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밖의 관왕묘에 행차하려 하니, 예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관무안왕(關武安王)416) 은 정충 대의(精忠大義)가 해와 별처럼 밝아서 명(明)나라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처음으로 수정후(壽亭侯)417) 의 묘(廟)를 창건하여 천하의 도읍(都邑)에 모두 사당(祠堂)을 세웠으니, 숭배하여 받드는 뜻을 대개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묘(廟)는 바로 임진년418) 에 유격장(游擊將) 진인(陳璘)이 세운 바이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 재력(財力)을 내어 도왔는데, 묘(廟)가 완성되자 선조(宣祖)께서도 일찍이 친히 허둥하셨고, 나는 지나간 해 능(陵)에 참배할 때에 동묘(東廟)를 지나 들어갔는데, 대개 충의(忠義)의 기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천년 후에까지 감개(感慨)하게 하였다. 선조께서 거둥하신 것과 내가 두루 본 것은 모두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듣건대 남묘(南廟)에는 생상(生像)을 안치하였다고 하는데 내일 돌아오는 길에 거쳐서 가려고 하니 예조(禮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니, 예조에서 신미년419) 의 예(例)에 의하여 손을 들어 읍(揖)하는 것으로 의주(儀註)를 정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양 경리(楊經理)420) 의 선무사(宣武祠)가 숭례문 안에 있는데, 선조(宣祖)께서 ‘재조번방(再造藩邦)’이란 네 글자를 친히 써서 걸었었다. 우리 나라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덕을 힙입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생사육골(生死肉骨)421) 의 은혜가 있었는데, 천지가 번복(翻覆)되어 일이 오늘날과 다르다. 예전에 내가 칙사(勅使)를 맞이하러 왕래하는 길에 유사(遺祠)를 돌아보며 마음속에 감개하였으니, 별도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교리(校理) 이관명(李觀命)과 이만성(李晩成)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내일 회가(回駕)하시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어가서 관람하신다는 하교가 계셨다 합니다. 그윽이 보건대, 전하께서 먼 세대에 서로 감동(感動)하는 뜻이 보통의 만 배에 뛰어나십니다. 관왕(關王)의 정충 대의(精忠大義)는 해와 별처럼 환하게 게양(揭揚)되어 그 수치를 씻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는 뜻이 어제처럼 빛나니 천년 후에도 족히 충의(忠義)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데, 하물며 이제 가까스로 북사(北使)를 전송하고 길이 유묘(遺廟)에 지나가게 되니 돌아보고 감탄을 일으키는 성상의 생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군주의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머무는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예전의 의거할 예(禮)가 없는데도 경솔하게 행하면 먼 외방에서 갑자기 듣고는 망녕되게 서로 추측하며 혹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일에서 나왔다.’고 여길 것이니, 여러 사람의 의혹을 풀 수가 없으며, 또 묘(廟)에 들어가실 즈음에 의식 절차도 구애됨이 있습니다. 지나간 해에 손을 들어 읍(揖)한 것은 창졸간에 임시변통으로 행한 것인데, 지금 다시 강구(講究)하지 않고서 이를 모방하여 행하면 예(禮)에 과연 어떠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선무사(宣武祠)에 치제(致祭)하는 것 또한 성대한 행사에 관계되니, 이제 만약 똑같이 관원을 보내어 제물을 올리게 하면 예(禮)의 뜻과 사체(事體) 두 가지가 적당하게 되어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관왕묘에 거쳐 간다는 하교는 우연한 것이 아니니, 결단코 그만 둘 수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6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1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왕실-행행(行幸) / 풍속-예속(禮俗)
- [註 416]관무안왕(關武安王) : 중국 삼국 시대의 장수 관우(關羽).
- [註 417]
수정후(壽亭侯) : 관우.- [註 418]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註 419]
신미년 : 1691 숙종 17년.- [註 420]
양 경리(楊經理) :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 [註 421]
생사육골(生死肉骨) : 죽은 사람을 살려 주고 뼈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큰 은혜를 입음을 이른 말.○上下敎曰: "關武安王精忠大義, 昭如日星。 皇明 太祖皇帝, 肇創壽亭候廟, 天下都邑, 莫不立祠, 崇奉之意, 槪可想矣。 我國崇禮門外, 卽壬辰遊擊陳璘所建也。 其時我國, 出財力以助之, 廟成, 宣廟亦嘗親幸。 予於頃年拜陵時, 歷入東廟, 蓋其忠義之氣, 令人感慨於千載之下。 宣廟臨幸, 予之歷見, 皆非出於遊觀之意也。 聞南廟安生像。 明日擧動歸路, 欲歷過。 其令禮曹稟處。 禮曹請依辛未年例, 以擧手揖, 定儀註, 從之。 上又曰: "楊經理 宣武祠, 在於崇禮門內。 宣廟親書再造藩邦四字揭之。 我國家賴神宗皇帝之德, 得至今日, 實有生死肉骨之恩, 而天地翻覆, 事異今日。 昔予於迎勑往來之路, 顧瞻遺祠, 感慨于中。 其別遣官致祭。" 校理李觀命、李晩成, 上箚曰:
伏聞明日回鑾之路, 有歷臨關廟之敎。 竊覵殿下曠世相感之意, 出尋常萬萬也。 關王之精忠大義, 昭揭日星。 其灑恥除凶之意, 炳然如昨, 千載之下, 有足興起。 矧今纔餞北客, 路過遺廟, 顧瞻興嗟, 聖念可想, 第惟人君一動一靜, 不可不愼, 而禮無前據, 率爾行之, 遠外驟聞, 妄相忖度, 以爲或出於遊觀之擧, 則衆人之惑, 無以解之。 且於入廟之際, 儀節有礙。 頃年擧手行揖, 出於倉卒權行。 今乃不復講究, 倣以行之, 未知於禮, 果如何? 臣愚以謂, 宣武祠致祭, 亦係盛擧, 今若一體遣官, 奠之芬苾, 則禮意事體, 兩得而不悖矣。
答曰: "今玆歷臨之敎, 意非偶然, 決不可已也。"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61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31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왕실-행행(行幸) / 풍속-예속(禮俗)
- [註 417]