監營及賑廳, 厥穀, 切勿糶糴, 至三年, 以其邑元糶穀, 相換改色, 每以此爲例, 値凶年後, 始爲分賑, 則其視臨急賣爵之事, 難易得失, 不可同日語矣。 臣嘗以此, 私言于南中一守令矣, 近聞依而行之, 多聚穀物云。 宜令賑廳, 磨鍊節目, 分付諸道各邑而行之。"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47책 40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106면
  • 【분류】
    재정-국용(國用) / 재정-창고(倉庫)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