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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 9월 15일 무오 2번째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대신과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고 재해 대책과 이정청의 설치 등을 의논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신완(申琓)이 아뢰기를,

"조금 전 전라 감사의 장계(狀啓)를 보니, 도내에 있는 각 아문(衙門)과 여러 궁가(宮家)의 전답(田畓)이 당초 집복(執卜)564) 할 때부터 매우 과중하였고, 또 흉년을 당해도 원래 재감(災減)565) 의 규정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으며, 두곡(斗斛)566) 도 가장 커 차인배(差人輩)들이 부당하게 더 징수하는 폐해가 심하다 합니다. 그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다시 타량(打量)하여 결부(結負)를 작성하게 하고, 재해를 입은 곳은 일일이 급재(給災)하며, 쓰고 있는 두곡(斗斛)도 다시 조사해 바로잡도록 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차인(差人)들이 부당하게 더 징수(徵收)하는 데 대해서는 전일의 정탈(定奪)에 따라 본도(本道)에서 죄를 다스리도록 하여 줄 것을 청해 왔습니다. 각 아문이나 여러 궁가의 전답도 똑같이 한 나라의 일이니, 같고 다름이 있게 하여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초래해서는 아니되겠으며, 차인(差人)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폐단도 마땅히 적발되는 대로 엄중히 다스리되, 이에 의해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여러 도(道)의 유생들의 고강(考講)과 해서(海西)의 별효위(別驍衛)나 총융청(摠戎廳)의 아병(牙兵)의 상번(上番)과, 명천(明川) 이남의 진봉 호장(進俸戶長) 및 강원도의 변장(邊將)의 취재(取才)를 정지하라 명하고, 서북의 월과(月課)·영서(嶺西)의 공천(公賤)·군병(軍兵)의 신포(身布)의 3분의 2를 을해년567) 의 예대로 줄이라 명하였으니,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기하(李基夏)가 도감 군병(都監軍兵)의 여름철 옷감을 가을에도 나눠주지 못하였다 하여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포(布) 3백 동(同)을 빌려 주길르 청했는데, 이 때에 와서 또 아뢰기를,

"요사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포보(砲保)의 가포(價布)가 재량으로 줄이는 가운데 들어갔으므로, 중순(中旬)의 시상(施賞)을 못하여 군정(軍情)이 실망하고 있으니, 청컨대 강도(江都)의 포(布) 1백 동만 빌어 시상의 자료로 쓰게 하여 주소서."

하니, 허가하였다. 이기하는 오랫동안 훈국(訓局)에 있으면서 재물을 함부로 썼고, 또 여러 대의 선산에 석물을 성대히 세워서 창고가 텅비어 옷감과 상품의 용도가 있을 때마다 차대(借貸)를 청하니, 물의(物議)가 떠들썩하였다.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하라 명하고, 이유(李濡)·이인엽(李寅燁)·민진후(閔鎭厚)·윤세기(尹世紀)·유집일(兪集一)에게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이유에게 명하여 양역(良役)을 변통(變通)하게 했는데, 오랫동안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이유가 아뢰기를,

"이것은 나라의 큰 일이니 신이 혼자 할 수는 없습니다. 따로 청(廳)을 만들어 날마다 모여서 의논한다면 몇 달 안으로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영의정 신완(申琓)도 그 말이 옳다고 하여 임금이 윤허한 것이다. 이유가 이어서 아뢰기를,

"조신(朝臣)들 중에는 유집일박권(朴權)이 모두 명민(明敏)하여 세무(世務)를 잘 알고 있으므로, 신은 이 두 사람과 함께 일을 하려고 하였는데, 박권은 이미 경상 감사의 소임을 맡았고, 유집일도 북도(北道)로 나가게 되었으니, 실로 가석(可惜)한 일입니다. 이미 나간 사람은 불러오기가 어렵지만, 나가지 않은 사람은 남아 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북번(北藩)에도 적임자를 구하기가 어렵겠지만,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은 경중(輕重)의 구별이 있으니, 마땅히 변동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은 대신에게 물었다. 신완(申琓)유집일이 일을 맡길 만하다고 대단히 칭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쪽의 관문(關門)이 비록 소중하기는 하나, 이 일은 팔도(八道)의 군정(軍政)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임무가 더욱 중대하니, 그의 감사 임무를 바꾸어 함께 군제(軍制)를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이정청(釐整廳)을 설치하고, 낭청(郞廳)은 문관(文官)·무관(武官)·음관(蔭官)을 논하지 않고 가려서 임명하여 모두 8원(員)이 되었다. 유집일은 도량도 좁고 재주도 적은데, 약간의 말주변이 있어 조그만 재능을 자랑하여 팔며 진취(進取)를 꾀하고 있었으니, 신완이 책자로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모두 유집일이 주장한 것이다. 묘당(廟堂)에서는 시무(時務)에 통달한 줄 알고 추장(推奬)하여 비국 당상(備局堂上)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공론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에 유집일을 위하여 일국(一局)을 따로 설치하였다. 그러자 유집일은 더욱 망령되게 잘난 체하며 모든 일을 뜯어 고치려 들었으므로, 식자들은 그가 반드시 실패할 줄을 알았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38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6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인사-선발(選拔) / 구휼(救恤)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 인물(人物) / 인사-임면(任免)

  • [註 564]
    집복(執卜) : 농작물(農作物)이 잘되고 못된 것을 실지 답사(實地踏査)하여 땅의 구실을 매기는 일.
  • [註 565]
    재감(災減) : 재해(災害)가 늘 때 세(稅)를 감해 주는 일.
  • [註 566]
    두곡(斗斛) : 곡식을 되는 말과 휘.
  • [註 567]
    을해년 : 1695 숙종 21년.

○上引見大臣、備局諸宰。 領議政申琓曰: "卽見全羅監司狀啓, 則以爲道內各衙門, 諸宮家田畓, 當初執卜, 已極過重, 而又當凶歲, 元無災減之規, 民皆呼冤, 且斗斛最大, 差人輩多有濫觴之弊。 令該邑守令, 打量作結後, 被災處, 一一給災, 行用斗斛, 亦爲較正。 其中差人之橫濫者, 依前日定奪, 自本道囚治爲請矣。 各衙門、諸宮家田畓, 同是一國事, 則不可使有異同, 以致民怨, 而差人作挐之弊, 亦宜隨現重究, 使之依此施行何如?" 上曰: "依爲之。" 命停諸道儒生考講及海西別驍衛、摠戎牙兵上番, 明川以南進俸戶長, 江原道邊將取才, 減西北月課, 嶺西公賤、軍兵身布三分之二, 如乙亥例。 以年凶也。 初訓鍊大將李基夏以都監軍兵夏節衣資, 到秋未頒, 請貸南漢木三百同, 至是, 又奏言: "近因飢荒, 砲保價布, 入裁省中, 不得設行中旬, 軍情缺望。 乞得江都木百同, 以爲施賞之資。" 許之。 基夏久處訓局, 濫用財貨, 又盛治累世石役, 帑藏一空, 衣資、賞齎之用, 輒請借貸, 物議譁然。 命設釐整廳, 以李濡李寅燁閔鎭厚尹世紀兪集一, 管其事。 初, 上命, 變通良役, 久不決。 至是, 奏言: "此, 國之大事, 非臣一人所可獨爲。 若別爲設廳, 逐日會議, 則數月之內, 可以就緖矣。" 領議政申琓, 亦言其可, 上許之。 仍曰: "朝臣中兪集一朴權, 俱明敏曉世務, 臣欲與此二人同事, 而旣受任嶺臬, 集一又將北出, 實爲可惜。 已出者雖難還入, 未去者猶可留之。 此時北藩, 亦難其人, 而內外輕重有別, 宜賜變通。" 上問大臣。 盛稱集一可任以事, 上曰: "北門雖重, 此事實係八路戎政, 爲任尤大, 宜遞其藩任, 同議軍制。" 遂設廳。 郞廳, 不論文、武、蔭擇差, 凡八員。 集一褊量小技, 薄有口給, 衒鬻寸能, 以爲進取計, 如申琓冊子條陳事, 皆集一所主張也。 廟堂以爲, 曉達時務, 至加推詡, 欲差備局堂上, 而公議不許, 乃爲集一, 別設一局。 集一益自負妄, 欲紛更庶事, 識者知其必敗。


  • 【태백산사고본】 45책 38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46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농업-전제(田制) / 재정-전세(田稅) / 인사-선발(選拔) / 구휼(救恤)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 인물(人物)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