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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9권, 숙종 30년 6월 20일 무자 2번째기사 1704년 청 강희(康熙) 43년

지평 조태억이 인피하고자 하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지평(持平) 조태억(趙泰億)이 인피하여 말하기를,

"신이 어제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김덕기 등을 삭판(削版)하라는 계(啓)로써 신이 말한 것이 혹 실제(實際)가 아닐까 의심하고 여러 사람에게 억울한 정상이 있을까 열려하여 잡아다 조사하라는 명까지 하시었으니,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 대저 세 사람의 탐오한 죄상(罪狀)은 귀가 있으면 다 듣고 입이 있으면 다 말하지만, 특별히 그들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출입하고 있어 단한(單寒)하고 세력이 없는 사람과는 비교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거(刺擧)하는 논의가 없었는데, 신이 연소(年少)한 신진(新進)으로 갑자기 논박함이 이에 미쳤으니, 성상께서 깊이 믿지 않으심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 역시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김덕기가 기전(畿甸)의 어사(御史)가 되었을 때 포천 현감(抱川縣監) 오두성(吳斗宬)이 다스리지 못한 사실이 많이 있어 포천 백성이 어사의 행차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길가에서 호소하기를, ‘우리 원을 파직시키지 않으면 어사에게 죄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오두성이 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아노(衙奴)를 시켜 아마(衙馬)에 쌀 여섯 바리를 실어 어두운 밤에 김덕기의 집으로 운송하여 마침내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포천을 왕래하면서 그런 말을 익히 들었는데, 본현(本縣)의 관리로 그 때 대동고(大同庫)를 관장한 유성(柳姓)인 자가 그 일을 잘 안다고 하였으니, 지금 만약 조사해 물으면 그 사실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방금 오두성도 아울러 논핵하고자 하다가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한영휘(韓永徽)완산(完山)에 있을 때 그 신주(神主)를 잃어버린 순영(巡營)의 뒷간에까지 들어가 분면(粉面)과 방제(傍題)가 낱낱이 완연하였으나, 집에서 신주를 잃은 사실이 없다고 일컬으면서 마침내 그대로 눌러 있을 계책을 삼았습니다. 근래에는 그의 당종(堂從)과 땅을 다투어 담장을 쌓고 지친(至親)과 불목(不睦)하여 서로 비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동언(李東彦)은 그아비가 병이 위독해져 ‘한번 보고 싶다.’라는 말까지 있게 하였고, 그 상(喪)을 당해서는 관노(官奴)를 시켜 반함(飯含)281) 하는 것을 체시(替視)하게 했다는 말이 있었다고 파주(坡州) 사람들이 말이 그러합니다. 신이 들은 바는 범연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나, 입을 더럽히는 데 혐의하고 충후(忠厚)함을 상할까 염려하여 날낱이 조진(條陳)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이런 죄상을 곧바로 진달하여 사처(査處)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에 공도(公道)가 모두 없어지고 사의(私意)가 횡류(橫流)하여 사대부(士大夫)로서 조금만 권세가 있는 자는 각도(各道)에서 조사하여 심문하고 의금부(義禁府)에서 죄정(罪情)을 의논할 때 사실대로 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한 번 조사를 거치면 문득 곧 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니, 신이 처음에 조사를 청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진신(搢紳)을 논핵하는 율(律)로는 삭판(削版)보다 더 중한 것이 없기에 이로써 감률(勘律)하기를 청한 것도 헐후(歇後)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데,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니 신이 일을 논한 것의 잘못됨이 드러났습니다. 윤홍리는 지망(地望)이 경미(輕微)하고 사람됨이 혼열(昏劣)하여 평생의 행실이 전혀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대찬(代撰)을 빙자한 글에서는 자기를 논한 사람을 침해하고 배척하였으니 그의 처리한 바는 더욱 가소롭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을 은대(銀臺)에 합당하다고 한다면, 종전에 논핵당한 허윤(許玧)·이익태(李益泰) 같은 여러 사람이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유민(李裕民)황만증(黃晩曾)을 시켜 부(賦)를 짓게 하고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보고 있는 형상은 신이 직접 본 바이니, 이유민이 또한 어찌 감히 신의 말을 거짓이라 하겠습니까? 근래에 비록 대각(臺閣)을 많이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글을 몰라 무식하기가 이유민과 같은 데 비할 자가 없으니, 신의 이 논의는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심백(沈柏)은 대가(大家)의 아들로 글을 빌어 등제(登第)하였는데 끝내 청현직(淸顯職)을 얻지 못하였으니, 선조(先朝)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엄격하고 신중함이 어찌 오늘날의 본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또 정언(正言) 김만근(金萬謹)의 소(疏)를 보건대, 신이 논한 바를 혹은 그릇되었다 하고 혹은 협잡(挾雜)이라 하여 신을 남 모함하는 데 마음을 쓴다는 죄를 몰아넣으려 하니, 참으로 한번 웃기에도 부족합니다. 근래에 결단성 없이 머뭇거리며 아첨하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당(黨)을 비호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오직 자기와 의논이 다른 자를 배격하고 천청(天聽)을 속이는 것을 능사로 삼아, 비록 김덕기의 무리와 같은 무상(無狀)한 사람이 있어도 일찍이 한번 규핵(糾劾)하는 거조는 없고, 극력 주선하여 오직 정상이 탄로날까 두려워하니, 신이 일찍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통한(痛恨)한 지 오래였으나, 급급히 영구(營救)하는 말이 또 간관(諫官)이라 이름한 사람에게서 나오리라고는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삭판(削版)하라는 청은 본디 중론(重論)으로, 맨 마지막의 과단(科斷)이 또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르는데도 김만금이 경솔하게 앞질러 처분이 내려지기 전에 상소를 하여 신을 위협해 언로(言路)를 막으려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이는 구해(救解)하려 해도 변명할 말이 없고, 조사를 청하지 않으면 벗어날 계책이 없는데 불과하며, 또 근래에 조사하는 일이 엄하지 못함을 상세히 알고 이로써 깊은 구덩이에서 건져내려는 계책을 삼고자 하였으므로, 이런 의란(疑亂)의 말을 하여 성상으로 하여금 대각(臺閣)을 믿지 못하게 하고, 유사(有司)에게서 변무(辨誣)를 취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대각에 있는 자가 입을 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대각에서 논한 일은 이미 소문으로 들었던 것인데, 한번 중박(重駁)이 있을 경우 문득 모두 사변(査辨)한다면, 국가에서 대각을 둔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구중 궁궐 깊은 곳에 계시어 외간(外間)의 정위(情僞)를 다 살피지 못하시니, 신의 말이 과중하다고 의심하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유독 김만근만은 어찌 신이 들은 바를 못들었기에 당우(黨友)의 사정(私情)에 끌리어 곡진하게 영호(營護)하니, 이것이 어찌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으나, 조태억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39권 5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91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註 281]
    반함(飯含) : 염습(殮襲)할 때 죽은 사람의 입 속에 구슬이나 쌀·동전 등을 물리는 일. 옛날에는 천자(天子)는 주(珠), 제후(諸侯)는 옥(玉), 대부(大夫)는 벽(璧), 사(士) 이하는 쌀로 하였음.

○持平趙泰億引避曰: "臣昨承聖旨, 以金德基等削版之啓, 疑臣言之或非實際, 慮諸人之或有冤狀, 至有拿覈之命, 臣實瞿然。 夫三人者之貪汚罪狀, 有耳皆聞, 有口皆言, 特以其出入侍從之班, 非比單寒無勢之人, 故未有剌擧之論, 而臣年少新進, 驟論及此, 宜聖上未之深信也。 然臣亦有未盡言者。 德基之御史畿甸也, 抱川縣監吳斗宬, 多有不治之實。 民聞有御史之行, 呼於路傍曰: ‘不罷吾倅, 御史有罪。’ 斗宬恐其不免, 密使衙奴衙馬, 載米六駄, 昏夜運送於德基之家, 竟得無事。 臣嘗往來抱川, 稔聞其說。 本縣官吏伊時掌大同庫姓者, 詳知其事云。 今若按問, 可得其實。 臣方欲竝劾斗宬, 而未及矣。 韓永徽完山時, 見失其神主, 至入於巡(宮) 〔營〕 溷舍中, 粉面、傍題, 箇箇宛然, 而稱以家無失主之事, 遂爲因仍蹲居之計。 近與其堂從, 爭地築墻, 至於至親不睦, 交相謗毁。 李東彦父病且革, 至有思欲一見之語, 及其喪也, 乃有使官奴, 替視飯含之說。 坡州之人, 言之如此。 臣之所聞, 非比泛然, 而嫌於汚口, 恐傷忠厚, 不能一一條陳。 凡此罪狀, 非不欲直陳査處, 而近來公道都喪, 私意橫流, 士夫之稍涉權勢者, 各道按問, 金吾議讞, 多不以實, 一經行査, 便卽白脫。 臣之初不請査, 蓋以此也。 搢紳論劾, 律莫重於削版。 以此勘請, 亦不可謂歇後, 而聖敎至此, 臣之論事欠當著矣。 尹弘离, 地望輕微, 爲人昏劣, 平生行己, 都無可觀。 若其憑藉代撰之文, 侵斥論己之人, 其所處事, 尤極可笑。 若以此人, 謂可合於銀臺, 則從前被劾如許玧李益泰諸人, 寧不冤乎? 李裕民之倩賦於黃晩曾, 拱手默觀之狀, 臣所目見, 裕民亦何敢以臣言爲誣也? 近者臺閣, 雖多不擇, 無文貿貿, 未有如裕民之比, 臣之此論, 斷不可已。 沈栢, 大家子耳, 以借文登第, 終不得淸顯。 先朝用人之嚴愼, 豈非今日之可法哉? 且伏見正言金萬謹疏, 以臣所論, 或謂謬戾, 或謂挾雜, 欲驅臣於用意陷人之科, 誠未滿一哂也。 近來媕婀阿好之輩, 護黨成風, 惟以排擊異己, 欺蔽天聽, 爲能事。 雖有如德基輩無狀之人, 曾無一番糾劾之擧, 極力周旋, 惟恐情狀之綻露, 臣嘗爲世道痛恨久矣。 不料汲汲營救之言, 又出於官以諫爲名之人也。 削版之請, 固是重論, 末梢科斷, 又未知至於何境, 則萬謹之徑先投疏於處分未決之前, 脅持臣身, 遏絶言路者, 抑何意耶? 此不過欲救解, 則無辭可辨, 不請査則無計可脫。 且審知近來査事不嚴, 欲以此爲拯濟坑塹之計, 故爲此疑亂之言, 欲使聖上, 不信臺閣, 取辨有司。 此豈居臺閣者, 所可發口者耶? 臺閣論事, 旣許風聞, 而一有重駁, 輒皆査辨, 則國家置臺閣之意, 果安在哉? 聖上, 深居九重, 外間情僞, 容有未盡下察者, 疑臣言之過重, 不是異事, 而獨怪夫萬謹, 亦豈不聞臣所聞, 而牽於黨友之私, 曲爲營護之地, 此果出於公正之心乎?" 答曰: "勿辭。" 泰億, 退待物論。


  • 【태백산사고본】 46책 39권 5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91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