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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9권, 숙종 30년 6월 25일 계사 1번째기사 1704년 청 강희(康熙) 43년

대신과 비국의 재신을 인견하여 군문의 일과 이건명이 추고 당한 일 등을 의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은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상진(李尙眞)은 연로한 대신이었는데도 오히려 옥색(玉色)을 바라보기를 청한 후에 우러러보았으니, 대개 연석(筵席)이 지엄하기 때문이다. 오늘 연소한 대신(臺臣)이 자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바로 쳐다보니, 경신(敬愼)하는 뜻이 아주 없다. 사체에 미안하니 승지는 잘 알라."

하였는데, 지평 유태명(柳泰明)을 가리킨 것이다. 대사간 신임(申銋)이 아뢰기를,

"군문(軍門)의 사체는 본병(本兵)282) 이 중하여 병조 판서가 양국(兩局)283) 의 제조(提調)를 다 겸하였으면, 대장(大將)은 병조 판서와 체면(體面)이 스스로 구별이 되는데,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기하(李基夏)와 병조 판서 윤세기(尹世紀)가 서로 실수(失手)한 것은 당초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기하의 전소(前疏)는 대관(臺官)까지 아울러 갖추고 침범하여 능멸하며 조금도 자중(自重)하지 않았고, 논핵을 당한 후에도 오히려 스스로 개전(改悛)하지 않았으며, 그의 후소(後疏)에 이르러서는 함부로 자신을 삼공(三公)의 존귀함에 비하고, 또 여항(閭巷)의 험악한 말투로 윤세기를 욕하였으니, 그의 교만하고 패악함이 심합니다. 청컨대 이기하를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미 추고하였다.’고 말하면서 따르지 않았다. 신임이 이어 신완(申琓)·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의 일을 진달하고 별도로 돈면(敦勉)하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난날 이건명(李健命)이 추고당한 일은 실로 뜻하지 않은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만일 이건명이 봉명(奉命)이 있는 줄을 알았다면 어찌 하인을 추치(推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전후의 성교(聖敎)가 매우 엄준(嚴峻)하여 이건명이 불안해 하는 것은 그 형세가 그렇겠으나, 재신(宰臣)의 거취는 관계된 바가 적지 않은데, 한번 고하자 즉시 체직하여 마침내 대성인(大聖人)께서 포용하는 도량이 모자라게 되었으니, 마땅히 개석(開釋)하심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말하기를,

"인조(仁祖) 때에 조금도 볼 만한 점이 없는 대신이 있자 첫번 정사(呈辭)에 ‘계(啓)’자를 찍으라는 전교가 있었다. 이건명의 처음 사단(辭單)에서 체직을 허락한 것이 무슨 큰 일이기에 감히 여러 날이 지난 후에 번거롭게 진달하는가? 무릇 중사(中使)284) 의 적간(摘奸) 및 문안(問安) 때에는 어압(御押)을 지니기 때문에, 대신(大臣) 이하가 모두 피하는 것이고, 봉명(奉命)으로 사복마(司僕馬)를 탄 자는 피하지도 않고 물리치지도 않는 것은 예로부터 그렇다. 하인이 반드시 스스로 봉명임을 말했는데도 거짓 듣지 못한 것처럼 하여 고의로 추치(推治)한 것이니, 신하의 도리에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이건명에게 그 후 여러 차례 제명(除名)이 있었으면 그만이지 반드시 나로 하여금 사과(謝過)하게 하고자 하여 다시 개석(開釋)하라고 청하니, 내가 비록 나약한 임금이지만 어찌 이건명에게 사과할 수 있겠는가? 대사간의 직책이 어찌 죄있는 자를 영구(營救)하기 위해 있는 것이겠는가?"

하니, 신임이 마침내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좌의정 이여(李畬)가 조용히 말하기를,

"천위(天威)를 진첩(震疊)하심은 대성인의 화평(和平)한 도량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드러내고자 하여 그렇겠는가? 내가 이건명을 죄준 것은 나문(拿問)한 데 비할 바가 아니고, 일시의 경책(警責)에 불과한데, 일이 오래 지난 후에 번거롭게 아뢰어 마지 않으니, 사체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는가? 명사(名士)는 비록 과실(過失)이 있더라도 반드시 전연 허물이 없는 곳에 두려고 하니, 이런 습성은 매우 나쁘다. 어찌 이러한 대사간이 있는가?"

하였다. 지평 유태명(柳泰明)이 아뢰기를,

"신임이 아뢴 바는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사색(辭色)이 매우 격절(激切)하시니, 희로(喜怒)의 절도에 어긋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희로의 말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사체상 경책(警責)한 것을 희로로 돌린다면 문비(問備)의 박벌(薄罰) 역시 임의대로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진명이 추고를 당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나, 개석(開釋)하기를 청한 것 역시 외람되다. 그 말이 임금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오직 마땅히 순순(諄諄)하게 효유(曉諭)해야 하지 어찌 경솔히 꾸짖어야 하겠는가? 크게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를 잃은 것이다. 이건명의 일 같은 것은 단지 작은 일일 뿐이고, 근래의 중핵(重劾)을 받은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배회(徘徊)하면서 고망(顧望)하여 특이한 은혜를 바라며 개석의 전지(傳旨)를 기다려서 거취를 결정하는데, 구해 주려는 자는 문득 돈면(敦勉)하라고 청해 드디어 은명(恩命)으로 하여금 번거롭게 하여 염치가 날로 없어지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유태명이 인피하여 말하기를,

"신이 천위(天威)의 지척(咫尺)에서 우연히 찬성하지 않는 말에 귀를 기울여 몸을 돌리고 고개 들음을 깨닫지 못하고 엄교(嚴敎)를 내리게 하였으니, 황송하여 어쩔 바를 바르겠습니다. 또 신은 유명천(柳命天)이유민(李裕民)에 대한 계사에 구차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저 유명천의 권세를 탐하고 어진 사람을 해쳐 나라를 해친 죄는 방류(放流)·찬극(竄亟)으로도 오히려 속죄(贖罪)하기가 어려우니, 이것이 대계(臺啓)가 나온 까닭입니다. 그를 안치(安置)할 때 죄안(罪案)은 단지 그가 민언량(閔彦良)의 초사에서 긴요하게 나온 것을 연유했으므로, 조가(朝家)에서 엄히 국문하지 않은 것은 대개 반신 반의하는 처지에 두었던 것인데, 소결(疏決)할 때에 석방(釋放)한 것은 이에 기인(基因)한 것이나, 또 죄를 함께 받은 사람을 모두 거론하지 않고 유독 이 사람만 거론한 것이 신은 마땅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유민에 대하여는 경서(經書)에 밝은 사람이 제술(製述)에 능하지 못한 것은 마치 글을 잘 짓는 자가 경서(經書)의 뜻에 밝지 못한 것과 같은데, 경외(京外)의 사람으로 이 명경과(明經科)에 오른 자 가운데 이유민처럼 비방을 듣는 자가 전후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사람이 청도(淸塗)에 막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설사 이것이 잘못이라면 그 율(律)이 어찌 체차(遞差)하는 데만 그치겠습니까? 신의 의견이 이러하니, 청컨대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으나, 유태명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유태명이 갑자기 엄교(嚴敎)를 받고는 두려워하여 어쩔 줄을 몰라 땀이 땅이 적셨으며, 또 그 피혐하는 말이 구차하고 말이 사리에 맞지 않은 것이 많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전해 가며 비웃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삭서(朔書)285) 의 법은 본래 장려(奬勵)하기 위해서인데, 근래에는 전자(篆字)를 써올린 자들이 단지 모양에 따라 똑같이 써서 책임만 메우는 데 그치고 있어 아주 성실하지 못하다. 또 예자(隷字)는 유생(儒生)도 역시 뽑히는데 유독 전자(篆字)는 단지 문신(文臣)만 뽑으니, 아주 뜻이 없다. 지금부터는 유생 중에서 만약 잘 쓰는 사람이 있으면 역시 초선(抄選)하여 익히게 하라."

하였다. 연신(筵臣)이 또 말하기를,

"문신(文臣)으로 뽑힌 자는 모사(摸寫)하거나 혹은 차서(借書)함이 많아 전혀 익히지 않고 한갓 각사(各司)의 종이만 허비하는데, 잘 쓰지 못한 자를 감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서원(書院)의 첩설(疊設)을 금하되, 유독 대명현(大名賢)만은 구애받지 말게 하기를 청하였었다. 이후에 서원 건립을 청하는 자들은 문득 대현이라 하여 해조(該曹)에서 복주(覆奏)하는 즈음에 매양 취사하기 어려움을 걱정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비록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대현(大賢)이라도 서원을 세운 곳이 혹 수십 군데가 넘으면 이후에는 방색(防塞)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39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92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왕실-궁관(宮官) / 왕실-국왕(國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 [註 282]
    본병(本兵) : 병조.
  • [註 283]
    양국(兩局) : 어영청·훈련 도감.
  • [註 284]
    중사(中使) : 내시.
  • [註 285]
    삭서(朔書) : 40세 이하의 당하(堂下) 문관을 승정원에서 초계(抄啓)하여, 매월 삭일(朔日)에 써서 내게 하던 해서(楷書)와 전서(篆書). 해서는 1백 자를 쓰되 진초(眞草)를 겸하고,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은 40자를 쓰되 대전(大篆)을 위에 씀.

○癸巳/引見大臣、備局諸臣。 上曰: "故相臣李尙眞, 以年老大臣, 猶請瞻望玉色而後仰視, 蓋以筵席至嚴也。 今日年少臺臣, 頻頻起坐, 直爲瞻視, 殊無敬愼之意。 事體未安, 承旨知悉。" 蓋指持平柳泰明也。 大司諫申銋啓曰: "軍門事體, 本兵爲重, 兵判於兩局, 皆兼提調, 則大將之於兵判, 體面自別, 而訓鍊大將李基夏, 與兵曹判書尹世紀, 相失之事, 初非大段, 而基夏前疏, 竝與臺官而侵凌備至, 不少顧藉, 被劾之後, 猶不自悛。 至其後疏, 則肆然自比於三公之尊, 又以閭巷惡口等語, 詬辱世紀, 其驕傲悖慢甚矣。 請基夏罷職。" 上謂已推考, 不從。 仍陳申琓李頣命趙泰采事, 請別爲敦勉, 且曰: "頃日李健命被推之事, 實出無妄。 如使健命, 知有奉命, 則豈有推治下人之理哉? 前後聖敎, 極其嚴峻, 健命不安, 其勢固然, 而宰臣去就, 關係不少, 一告卽遞, 終有歉於大聖人包容之量, 宜賜開釋。" 上震怒曰: "仁廟朝, 有大臣, 如無可觀處, 初度呈辭, 踏啓字之敎矣。 健命之初單許遞, 胡大事也, 乃敢煩陳於累日之後耶? 凡中使摘奸及問安時, 帶御押, 故大臣以下皆避。 至於奉命騎司僕馬者, 不避不辟, 自古而然。 下人必自言其奉命, 而佯若不聞, 故爲推治, 臣子道理, 安有是耶? 健命, 其後屢有除命, 則便可已矣, 而必欲使予摧謝, 更有開釋之請, 予雖爲君軟懦, 豈可摧謝於健命乎? 大司諫之職, 豈爲營救有罪者而設耶?" 遂引避退待物論, 左議政李畬, 從容言: "天威震疊, 恐非大聖人和平之度。" 上曰: "子豈暴露而然哉? 予之罪健命, 非如拿問之比, 不過一時警責, 而事久之後, 煩聒不已, 事體安敢乃爾? 名士則雖有過失, 必欲置之全然無過之地, 此習甚可惡也。 安有如許大司諫乎?" 持平柳泰明曰: "之所陳, 不過辭不達意, 而辭色甚厲, 恐乖喜怒之節。" 上曰: "喜怒之說, 何所據耶? 事體上警責, 亦歸之喜怒, 則問備薄罰, 亦不可任意爲之矣。"

【史臣曰: "健命之被推, 非其罪也。 然開釋之請, 其亦猥矣。 使其言不槪於上心, 則惟當諄諄曉諭, 又何可輕加叱罵, 大失待臺閣之道也? 如健命, 特微事耳。 近來諸臣之被重劾者, 皆俳徊顧望, 徼幸異恩, 待開釋之旨, 決去就之節, 救之者輒以敦勉爲請, 遂使恩命屑越, 廉恥日喪, 可勝歎哉!"】

泰明引避曰: "臣於咫尺天威之下, 偶然側耳於吁咈之音, 不覺轉身而擧頭, 致勤嚴敎, 惶隕罔措。 且臣於柳命天李裕民之啓, 有不可苟同者。 夫命天貪權樂勢, 戕賢病國之罪, 流放竄殛, 尙且難贖。 此臺啓之所以發也。 若其安置時罪案, 只緣其緊出於彦良之招, 朝家不爲嚴鞫者, 蓋置之疑信間, 而疏決時放釋, 職由於此。 且其同罪之人, 不爲竝擧, 而獨此提論者, 臣未知其得當也。 若裕民則凡明經之人, 不能製述, 有如能文者之不能明經。 京外人登此科, 而如裕民謗者, 前後何限, 而未聞其人, 枳於淸塗。 設以此爲非, 則其律奚止於遞差哉? 臣之意見如此, 請遞臣職。" 上曰: "勿辭。" 泰明退待物論。 泰明猝承嚴敎, 恇怯罔措, 流汗被地。 且其避辭苟且, 多不成說, 人皆傳笑。 上謂朔書之法, 本爲勸奬, 而近來篆字書進者, 只依樣模書, 塞責而止, 殊欠誠實。 且隷字, 則儒生亦被抄, 而獨於篆字, 只抄文臣, 殊無意義。 令自今, 儒生中如有善寫人, 亦許抄選(肆)〔肄〕 習。 筵臣又言: "文臣被抄者, 多模寫或借書, 全不肄習, 徒費各司紙地。 不如減其不能者。" 許之。 先是文純公 朴世采, 建請書院禁疊設, 獨於大名賢勿拘。 是後, 請建院者, 輒許以大賢, 該曹覆奏之際, 每患取舍之難。 至是, 禮曹判書閔鎭厚言: "雖從祀文廟之大賢, 設院處或過數十, 今後防塞, 無妨。"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46책 39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40책 92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왕실-궁관(宮官) / 왕실-국왕(國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